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 리엘라가 잃어버린 모든 것 (115/154)


  • #115 리엘라가 잃어버린 모든 것
    2022.08.04.


    ***

    유례없는 흉년이었다.

    하긴, 이 빌어먹을 땅에 풍년이 든 적이 있기는 했냐만은.


    “죄다 쓰레기들 뿐이네. 쳇. 그냥 돌아가자고.”

    행크는 동료들과 역병이 휩쓸고 간 마을 안에 들어선 참이었다.

    혹시 뭐라도 주워 먹을 것이 있을까 싶어서였지만, 역시 아니었다.

    갑자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면서 파비안이 떼를 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 녀석아. 쥐새끼 하나 안 보이는구먼, 대체 어디에 사람이 있다는 거야?”

    “여기 안에 있어요! 진짜로! 빨리 구해줘요. 안 그러면 행크 아저씨는 멍청이야!”

    행크는 반신반의하면서 골목 구석 어딘가의 무너진 벽을 치웠다.

    만일 정말 사람이 있다면, 목숨을 구해준 값으로 얼마를 불러야 적당할지를 셈하면서.

    그런데.


    “……꼬마잖아. 그것도 여자애.”

    “재수 옴 붙었군. 그냥 가자!”

    별 볼 일 없는 여자애 하나에 동료들은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 아이를 잡아 일으킨 건 행크였다.


    “애송이. 너 이름이 뭐냐?”

    “……리엘라. ……리엘라 블리니테.”

    잔뜩 겁을 먹은 아이는 울음과 딸꾹질 사이로 제 이름 하나만을 분명히 말했다.

    동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따지기 시작했다.

    설마 저 아이를 거둘 생각이냐고.


    “다들 눈 똑바로 뜨고 저 애 차림새를 보라고.”

    그제야 모두의 눈이 번뜩였다.

    뿌옇게 뒤집어쓴 먼지 아래, 아이가 걸친 비싼 옷과 신발.

    특히 이목을 잡아끄는 건 누가 봐도 어느 대단한 가문의 가보쯤은 되어 보이는 푸른 보석 목걸이였다.


    “절대 평범한 애는 아니야. 부모든 뭐든 찾아주면 사례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겠어?”

    행크는 아이에게서 목걸이를 빼앗아 제 목에 걸었다.


    “애송아, 이건 네가 차기엔 너무 무거워 보이니 내가 맡아주마.”

    아이는 당연히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순순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의 가족을 찾아준다는 것은.

    무엇보다 행크네는 당장 생업이 급했고, 그렇게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 문득 돌아보면 아이는 쑥쑥 자라 있었다.


    “행크! 있잖아요! 오늘 로즈 아주머니한테 바느질을 배웠는데!”

    리엘라는 그런 속도 모르고 늘 방긋방긋 웃으며 꽁무니를 쫓았다.

    행크는 그게 못내 지겨웠다.

    저 귀찮은 아이를 거둔 것이 후회돼서 이제라도 버릴까 생각했을 땐, 꽤 덩치가 커버린 파비안이 리엘라를 지키고 서 있었다.


    ‘쯧. 이젠 더 팔 것도 없고, 이거 하나 남았는데.’

    리엘라에게서 빼앗은 푸른 목걸이는 어느새 행크의 일부와도 같았다.

    그건 ‘부적’이었다.

    언젠가는 저 애가 톡톡히 제값을 다 하리라는, 분명한 믿음이 긷든 부적.


    “오. 귀해 보이는 물건이로군?”

    “예. 혹 어디의 물건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리엘라의 출신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행크는 어느 저택을 찾았다.

    귀족이라고는 하는데 무슨 백작인지는 알 것도 없고, 사실은 뒤로 온갖 장물을 다 취급한다는 집안이었다.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팔고 싶다면 적당한 값을 쳐줌세.”

    “그것은 좀…….”

    하지만 거기서도 소득은 없었다.

    무슨 목걸이인지도 모른다면서 꽤 비싼 값을 불렀지만, 그래서 더욱 팔고 싶진 않았다.

    이건 제 인생을 역전할 마지막 끈이었으니까.


    ‘어쨌든 이번에도 허탕이잖아. 쳇. 사실은 이것도 별 볼 일 없는 거 아니야?’

    침을 탁 뱉으며 밖으로 나온 행크는 저택 담장 안에 들어와 있는 리엘라를 발견했다.


    “아니, 저 애송이가! 야 인마. 안으로 들어오지 말고 대문 밖에서 고분고분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아?”

    행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 돈벌이도 안 되는 것, 파비안이랑 쌍으로 엮어서라도 어디에 갖다 팔든 해야지!’ 욕을 하는데 그때 갑자기 백작이란 자가 담장 쪽으로 튀어 나갔다.


    “오오! 카일? 어떻게 나온 것이냐? 응?”

    그 외침에 저택 안 사람들이 다 입 벌리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제야 행크는 리엘라가 손을 꼭 잡은 창백한 사내아이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집안의 막내 도련님이 날 때부터 죽을병이라 병상에만 누워서 오늘내일한다던가.

    그때 리엘라가 말했다.


    “친구예요.”

    “뭐?”

     

     


    “오늘부터 친구 하기로 했어요. 내가 꽃 설명해줬어요.”

    행크는 그런 리엘라의 손을 꼭 잡고 퉁명스러운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푸른 머리의 남자아이를 언짢게 노려보았다.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명했다.

    카일이 혼자 침대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은 일 년 만이라고. 그동안 무슨 수를 써도 병세가 나아지질 않았는데, 이 여자아이가 행운을 가져다준 모양이라고.


    ‘행운? 개뿔이. 돈도 안 되는 것을.’

    “아이야. 앞으로 종종 놀러 와서 우리 카일의 친구가 되어주겠느냐?”

    “지금도 친구예요.”

    “그래그래. 착하구나.”

    한참 리엘라와 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뻐하던 백작은 이내 행크에게 돈다발 한 묶음을 내밀었다.


    “내일도 카일이 차도를 보이거든 돈을 더 주겠네.”

    행크는 그가 내미는 돈다발을 낚아챈 뒤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왔다.

    행운이니 뭐니 그딴 게 말이 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냥 무시하기엔 찝찝한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생각해 보면 말이야, 파비안도 리엘라를 만나기 전에는 제법 골골대지 않았어?”

    “리엘라를 데리고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일이 잘 풀린 것도 사실이지.”

    “어쩌면 그런 거 아닐까? 왜, 그…… 마녀라든지!”

    고민하던 행크는 며칠 뒤 반신반의하며 리엘라를 데리고 그 저택을 다시 찾았다.

    그날, 행크는 백작에게서 돈다발이 가득 든 가방을 받았다.

    며칠간 카일의 상태가 또 위중했는데 리엘라를 보자마자 다시 말도 하고 일어서기도 했다고.


    ‘뭐야, 진짜라고? 저거 진짜 마녀라도 되는 건가?’

    행크네는 아예 그 마을에 눌러앉아 종종 저택을 찾았다.

    카일 도련님과 놀아주고 온 날이면 리엘라는 유난히 기진맥진했지만 그건 행크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쏠쏠한 돈벌이가 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저택의 일가가 야반도주로 사라졌다.


    “아니, 이 새끼들이 다 어디로 튄 거야!?”

    행크는 하루아침 만에 사라진 돈줄에 분개했고, 리엘라의 여린 멱살까지 잡았다.


    “넌 알지? 놈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귀한 도련님이랑 늘 붙어 있었으니 뭐라도 들었을 거 아냐?”

    “몰라요, 저는……, 카일은 아무 말도 안 했…….”

    “모르긴 뭘 몰라! 너도 놈들이랑 같이 도망가려고 했던 거 아니야? 어?”

    “아니에요. 나는 행크랑 동료들이랑…….”

    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는 커다란 눈.

    그 붉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행크는 정말 이골이 났다.


    “어쩐지 밥값 좀 한다 했더니만! 제기랄!”

    그 뒤는 지옥이었다.

    한번 쉽게 돈을 벌다가 다시 일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그 도련님인지 뭔지, 사기꾼 아니야?”

    “사기 칠 게 뭐가 있겠어. 우리가 손해 본 건 없잖아?”

    “그래도 하루아침에 날라버린 거 보면 분명 수상한 놈들인 건 맞다니까.”

    “야. 리엘라. 뭐 좀 어떻게 해보란 말이야. 대단한 능력이 있다며? 행운을 가져온다며? 순 뻥이었어?”

    어른들의 원망에 아무 영문도 모르는 리엘라는 꽃송이 같은 고개만 무겁게 숙였다.


    “내가 돈 벌어올 거라니까요? 내가 엄청 부자가 돼서 다 책임질 테니까 리엘라 구박하지 마세요!”

    “뭐? 이 녀석아. 쥐뿔도 없는 게 말만!”

    파비안이 리엘라의 역성을 든 어느 날에, 행크는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목걸이를 팔기로 결심했다.


    “행크. 아무리 그래도……. 그것만은 팔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리엘라의 부모를 찾아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잖아.”

    “어쩌라고? 당장 우리가 굶어 죽게 생겼는데! 아직 못 찾은 걸 보면, 저 애송이네 부모도 다 어디서 뒈진 거라고!”

    행크는 저를 만류하는 동료들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그날따라 리엘라가 따라붙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리엘라는 늘 행크의 뒤를 졸졸 쫓았다.


    “행크. 그거 팔려고요? 행크가 엄청 아끼는 거잖아요.”

    리엘라는 그 목걸이가 옛날 옛적 행크에게 빼앗긴 제 것이라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뭘 안다고 날 걱정해.’

    행크는 그런 리엘라가 같잖았다.


    “내 일에 관심 끄고 꺼져. 애송아.”

    “…….”

    행크는 결국 동네에 이름 없는 장사치에게 목걸이를 헐값에 팔아넘기곤 그 돈으로 고기와 술을 사 왔다.

    그래놓고는 찝찝한 마음에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그런 행크의 천막 안으로 작은 몸이 옹송그리고 들어섰다.
    리엘라였다.


    ‘저 애송이가 왜.’

    자는 척하며 기다리니 리엘라가 그의 머리맡에서 조금 부스럭거리다가 무언가를 놓고 나갔다.

    아끼는 목걸이를 팔아서 상심했을 행크를 위해 마련한 선물.

    민가에서 파는 허접한 물건이지만, 리엘라로서는 가진 걸 전부 다 털어야 살 수 있었을, 목걸이 하나였다.


     

    ***



    “화, 황제 폐하. 제발 사……. 살려…….”

    끅. 끅.

    황제에게 목이 잡힌 행크는 곧 숨이 넘어갈 듯 꼴깍댔다.

    숨이 쉬어지질 않으니 머릿속이 하얘져서, 그 상태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체감할 수 없었다.

    다행히 황제는 어느 순간 힘을 풀고 뒤로 몇 발 물러났다.

    행크는 토악질하듯 숨을 몰아쉬다가, 곧장 절박하게 자기변호를 시작했다.


    “살기 궁해서 리엘라에게 조금 팍팍하게 군 건 맞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이를 내 딸처럼 키운 건 진짜라……. 어윽!”

    황제의 옆에 있던 기사가 칼등으로 등을 힘껏 내리치는 바람에 행크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제길.’

    그래. 인정에 매달리는 건 확실히 물 건너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거래를 하는 쪽으로 노선을 트는 수밖에는.


    “리엘라가 어엿한 황후가 되기 위해서라도 친부모는 찾아야 할 것 아닙니까? 제가 알고 있으니 열심히 도와드릴…….”

    “아니. 넌 모르잖아.”

    “예……?”

    행크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겨우 고개를 들어보니 황제는 감정이라곤 없는 괴물 같은 눈으로 저를 보면서도, 완벽한 확신에 차 있었다.


    “네가 알 리가 없지. 리엘라의 부모가 남긴 유품을 전부 팔아먹었잖아.”

    행크는 고통조차 잊고 입을 벌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황제는 다시 행크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턱을 쥐었다.


    “그, 그걸 어떻게 알…….”

    그새 내 뒷조사를 했나?

    그걸 뒷조사를 했다고 알 수 있는 건가?

    아! 다른 동료들이 벌써 불어버린 거로군!


    “미안하지만 다 틀렸어. 네 뒷조사를 하기엔 내 시간이 아깝고, 네 동료들은 뭘 불 것도 없이 다 숨이 끊어졌으니까.”

    그 말에 행크는 눈을 부릅떴다.

    황제의 대답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자신이 소리 내서 말을 했던가 혼동이 될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 속마음을 어떻게 알지?


    “내가 어떻게 네놈의 더러운 속마음을 다 아냐면.”

    빠드득.

    황제의 손아귀가 수염이 덥수룩한 턱을 짓이겼다.


    “진짜 마녀는 리엘라가 아니라 나거든.”

    행크는 그저 멍할 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헤르한은 그 멍청한 몰골을 노려보다가 그를 바닥에 내던지고 물러났다.

    그 같은 쓰레기가 제 말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럴 자격은 더더욱 없고.


    “치워. 아시온.”

    헤르한은 비틀거리며 감옥을 나왔다.

    그가 일시에 엿본 것은 무려 20여 년간의 기억이었다.

    그 숱한 기억 속 장면마다 리엘라는 말할 수 없이 어여쁘고, 또 어여쁜 만큼 가여워서 숨이 턱턱 막혔다.


    ‘리엘라.’

    헤르한은 리엘라가 죽을 만큼 간절했지만, 그보다 더 급한 것이 따로 있었다.


    “제스.”

    “예. 폐……. 아니!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헤르한은 급하게 청진기를 들고 뻗는 팔을 쳐내면서 이를 꽉 물었다.


    “당장 찾아야 할 물건이 하나 있어. 생김새를 알려줄 테니 수소문해 봐.”

    제스는 헤르한의 표정에 상황의 급박함을 바로 눈치챘다.

    어쩌면 이건 주군의 건강을 챙기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이라는 것을.

    제스는 진지하게 헤르한의 설명을 들으며 메모도 하고 그림도 그렸다.


    “대략 이렇게 생긴 목걸이란 거죠? 가운데에 타원형의 푸른색 보석이 박혀 있고. 황성의 장인들부터 호출해봐야겠습니다.”

    헤르한은 끔찍한 두통을 견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헤르한은 눈을 질끈 감고 대답을 속으로 삼켰다.

    리엘라의 가족. 세월. 자격.

    리엘라가 누려야 했으나 잃어버린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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