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저 손길은 내 것이어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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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저 손길은 내 것이어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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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저 손길은 내 것이어야 했다고
2022.08.07.
***
‘타악!’
그레타는 잔이 깨질 정도로 세게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힘껏 성질을 부려 봐도, 저쪽에 앉은 사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평화로운 식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레타는 그게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이 이렇게 마주 앉아서 단란한 식사나 할 때는 아니지 않나?
“그쪽은 대체 하는 일이 뭐야?”
지난 며칠, 한동안은 서로 입을 꾹 닫고 기싸움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침묵이 길어져봤자 답답한 건 자기뿐이라는 걸, 그레타는 이제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레타가 입을 열자 그녀를 무시로 일관하던 사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음흉한 자식.’
그레타는 부들부들 떨며 포크를 꾹 쥐었다.
바로 뒤에 녀석의 하인들이 듬직하게 버티고 있으니 힘으로 덤비는 건 불가능했다.
“황제랑 리엘라가 제국으로 돌아갔어.”
“알아.”
“기어이 내 왕실을 다 먹고서, 내 백성들한테 박수갈채까지 받으면서 우쭐거리면서 갔다고!”
“아. ‘내 백성들’이라는 생각이 있긴 했나? ‘왕녀님’을 부르짖으면서 다 죽어 나갈 때는 아는 체도 안 하더……!”
사내가 말이 도중에 끊겼다.
그레타가 내던진 포크가 그의 얼굴을 찍은 바람에.
‘덤비는 건 못 해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레타는 입꼬리를 비죽거리며 한쪽 얼굴을 감싸고 고개 숙인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식탁 뒤쪽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하인들이 곧장 사내에게로 달려갔다. 나머지 몇은 그레타를 일으켜 세워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그래도 그레타는 굴하지 않고 목청을 키웠다.
“나 비꼴 시간이 있으면 그쪽 할 일이나 제대로 해보는 게 어떨까? 황제가 가까이에 있을 때 암살자 하나라도 보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레타의 발악에도 사내는 평온했다.
그는 가볍게 하인들을 물리고서 자기 볼에 난 상처를 스윽 훑었다.
손끝에 옅게 묻어난 피를 보는 하늘색 눈동자는 그저 공허할 뿐이었다.
“암살자 하나 보내서 죽일 수 있는 상대였으면, 당신이 진작 처리하지 그랬나?”
“…….”
차분한 물음에 그레타는 한풀 기세를 꺾었다.
분하지만 할 말이 없는 건 사실이었기에.
“그리고 난 그들을 죽일 계획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래.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계획이 뭐냐고?”
사내가 엔릴의 후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쩔 것인데?
황위를 찬탈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리엘라를 가지려는 거야? 복수? 혹은 연심?
사내가 리엘라를 원한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지만 그뿐이었다. 정확한 의미와 계획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하죠.”
“아니……!”
“식사나 마저 해요. 아, 참. 다리는 다 나았나?”
자신이 얼굴에 피까지 냈는데도 저 태평한 말투라니.
그레타는 상황을 또 흐지부지 넘기려는 사내 앞에서 눈살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럼 그쪽 이름이라도 알려줘.”
“이름?”
“동료라며? 내가 여기 온 지도 한 달이나 되었는데, 그 정도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웬일로 곰곰이 생각하며 그레타의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했는데.
“……도련님.”
“뭐?”
“이름은 없어. 그냥 도련님이라고 불러.”
또 어린애 말장난하듯 하는 대답에 그레타는 분하고 황당한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이쯤 되면 저건 그냥 뇌도 없고 정신 나간 바보가 아닐까.
“……미친놈.”
그레타가 읊조린 욕설에 ‘도련님’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레타는 끝까지 제 팔을 붙잡고 놓지 않는 하인들과 조금 씨름을 하다가, 끝내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
하인이 면목 없다는 듯한 얼굴로 사내 앞에 고개를 숙인 건 몇 시간 뒤였다.
“열쇠를 잃어버렸다고요?”
“예. 죄송합니다. 주인님. 분명히 아까 저녁 식사 전까지는 주머니 안에 있었는데. 아……. 혹시.”
아까의 일을 곱씹던 하인이 고개를 번뜩 들었다.
사내는 어렵지 않게 하인이 깨달은 바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왕녀가 훔쳐 간 건가요?”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쩐지 평소랑 다르게 되지도 않는 몸싸움을 건다 했더니.”
“풉. 제법이네.”
하인이 으득으득 소리를 내며 고개를 비틀었다.
당장 왕녀에게 가서 열쇠를 되찾아오겠다는 것을 저지시킨 건 사내였다.
“왕녀도 나름 애를 쓰는 모양인데, 그냥 내버려 둬요.”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왕녀 말이 맞아요. 이젠 슬슬 움직여볼 때도 됐지. 당분간은 감시할 필요 없으니 다들 휴가나 다녀와요.”
*
그날 밤.
이불을 덮어쓰고 꾸역꾸역 자는 척을 하던 그레타는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벌떡 일어나 슬쩍 창밖을 엿보니, 하인들이 말을 타고 저택을 떠나고 있었다.
‘뭐야? 단체로 어딜 가? 다섯, 여섯, 일곱……. 전부 다 나가잖아?’
그렇다는 건, 지금 이 저택에 남아 있는 게 사내와 자신, 단둘뿐이라는 뜻.
‘위험할 정도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네.’
2층 끝방의 열쇠를 훔쳐내자마자 하인들이 죄다 출타하다니.
분명 찝찝했지만 그렇다고 그냥 흘려보내긴 아까운 기회였다.
그동안은 저 빌어먹을 하인들의 감시에 몸이 매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특히 며칠에 한 번씩 사내는 밤이 되면 2층 끝방으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그는데, 그날이면 경비가 더 삼엄했다.
‘그 방에서 뭔가를 하는 게 분명해. 흑마법이나 저주 같은 거겠지.’
그레타가 아까 하인의 주머니에서 슬쩍한 열쇠가 바로 그 방의 열쇠였다.
쉽게 훔쳐낸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며칠간 눈치를 보면서 수색도 하고, 계획을 짜서 애를 쓴 결과물.
그레타는 그 열쇠를 빤히 보다가 꾹 쥐었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들어가 볼 수 있을지 몰라.’
그레타는 조심스럽게 일어서서 맨발로 방에서 나와 2층 끝방 앞에 섰다.
거기서 한참 문에 귀를 대고 숨을 죽여 보아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길래 열쇠로 문을 따고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뿔싸! 저 자식이 안에 있었……. 어?’
기겁해서 뒷걸음질을 치던 그레타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어두운 방 안, 안쪽에 놓인 안락의자에 사내가 몸을 파묻은 채 편안히 눈을 감고 있는 것이었다.
‘설마…….’
그레타는 안으로 한 발 더 뻗었다. 사내는 미동도 없었다.
‘설마 자는 거야?’
그레타는 이 방 안에 잠입한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잊고 한참을 그 자리에 정지해 있었다.
황당해서였다.
엄청 위험하고 은밀한 저주 의식이라도 준비하는 건가 했더니.
잠을 자고 있다고? 바로 옆에 번듯한 침실을 놔두고 굳이 이런 음침한 데에 들어와서?
‘하.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마음 같아선 사내의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지금 이렇게 잠이나 쳐 잘 때냐고 화를 내고 싶었다.
그래도 일단 패악질을 꾹 참고 사내의 주변을 탐색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책. 서랍 안의 잡동사니. 구석에 쌓인 상자 속 먼지 낀 물건들.
전부 별 볼 일 없어 흥미가 식어가던 그때, 그레타의 눈이 반짝였다.
‘어라.’
그저 손때 묻은 낡은 물건들 틈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
알이 굵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였다.
‘사파이어? 아닌 것 같은데.’
나름 왕가의 일원으로 사치를 일삼았던 그레타도 처음 보는 보석이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듯 아주 짙은 푸른빛과 광택이 자르르한 표면.
보석을 둘러싼 은테와 체인도 세공이 섬세했고 윤기가 흘렀다.
정성스럽게 관리해 온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뭐 이런 걸 갖고 있…….’
그때.
“……의 심부름으로. ……보고서를.”
‘악! 깜짝이야!’
그레타는 흠칫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사내가 웅얼거리면서 뭔가 말을 했는데, 안락의자에 폭 기대 잠든 모양새는 여전했다.
‘뭐야? 잠꼬대한 거야? 아니, 이보세요. 도련님. 진짜 가지가지 하시네요. 예?’
***
“에릭 경의 심부름으로 보고서를 올리러 왔습니다.”
“응? 이 시간에?”
한밤중에도 번쩍번쩍 사방이 환한 엘슈바이크 제국 황실의 본궁.
계단을 올라 2층 문 앞에 다다른 병사는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에게 보고서를 내보였다.
“아. 이번에 왕국 원정을 다녀온 편대로군. 보고서는 내가 전할 테니 이리 내도록.”
“제가 직접 폐하의 집무실에 놓고 오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본궁 2층은 허가받은 인원 외엔 출입 금지란 걸 모르나?”
문을 지키던 기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기사의 견장엔 붉은 장미 문양이 새 자수로 놓여 있었다. 황후의 근위대라는 뜻이었다.
병사는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예비 황후께서 내실로 거처를 옮긴 이후로 본궁 전체 경비가 강화되었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그걸 모를 리는 없는데?”
기사의 눈초리가 예리했다.
황후 근위대는 황제가 일일이 발탁한 정예라더니, 과연 허울뿐인 명성은 아닌 모양이었다.
“너. 정확히 어느 편대 소속의 누구지?”
“…….”
“못 들었나? 관등성명 대라고.”
기사의 엄한 명령에도 병사는 무표정한 채로 미동하지 않았다.
그 멍한 얼굴 때문일까.
기어이 기사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으려는 찰나, 대뜸 2층 문이 열렸다.
내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움직이던 병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뒤로 주춤했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이 다름 아닌 ‘리엘라 블리니테’였기 때문에.
“앗. 오늘 보초는 안델 경이었군요? 고생이 많아요.”
리엘라의 목소리.
“예. 블리니테 님.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폐하를 데리러요.”
“폐하께선 오늘 잔업으로 바쁘시니 먼저 쉬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보고 싶어서요. 왠지 느낌이 그래요. 폐하가 곧 오실 것 같거든요?”
리엘라의 반짝이는 눈.
리엘라의 사랑스러운 미소.
“……아! 거봐요. 내 말 맞죠? 저기 오시잖아요. 후훗. 폐하!”
리엘라의 뒷모습.
불꽃처럼 출렁이며 우아하게 물결치는 머리카락과 그 자취가 잠시 머물렀던 곳에 그대로 남은 그리운 향기.
보고서를 든 병사는 저도 모르게 그런 리엘라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어? 이, 이봐. 잠깐 멈춰.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관등성명을 대라니까 어딜 가는 거야?”
병사는 기사가 붙드는 것도 무시하고 한 발이라도 더 앞으로 내뻗었다.
다행히 리엘라는 아예 멀어지지 않았다.
치맛단을 들고 후다닥 계단을 내려간 그녀는 1층 로비의 붉은 카펫 위에 멈추어 섰다.
아니, 정확히는, 고단한 행색으로 막 돌아온 황제의 앞에 섰다.
“리…….”
“폐하!”
황제가 그녀의 이름을 차마 머금기도 전에 먼저 리엘라가 그의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황후가 될 여인의 품위엔 조금 어긋나는 일일지 몰라도 그걸 타박하는 이는 없었다.
황제 뒤의 기사와 참모들의 얼굴엔 오히려 비로소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리엘라가 와주었으니 이제야 안심이라는 듯이.
“리엘라. 안에서 쉬고 있지 않고?”
“폐하가 절 부르셨잖아요.”
“내가?”
“네. 아니에요? 난 분명히 들은 것 같은데?”
리엘라가 황제에게 안긴 상태로 고개만 쏙 들어 물었다.
저를 향해 태연하게 뜬 눈을 마주한 순간 황제는 청량한 웃음을 터트렸다.
분명 로비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비틀비틀 산송장처럼 걸었으면서, 단 한순간에 생명의 원천에 닿은 듯 환희에 찬 얼굴로.
“맞아. 간절히 널 계속 부르고 있었어.”
“그거 봐. 내 말이 맞죠?”
리엘라가 가느다란 손끝으로 그런 황제의 황금빛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폐하. 무리하지 마세요.”
“……그래.”
“정 무리해야 할 것 같으면, 절 데리고 다니시든지.”
“그러면 온종일 내 옆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저야, 환영이죠.”
마냥 사랑이 넘쳐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모두가 고개를 숙이는데, 오로지 한 사람, 계단 위 병사의 멍한 시선만이 섬뜩한 빛깔로 둘을 향했다.
병사는 생각했다.
리엘라의 저 손길은 자기 것이어야 했다고.
“카일. 힘들면 말해. 내가 손 꼭 잡아줄 테니까. 응? 알았지?”
저 괘씸한 황제가 리엘라를 알기도 전이었던 그 어린 날.
리엘라의 손길을 먼저 받은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병사는.
아니, 병사의 초점 없는 눈으로 리엘라를 바라보는 카일은 애끓는 탐욕에 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