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 리엘라가 마녀라고? (114/154)


  • #114 리엘라가 마녀라고?
    2022.07.31.


    헤르한을 두고 송장처럼 싸늘하다고 킬킬거리던 이들이, 이제는 더 창백한 송장처럼 굳어서 서로 눈치만 주고받았다.

    리엘라가 돌아온 줄만 알았지, 황제까지 온 줄은 몰랐으니까.

    마지막까지 리엘라 앞에서 뻔뻔했던 행크마저도 헤르한의 등장에는 동요하는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해?’

    ‘그러게 끝까지 모르쇠를 했어야지!’

    소리 없이 다급한 눈빛만 오가는 때에 이윽고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품 안에서는 아직 리엘라가 얼굴을 파묻고 서럽게 떠는 중이었다.


    “다들.”

    냉기 돋친 황제의 음성에 전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칼부림이 나려나? 지금이라도 납작 엎드려서 빌어?


    “식사는 천천히 하도록. 우리는 먼저 일어나지.”

    그게 다였다.

    황제는 리엘라를 추슬러서 데리고 나가버렸고, 행크를 비롯한 용병단원들은 조명이 휘황찬란한 만찬장 안에 덩그러니 놓였다.


    “이게…… 다인가?”

    “그냥 지나간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방금 황제 눈깔 돌아버린 거 못 봤냐고?”

    “그러게 행크! 왜 거기서 그런 말을 했어? 그전까지는 그래도 분위기가 괜찮았잖아! 조금만 더 버티면 됐는데!”

    차마 제대로 서지도, 앉지도 못해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이들이 서로 멱살잡이를 시작했다.

    그때, 네 탓이니 내 탓이니 언성을 높이는 이들 사이로 남은 코스 요리를 든 시종들이 들어섰다.


    “뭐……야? 진짜 그냥 넘어간 거 같은데?”

    “정말?”

    “아이고! 십 년 감수했네! 하긴. 리엘라가 저렇게 징징거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말이야?”

    한 명이 자리에 앉은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도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본식이 끝나고 디저트에, 목을 축일 최고급 샴페인 몇 잔까지 마시고서는 언제 그렇게 떨었냐는 듯이 모두가 긴장을 풀었는데.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식사를 끝까지 마치고 만찬장을 나서니 그들 앞을 병사들이 가로막았다.


    “아, 거처로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까 안내는 없어도…….”

    주정이 반쯤 섞인 누군가의 목소리가 ‘철컥’ 하는 쇳소리로 가로막혔다.

    일사불란하게 다가온 병사들이 그들의 손목에 쇠사슬을 걸었다.

    감히 팔을 들지도 못할 만큼 무거운 구속구에 행크는 ‘큭큭’ 취기 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

    다음날 리엘라는 유독 몸이 무거웠다.


    “다녀올게. 리엘라. 오늘은 푹 자.”

    일찌감치 아침 채비를 마친 헤르한이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는 걸 알았으면서도 쉽게 눈이 뜨이지 않았다.


    ‘뭐 대단한 실연을 당한 것도 아닌데.’

    리엘라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동료들과는 더 볼 것도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는 미련이 그렇게도 많았던 걸까?


    “적어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때는, 행크도 내게 좋은 마음 아니었을까요?”

     
    문득 어제 만찬 전 자신이 헤르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울 정도로 어이없는 기대였다.

    행크는 자신을 처음 만났던 그때조차 제 값어치를 계산했고, 그 덕에 어제는 밤새 헤르한의 품에서 펑펑 울다 잠들어야 했다.


    ‘창피해.’

    첫째로는 창피했고, 둘째로는 역시 서글펐다.

    끝내 자신은 그들에게서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걸까.


    “리엘라 님! 아직도 주무세요!? 해가 중천에 떴는데요?”

    때아닌 발랄한 소리를 내며 루가 침실 안으로 들이닥친 건 바로 그때였다.


    “아, 루……. 미안한데 오늘은 그냥 쉬려고…….”

    “쉬시는 건 좋지만 식사는 하셔야죠! 어서 일어나세요! 네? 리엘라 님께 드릴 선물도 있고요!”

    “선물이요?”

    “일어나시면 드릴게요!”

    조용히 쉬겠다고 하는데도 루가 이렇게 부산스럽게 구는 건 잘 없는 일이라.

    게다가 이 와중에 루가 주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꽤 궁금하기도 해서.

    리엘라는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고, 루는 활짝 웃으며 커튼을 젖혔다.

    방 안에 찬란할 정도로 환한 햇살이 드니 우중충하던 마음도 꽤 맑게 개는 듯했다.


    “일어났으니 줘요. 선물.”

    “아직요! 목욕하시고 나면!”

    리엘라는 저를 막무가내로 끌어당기는 루에게 이끌려 움직였다.


    “목욕도 했으니…….”

    “식사도 하셔야죠!”

    이거 아무래도 사기당하는 것 같은데.

    어쨌든 밑져도 본전인 일이라 리엘라는 루가 내온 음식을 고분고분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차려진 음식을 말끔히 비우고서야 리엘라는 자신이 허기진 상태였음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을 한 입도 못 먹었구나.’

    생각하다가 리엘라는 다시 ‘루의 선물’을 떠올렸다.


    “루! 식사까지 다 했으니, 이젠 정말 선…….”

    “푸흡. 선물이요? 네! 드릴게요. 이쪽으로 와보세요!”

    그렇게 루가 이끈 곳은 리엘라의 서재였다.

    그냥 가져다주면 될 걸, 얼마나 대단한 선물이기에 서재까지 이끄나 싶었던 리엘라는 문이 열린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뭐예요?”

    “선물이죠!”

    “아니, 선물인 건 알겠는데!”

    말문이 막혀 쉽사리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많은 상자가 서재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었다.

    크기도, 포장도 제각각인 상자들. 상자에 붙은 카드 몇 개를 열어보니 발신인도 전부 달랐다.


    “리오타 왕국에서 보내온 거예요.”

    “네?”

    “앗. 더 정확히 말하면, 리오타 왕국에서 온 시종들이 가져온 거라고 해야 하나? 리엘라 님이 우리 전부를 고향으로 데려가 주시고 휴가도 주셨잖아요. 다들 절대 빈손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이것저것 들고 왔어요. 직접 사 온 선물도 있고, 고향 집에서 리엘라 님께 보내준 것도 있고. 그리고 실은 저도…….”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던 루는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를 리엘라의 손에 건네주었다.


    “비싼 건 아니지만, 꼭 받아주세요.”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든 것은 손수 만든 것으로 보이는 가죽 리본 끈.


    “저희 엄마가 직접 엮어서 만들어주신 건데요. 그 문양이 행운을 불러온대요. 꼭 리엘라 님께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저를 잘 보살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요.”

    리엘라는 멍하게 리본 끈을 어루만졌다.

    투박하지만 그러므로 그 안에 담긴 진심은 오히려 잘 드러나는 물건이었다.

    서재에 쌓인 선물들 모두가 그랬다.

    그리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지만, 전부 각자가 꺼내 보일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정성들.


    “다들 이런 걸 언제 준비한 거예요?”

    “헤헷. 리엘라 님 몰래 행군 마차에 슬쩍 실어 왔죠.”

    먼 행군길에 혹여 망가지기라도 할세라 두 번 세 번 동여맨 포장들이 애틋했다.

    리엘라는 울컥했다.


    “이렇게 귀한 걸 내가 무슨 수로 받아요.”

    리엘라가 울먹이자, 루는 그런 말은 가당치도 않다며 펄쩍 뛰어올랐다.


    “모두들 그랬어요. 리엘라 님같이 좋은 분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라고. 리엘라 님이 황후가 되실거라서가 아니라요.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대해주셨잖아요.”

    “…….”

    “저도요. 제국으로 오는 길에 리엘라 님을 만난 날이 제 인생에서 제일 기쁘고 감사한 날이었는걸요!”

    “…….”

    “그……, 상자마다 편지도 다 붙어있으니까요, 하나씩 천천히 읽어보시면…….”

    리엘라는 루의 말을 더 듣지 못했다.

    상자마다 붙어있다는 편지도 물론 읽지 못하고 그냥 그 자리에 스르륵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네.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네.

    그렇게 생각하니 지난밤의 아픔들이 기꺼이 용서되었다.

    이러려고 그랬나 보네. 이렇게 크고 깊은 기쁨으로 한 번에 몰아서 오려고.


    “이거 폐하가 시킨 거죠?”

    감사한 마음에 조금 훌쩍이다가 물으니 루가 뜨끔한 듯 주절거렸다.


    “그, 그래도 선물은 원래 저희가 드리려고 했던 거 맞아요. 폐하가 시키셔서 좀 급하게 정리하긴 했지만…….”

    리엘라는 제 무릎에 이마를 묻은 채로 정말 맑게 웃으며 남은 눈물을 털어냈다.


     


    “우리 폐하. 보고 싶다.”

    어쩐지 이제는 못난 동료들의 얼굴을 떠올려도 더 아프지 않았다.

    *

    행크는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감옥에서 눈을 떴다.

    사위가 어두워 혼란스럽고 두려운 그때, 그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던 누군가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감옥에 갇혀본 건 이번이 처음인가?”

    “……!”

    행크는 눈을 부릅떴다.

    그래봤자 사방을 분간할 수 없는 건 여전했지만.


    “리엘라는 감옥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었지. 너희들이 버려둬서. 네놈들의 죄를 혼자 다 뒤집어쓰고.”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고 눈을 수도 없이 깜빡이니 그제야 조금씩 주변이 보였다.

    묶여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분명 어제 갇힐 때만 해도 옆에 동료들이 있었는데.


    “두렵나?”

    그때 짙푸른 안광이 불쑥 행크의 앞으로 다가왔다.

    동료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려고 했었다. 설마 죽이기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잘 벼려진 칼끝처럼 저를 꿰뚫는 눈빛과 마주한 순간 행크는 모든 기대와 의혹이 무색함을 깨달았다.


    “리엘라는 너보다 더 두려웠을 텐데. 혼자였으니까.”

    ‘물론 이제는 너도 혼자지만.’ 하고 따라붙는 낮은 읊조림에 행크는 망연자실했다.


    “그랬는데도 다시 너희들을 불러서 앞에 앉히고, 식사를 내어주고,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주려고 했던 그 마음이 어땠을지 넌 알까?”

    “호, 황제 폐하…….”

    “리엘라가 과연 어떤 마음으로 너희를 다시 받아들였던 건지 아느냐고.”

    행크는 숨을 꼴깍 삼켰다.


    “사, 살려주십시오. 리엘라를……. 리엘라를 불러주시면 내가 정말 진심으로 사죄를……!”

    황제가 픽 웃었다.

    이젠 더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냉담하게 멀어지는 뒷모습에, 행크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다.

    황제가 사라진 자리로 검은 머리의 기사가 검을 들고 다가왔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젠 정말 최후의 카드를 써야 할 때였다.


    “나, 나는 살려주셔야 합니다! 나를 죽이면 곤란할 겁니다! 나는 리엘라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기사가 뻗은 검이 목 아래 들어차는 바람에 행크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매몰차게 멀어지던 황제가 다시 제 쪽으로 몸을 튼 것이었다.


    “리엘라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예, 예……!”

    행크는 이를 악물었다.

    겁도 없이 다시 리엘라를 붙잡고 늘어질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무기’ 덕이었다.


    “사, 사실 리엘라에겐 이상한 힘이 있습니다. 들으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아무래도 마녀가 아닐까 싶은데……!”

    “아. 그래? 리엘라가 마녀라고?”

    황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웃음을 터트리며 되물었다.

    예상한 반응은 아니었다.

    자지러지면서 경악할 줄 알았는데.


    “그렇군. 리엘라가 마녀였군. 그리고 또?”

    “……예?”

    “또 알고 있는, 다른 더 재미있는 사실은 없냐고.”

    “그, 그것이…….”

    환장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까?


    “리엘라의 친부모를 알고 있습니다!”

    정답이었다.

    목 아래에 든 검이 먼저 주춤했고 곧바로 오만하게 웃던 황제의 표정도 동요로 일그러졌다.


    ‘살았다.’

    뜨거운 숨을 토해내는 행크의 목 아래, 칼날이 거두어졌으나 곧장 그 자리로 황제의 손아귀가 들어왔다.


    “어억!”

    다부진 손에 멱살이 잡힌 행크는 컥컥거리며 괴로워했다.

    아.

    정답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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