117 제가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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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제가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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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제가 원해요
2022.08.11.
헤르한을 먼저 내실 안으로 들여보낸 뒤, 리엘라는 다시 2층 문 앞으로 나왔다.
보초를 서던 안델이 웬 병사 하나와 실랑이를 하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역시나 그들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안델 경.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닙니다. 블리니테 님. 소란을 피웠다면 송구합니다.”
기사 안델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문제의 병사’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리엘라는 직접 그에게 나아갔다.
“내게 볼 일이 있나요?”
“…….”
“괜찮으니 고개를 들어봐요.”
“…….”
‘블리니테 님께서 명하시는데 감히!’ 하는 기사의 으름장에 겨우 고개를 든 병사와 눈이 마주친 순간, 리엘라는 기시감에 소름이 돋았다.
저 공허한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것일까?
리엘라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일부러 웃는 얼굴로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 보고서를 전달하러 온 거로군요. 내게 줘요.”
리엘라가 손을 뻗었다.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그를 직접 ‘만져봐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손끝이 막 닿기 전.
“아닙니다. 무지한 탓에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병사는 그렇게 말하며 큰 보폭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는 뒤로 몇 발 더 물러나더니 그대로 휙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예비 황후인 리엘라는 지금 황궁 안에서 황제인 헤르한에 비견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리엘라를 앞에 두고 허락도 없이 먼저 몸을 돌려 가버린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게 너무 황당한 나머지 안델은 말도 잇지 못하고 벙쪄 있다가 몇 초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고쳤다.
“죄송합니다. 블리니테 님. 아무래도 수상한 녀석입니다. 제가 당장 잡아 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뇨. 그냥 둬요.”
“예?”
“대신 아시온 대장을 불러와 주겠어요? 지금 바로요.”
조금 뒤, 아시온이 심각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그때까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리엘라는, 아시온을 보자마자 제 생각을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급하게 오느라 가뜩이나 숨을 몰아쉬던 아시온은 점점 더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군요.”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어요. 그냥 제 느낌이 그래서…….”
“리엘라 님의 직감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요?”
리엘라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차분히 들어준 아시온은, 마지막에 결연하고 든든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확인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맡겨 주십시오.”
*
아시온이 듬직한 것과는 별개로 리엘라의 고민은 짙어졌다.
내실에 들어온 후로도 줄곧 반듯하게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달콤한 향유 냄새가 주변에 감돌았다.
산뜻한 습기도. 몽글몽글한 비누 거품 냄새도 느껴졌다.
헤르한이 목욕을 마치고 나온 것이었다.
“5분이나 걸렸어. 나 온 걸 알아채는 거.”
리엘라가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조금 토라진 듯한 목소리의 질책이 날아들었다.
리엘라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달고, 축축하고, 더운 향기를 몰고 온 헤르한이 의자 등받이 뒤에서 리엘라를 끌어안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응?”
“그게…….”
리엘라는 조금 전의 그 병사 얘기를 하려고 했다.
용병단 동료들의 처분에 관한 얘기나, 오늘 루가 당신의 특명을 받아 자신을 잘 달래주었다는 얘기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를 말할 새도 주지 않고 헤르한이 리엘라의 목덜미를 물고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폐하…….”
헤르한의 입술이 리엘라의 목덜미를 타고 천천히 올라왔다.
입맞춤이라기보단, 보물 대하듯 아주 소중하게 어르면서 살결 하나하나에 숨결을 불어넣는 느낌이었다.
목. 턱 밑. 귓불과 볼을 거쳐 온 입술의 종착지는 리엘라의 입술이었다.
리엘라는 옆으로 살짝 고개를 틀어 한발 한발 천천히 다가온 달콤한 입술을 기꺼이 맞이했다.
입술끼리 맞닿고 나서도 헤르한은 한동안 부드러운 리엘라의 입술 표면을 두드리고 쓸면서 간지럽게 어르기만 했다.
살짝 벌어진 잇새로 그가 터트리는 숨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데, 평소와 다르게 깊이 파고드는 움직임은 없었다.
또 장난기가 도져서 일부러 애를 태우는 건가 싶을 정도로.
그때, 한껏 달뜬 마음에 더 붉어진 리엘라의 시선이 헤르한의 오른손에 닿았다.
빠드득.
소리가 들릴 정도로, 헤르한의 성난 손아귀가 의자 팔걸이를 꽉 틀어쥐고 있었다.
단단한 팔뚝을 타고 툭 불거진 힘줄이나 하도 강하게 힘을 주어 핏기가 가신 손.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폐하.”
리엘라는 잠시 고개를 뒤로 물리며 동그란 눈을 치켜떴다.
“왜 그렇게 힘을 주고 계세요?”
꼭 뭔가를 필사적으로 참는 사람처럼.
“……아닌데.”
“맞는 거 같은데?”
“…….”
헤르한은 뭐라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대신 애매한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까지 피하고?’
리엘라는 눈을 살짝 흘겨 뜨며 팔걸이를 쥔 헤르한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아직도 팔에 힘을 가득 주고 있던 헤르한은 리엘라의 손길에 움찔하며 동공을 떨었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어요?”
“그런 게 아니고…….”
망설이던 헤르한은 이내 마지못해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네가 너무 아까워서.”
“……?”
“네가 너무 아깝고 소중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
그래서 아이처럼 귀엽게 뽀뽀만 하면서 본인의 충동은 꾹 참았다고?
소중하게 여겨주는 마음은 고맙다지만, 그걸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진심인가 아니면 또 다른 장난인가 싶어서 헤르한을 빤히 보는데 정작 그의 얼굴은 말할 수 없이 진지했다.
조금은 화가 난 듯이 보이기도 했다.
“오늘 그자의 기억을 전부 읽었다.”
“아…….”
그자. 아마도 행크.
리엘라는 그제야 헤르한의 몸이 평소보다 경직되어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정확히는, 그자의 기억 속 너를 보았지.”
“폐하가 보시기에 어떻던가요? 예전의 저. 예뻤어요?”
리엘라의 물음에 헤르한이 입술을 꾹 물었다.
어째선지 야속함이 가득 담긴 눈길이 리엘라에게로 날아들었다. 지금 그게 문제냐, 하듯이.
“예뻤냐구요.”
리엘라의 맑은 재촉에 헤르한의 눈꺼풀은 체념하듯 감겼다.
“그래. 예쁘더라.”
“다행이다.”
“예쁠 줄 알았는데 더 예뻤고.”
“…….”
“고단할 줄 알았는데 더 고단했고.”
이번에는 리엘라가 입술을 물었다.
눈은 열심히 웃으려 하는데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그걸 안 헤르한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어서 더욱.
일일이 말을 하지 않아도 제 아픈 날들을 다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었다.
“기특해. 그걸 다 견뎌내고 내 앞에 나타나 줘서.”
이 감사하고 사랑스러운 순간에 울어 버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리엘라는 있는 힘껏 웃으면서 촉촉한 눈을 들어 보였다.
“그렇게 제가 기특해서 키스도 함부로 못 하는 거라고요?”
“아, 그건.”
헤르한이 살짝 머뭇거렸다.
‘내 마음이 급해서 널 몰아세우면 안 되니까.’라며 낮은 변명을 읊조릴 때조차 그는 진지했다.
“맹세할게. 리엘라. 앞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네가 아플 일은 없을 거야.”
“…….”
“다시는 이 손이 부르트는 일도 없을 거고. 이 고운 몸에 흠집이 나는 일도 없을 거고.”
“이미 그렇게 해주고 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키스해주세요. 그런 건 참지 않으셔도 돼요.”
그 많은 기억을 다 보았다면 힘이 들 텐데.
그 어느 때보다도 정화의 힘이 간절할 텐데.
그런데도, 아니, 오히려 그랬기에 헤르한은 더 충동을 억눌렀던 것이다. 이성을 잃고 조급한 갈증을 채우다가 또 자신을 무리시킬까 봐.
하지만 리엘라는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나 자신을 보물처럼 여겨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한때 아팠던 날들보다 더 괴로운 순간을 겪는다고 해도 천국일 것이었다.
“폐하. 제가 원해요.”
리엘라가 헤르한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어서요.”
힘줄이 불거진 손은 부술 듯 쥐고 있던 팔걸이를 놓고 리엘라의 몸을 안아 들었다.
*
다음날 오후, 제스는 느지막이 내실을 찾았다.
어제 주군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으니 오늘은 리엘라가 탈진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주군이 무리한 다음날마다 그 부담을 다 껴안고 대신 의식을 잃은 건 리엘라 쪽이었으니까.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네. 가뿐해요.”
막상 와보니 리엘라의 얼굴이 매끈매끈했다.
혈색도 좋고 목소리도 밝은데 퀭한 쪽은 외려 헤르한 쪽이었다.
“뭡니까? 밤새 폐하를 고문이라도 하셨습니까?”
“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전 정말 괜찮다고 했는데…….”
“엥? 정말로 고문을 했다고요?”
반은 농담으로 말을 던졌던 제스는 온갖 눈치를 동원해 간밤의 상황을 파악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헤르한은 리엘라가 자신을 정화하느라 무리하는 것이 새삼 마음 아팠던 모양이다.
그래서 리엘라가 힘들지 않을 만큼만 ‘조절’이란 걸 한답시고 ‘금욕의 밤’을 보낸 것이었다.
맨살이 많이 닿으면 안 된다면서 몇 겹이나 되는 옷으로 리엘라를 꽁꽁 감싸고, 그저 밤새 끌어안고만 있었다나.
물론 그 정도로도 정화는 충분했겠지만, 헤르한의 정신 건강에 썩 이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각방을 쓰시지?”
“부부가 어떻게 각방을 써?”
“아니, 아직 부부도 아닌……. 아. 예.”
저 사랑에 눈먼 주군과 말은 섞어 무엇 하나.
제스는 그냥 혀를 내두르고서 왕진 가방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온 김에 혈압과 피로도를 측정하려고 리엘라의 팔을 고무줄로 감았는데 곧장 헤르한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너무 세게 감았잖아.”
“평소대로 한 거거든요? 아휴. 내가 은퇴를 하든 해야지.”
아시온이 내실 문을 두드린 건 그쯤이었다.
헤르한은 당연히 자신을 부르는 것인 줄 알고 편하게 벗어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아시온이 다가간 건 리엘라 쪽이었다.
“리엘라 님. 함께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헤르한과 제스의 다툼이 마냥 재밌어 웃던 리엘라는 슬며시 미소를 거두었다.
뭐랄까. 이건.
‘올 게 왔다’라는 느낌이었다.
*
병사는 저벅저벅 걸었다.
황궁에서 그리 멀진 않지만 산세가 험해서 인적은 드문 숲이었다.
사방이 험한 절벽이고 위험한 산짐승도 많아서, 행방불명된 누군가가 다음날 시체로 발견된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을 곳.
그 숲 한가운데서 병사는 검을 꺼냈다.
그러고는 예리하게 번뜩이는 날을 세워 제 심장에 찔러 넣으려는 그 찰나.
‘챙!’
‘댕그르르.’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온 검이 병사의 검을 쳐냈다.
우두두. 땅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먼지가 피어오르며 많은 이들이 그의 주변으로 들이닥쳤다.
황실의 정예 기사단이었다.
“라모슈! 당장 허튼짓을 멈추고 투항해라!”
아시온이 외쳤으나 병사는 꼼짝하지 않았다.
‘라모슈’라는 자신의 이름을 몰라서이기도 했고, 안다 해도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이기도 했다.
곧장 기사 몇이 달려들어 그의 사지를 결박하고 무릎을 꿇렸다.
그때까지도 병사는 그저 각 부품이 어긋난 목각인형처럼 삐걱댈 뿐이었는데.
“……라모슈.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요?”
고운 악기의 선율처럼 여린 음성이 그를 불렀다.
깊은 잠을 깨우듯. 혹은 따끔하게 꾸짖듯.
리엘라였다.
“고개를 들어요. 정신을 차려 봐요.”
홀린 듯 스르륵 고개를 든 병사의 볼을 리엘라가 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와 동시에 초점 없이 멍하던 병사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어, 엇!?”
꼭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멀뚱멀뚱 주변을 살피던 병사는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곤 패닉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여, 여기가 어디? 제가 왜 여기에? 브, 블리니테 님? 황제 폐하까지!?”
***
엘슈바이크 제국의 영토를 벗어난 먼 곳.
깊은 숲속의 별장, 어두침침한 방 한구석의 안락의자에 파묻혀 잠들어 있던 카일은 번뜩 눈을 떴다.
“아.”
사방이 고요했다.
“들켰네.”
나른한 목소리가 방 안에 고독히 퍼졌다.
먼지가 피어오르던 숲의 전경은 마치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