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 미움이 쌓인 시간만큼 (112/154)


#112 미움이 쌓인 시간만큼
2022.07.24.


다음 날 아침, 다시 행군을 떠나기 전 리엘라는 루에게서 놀랄만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밤중에 동쪽 천막 터에 도적 떼가 습격했었대요!”

“정말이에요?”

물자를 많이 실은 장거리 행군에 도둑이 습격하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이것은 황제의 행군.

그걸 알고도 감히 덤빌 간 큰 도둑은 없거니와, 동쪽 천막이라면 기사들의 야영지라 경비도 특히 삼엄했을 텐데.


“그래서 도적 떼는? 잡혔대요?”

“아뇨.”

“못 잡았다고요?”

이번 행군엔 아시온을 비롯한 1 기사단과 황후 근위대까지 동행했다.

그들이 한낱 도둑 몇 명을 놓칠 리는 없는데?


“혹시 누가 다친 건 아니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히 본대에는 따로 도둑맞은 물건도 없고 다친 사람도 없대요.”

“본대가 괜찮았다는 얘기는…….”

그러자 루가 리엘라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리엘라는 그제야 루가 전하려는 소식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아-’ 작게 탄식했다.


“리엘라 님의 옛 동료라던 그분들이 피해를 당했다더라고요. 짐도 싹 털리고, 몸싸움도 좀 있었던 모양인데 다들 취해서 잘 기억을 못 하신다고…….”

“…….”

“지금 폐하께서 직접 살피고 계신 것으로 알아요! 그래도 걱정되시면 한번 가보실래요?”

기사들, 시종들, 제 백성 걱정에 벌떡 일어났던 리엘라는 다시 자리에 스르륵 앉았다.

멍하니 거울을 보며 조금 고민하다가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꼴좋다고 생각하면 나쁘다고 벌 받으려나.’

모르겠다.

이젠 ‘동료’라는 말도 아까운 그들에게 나쁜 사람으로 남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고.

리엘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



“그래. 안타깝게 됐군.”

“그게 다…… 입니까?”

“그럼 내가 해야 할 다른 말이라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황제와 근위대장. 또 보좌관과 기사들이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서 있었다.

그들 앞에 엎드린 것은 행크 용병단 일원들이었다.

일부러 엎드리려 한 것은 아니었다.

몇몇은 다리를 다쳐서, 또 몇몇은 허리가 나가고 머리가 깨져서.

전원이 제대로 설 수 없는 지경이었다.


“책임은 져 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그중, 행크가 언성을 높이며 황제에게 대들었다.

물론 일시에 그친 발악이었다.

황제와 눈이 마주칠 것까지도 없었다. 제 위로 길게 늘어진 기사들의 싸늘한 인영에 행크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씩씩거렸다.

어젯밤, 난데없이 복면을 쓴 괴한들이 들이닥쳐서 이유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두들겨 맞았다.

취해서 저항 한번 제대로 못 하고 얻어터진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직접 상황을 살피러 왔다는 황제는, 뭘 해결해주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신나게 저희 꼴을 구경만 하는 것이다.


“책임? 내가 왜?”

“아니, 그게, 어쨌든 폐하의 산하 편대에 있다가 당한 사고니…….”

“난 네 놈을 내 산하에 둔 적이 없는데.”

“아, 아무리 그래도……. 그래도 이런 대접은 좀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이래 봬도 우리가 리엘라의 친정이나 마찬가지인데! 이제 황후가 될 사람의 가족인…….”

“경고하는데, 그 이름.”

그때 헤르한이 친히 한쪽 무릎을 접고 몸을 숙여서 행크의 턱을 쥐었다.


“……함부로 입에 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헤르한은 제 위압에 질려 입을 벌린 채로 벌벌 떠는 행크를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

행크의 기억 단편이 헤르한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리엘라!”

 
종을 부리듯 윽박지르는 목소리.

그 사나운 음성과 매정한 눈초리가 향한 건, 키가 행크의 가슴께도 오지 않는 아주 작은 몸의 리엘라였다.

리엘라는 죄라도 지은 양 움츠리며 안쓰럽게 떨었다.


“밥값이나 하라고 식사 준비를 시켰더니 이딴 짓을 해놨어?”


“저, 저는……. 엄청 열심히 끓였는데, 스튜…….”


“누가 이렇게 비싼 재료를 겁도 없이 턱턱 넣으라고 했냔 말이야!? 돈은 다 네가 댈 거냐, 어?”

 
나이를 갓 열 살은 넘겼을까.

한창 밥투정이나 할 나이에 리엘라는 여기저기 데이고 부르튼 손으로 국자를 쥐고 있었다.

계속 불가를 지키느라 빨개진 볼로 땀을 흘리고 있는 건 덤이었다.

그런 저를 쥐 잡듯 으르렁대는 어른들의 등쌀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한참 떨다가 울먹이면서 한다는 소리라고는 고작.


“해, 행크 아저씨, 감자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얻어 와서 넣은 건데…….”

 


“…….”

헤르한은 그쯤에서 다시 제 시야를 찾았다.

더 보면 정말 이 자리에서 이 자들을 죄다 죽여 버릴 것 같았으니까.


“으, 으……. 으우…….”

헤르한은 행크의 턱을 쥔 손을 확 내친 후 이를 꽉 깨물고 일어섰다.


“아시온. 놈들이 제국까지 따라붙을 수 있게 말만 내어줘. 그 외엔 식사도 옷도 내어주지 말고. 부러진 팔다리가 썩든 말든 치료도 해 주지 마라.”

 

*

그날 저녁, 국경에 가까운 역참에 거점을 잡고 식사를 하는데 헤르한은 좀처럼 먹지 않았다.

리엘라는 그런 그를 무시하려고 참다 참다 도저히 못 참고 입을 열었다.


“폐하.”

“응. 리엘라.”

“왜 그러세요?”

“내가 뭘?”

리엘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까부터, 아예 턱까지 괴고 저만 빤히 쳐다보고 계시잖아요.”

이상하게 오늘따라 계속 말없이 쳐다본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식사 자리에서는 더했다.

가뜩이나 평소보다 과하게 차려진 식탁.

헤르한은 계속 이것도 먹고 저것도 먹으라면서 제 앞에 음식 접시를 끌어다 놓는데 정작 자신은 숟가락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왜? 보면 안 돼?”

“제대로 못 먹겠단 말이에요.”

헤르한은 그 말을 또 저 좋을 대로만 해석했는지 눈을 번뜩였다.


“입에 안 맞나? 다른 요리를 내오라고 할까?”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제대로 못 먹겠다고요.”

“아.”

헤르한은 다시 턱을 괴고 리엘라를 보았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네가 견뎌야지, 하는 가벼운 표정이었다.


“정말 왜 그러시는 거예요?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리엘라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었는데, 그래도 헤르한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냥 네가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제가 잘 먹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그러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 게 이렇게 기특하고 예쁘네.”

도저히 알 수 없는 소리에 리엘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혹시 새로운 놀림인가. 헤르한은 보기보다 장난기가 많아서 한번 꼬투리를 잡으면 질릴 때까지 놀리곤 하니까.

그때, 헤르한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풀고 포크를 쥐었다.

드디어 본인도 식사를 좀 하려는 건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 포크는 헤르한의 것이 아니라 리엘라가 방금 내려놓은 것이었다.


“제 포크로 뭐 하시는 거예요?”

“직접 먹여주려고.”

“…….”

“뭘 집어줄까? 말만 해. 토마토?”

“폐하. 장난치지 마세요! 혹시 저 요새 살쪘어요? 그래서 놀리시는 거죠?”

“아닌데. 전혀.”

 

 
헤르한은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다 해 주고 싶어서 그래.”

리엘라는 눈에 힘을 주었다.

저 얼굴을 보면 정말 놀리는 건 아닌 거 같긴 한데…….


“앞으로 뭐든지, 내가 다 해 줄게. 그러니 리엘라 너는 아무런 애도 쓰지 말고 그냥 말만 해. 얼마든지 날 부려먹어도 좋으니까.”

아무래도 이상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게 마냥 듣기 싫은 소리는 아니라서, 리엘라는 어이없이 헤르한을 쳐다보다가 이내 머쓱한 웃음을 지어버렸다.

*

행군은 부지런히 이동해 제국에 도착했다.

황실에 도착하자마자 헤르한과 리엘라를 제일 먼저 빼돌린 이는 제스였다.


“……이제 거의. ……다 됐습니다.”

제스는 헤르한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정무를 대행할 목적으로 황실에 남아있었다.


“뭐. 어차피 이젠 폐하 옆에 든든한 여신께서 계시니 저 같은 건 필요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럼 넌 황실이나 지켜.”


“아, 아니. 폐하!”

 
주치의로서 제 입지를 잃은 제스가 조금 투정을 부린 것을 헤르한이 상큼하게 무시하면서 벌어진 촌극이었다.

당시는 제스도 단단히 골이 나서 미련 없이 돌아섰지만, 막상 혼자 남겨진 뒤엔 내내 둘을 걱정했다.

긴급연락망을 통해 계속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그는 리엘라와 헤르한의 건강 상태부터 체크했다. 물론 두 사람의 상태는, 걱정했던 마음이 허무할 정도로 최상이었다.


“아주, 두 분이 꼭 잘 붙어 다니셨나 봅니다?”

제스의 툴툴거림에 리엘라가 얼굴을 붉히건 말건 헤르한은 당당하게 응수했다.


“부부가 붙어 다니는 게 뭐?”

“아직 결혼식도 안 했는데 무슨 부부입니까!? 참나! 알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갈 길 가보시죠.”

제스가 휙 돌아섰다.

‘정화자가 있으니 이제 나는 필요도 없다 이거지, 어? 평생을 헌신한 나를 이렇게 무시하나?’ 하고 다 들으라는 듯이 투덜거리는데, 헤르한은 그걸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오히려 제스의 곁에 다가온 건 리엘라였다.


“다 제스 경 덕분인 거 알아요. 고마워요.”

“예?”

제스는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덮다 말고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스 경이 여태 폐하를 지켜준 덕에 이렇게 폐하가 살아서 저랑도 만난 거잖아요. 이번에도, 제스 경이 없었으면 우린 마음 편히 왕국에 다녀오지 못했을 거예요.”

“…….”

“늘 고생하는 거 알아요. 고마워요.”

제스의 책상 위가 너저분했다.

헤르한이 없는 동안 일을 대신 처리하느라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그건 아마 헤르한도 뻔히 알 것이었다.

서로 티도 안 내고 늘 툴툴거리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위하고 있을 사람들이니까.


“윽. 뭡니까?”

“뭐가요?”

“제 얼굴 오랜만에 봐서 좀 헷갈리십니까? 우리 이런 말 하는 사이 아니잖아요.”

“어, 그랬던가요.”

리엘라가 웃자, 연구실 문에 몸을 기댄 헤르한도 피식 웃었다.

오로지 제스만 민망해서 괜히 책상 위의 서류를 들추고 말을 돌리려는데.


“그래도 부러운 건 사실이에요.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나지막한 말에 연구실 안의 분위기가 숙연히 가라앉았다.

피식 웃던 헤르한도, 멋쩍어서 고개를 돌리던 제스도 조심스레 리엘라를 살폈다.

리엘라의 얼굴은 쓴 미소로 물들고 있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자식들이 따라 굴러왔다는 걸 잊고 있었네.’

리엘라가 몸담았던 용병단 일원들 소식은 제스도 알고 있었다.

덕분에 마음이 참 안 좋았지만, 그는 리엘라와는 달라서 사근사근한 위로나 응원 같은 건 못 하는 체질이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힘이 되어줄 줄은 알았다.


“이거 받으십시오. 리엘라 님.”

제스는 복잡하게 서류가 쌓여있던 책상 어딘가를 헤집어서 꺼낸 문서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버러지들을 조질 방법입니다.”

“네?”

“그동안 제국 법전을 샅샅이 뒤져서 놈들에게 걸 수 있을 만한 조항이란 조항은 다 골라냈습니다. 지금으로서 제일 큰 건 왕녀와 공모해서 폐하 암살 시도했던 것. 당장 붙잡고 수사를 해보면 몇 개 혐의도 더 찾을 수 있을 것 같고요.”

언뜻 봐도 엄청난 두께의 문서였다.

낱장을 하나하나 넘겨 가며 훑어보는 리엘라의 눈이 떨렸다.


“그런 면에서 놈들을 황실로 데려온 건 잘하신 겁니다. 제대로 수사도 할 수 있고, 놈들이 우리 제국령으로 들어온 덕택에 제국법으로 다스릴 수도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렇군요…….”

마침내 내용을 다 훑은 리엘라가 서류를 덮었다.

제스는 이걸로 리엘라의 낯간지러운 칭찬에 대해 보답은 했다고 생각하며 뿌듯했다.

그런데.


“고마워요. 생각해볼게요.”

바로 이대로 시행하겠다는 게 아니라 생각을 해보겠다고?

설마 마음이 약해진 건가?

그 버러지들도 제 동료라고?

도대체 저 여자는!


“아니, 리엘라 님. 생각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설마 옛정에 매이는 거라면……!”

답답한 마음에 일장 연설을 시작하려는 제스의 어깨를 헤르한이 잡았다.

퉁명스러운 농담만 주고받아도 마음이 통했듯, 이번에도 눈빛만으로 주군의 뜻은 제스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평소라면 온갖 일침을 날렸을 제스가 그쯤에서 물러 나준 건 그 덕택이었다.


“오늘은 쉬자. 리엘라.”

제스의 연구실에서 나온 뒤, 헤르한은 일부러 리엘라에게서 그 골치 아픈 서류 뭉치를 빼앗았다.


“우리가 성을 비운 동안 내실 인테리어를 바꿔두라고 했어.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

내실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하면서는 일부러 말도 돌려봤지만, 애써 웃으며 헤르한을 따르던 리엘라는 결국 그냥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폐하.”

“그래. 리엘라.”

그냥 짧은 부름인데도 그 안에 담긴 깊은 고민이 오롯이 느껴져서 헤르한은 속상했다.

일부러 머리를 어루만져 주어도.

놈들의 다리를 부러뜨려주고, 맛있는 음식을 직접 떠 먹여 주고, 새 커튼이나 새 이불 얘기 따위로 관심을 돌리려고 해도, 안 되는 부분.

결국은 리엘라의 몫인 부분이었다.


“아직도 동료들에게 미련이 남으면, 제가 이상한 거겠죠.”

어깨가 축 늘어진 리엘라는, 어른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겠다고 손이 다 부르텄던 그 날의 어린아이 같았다.


“아니. 이상하지 않아.”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긴 하지만.

그깟 놈들도 제 동료고 가족이랍시고 열심히 사랑했던 네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 테니까.


“어쨌든 제가 초대한 거니까 식사 한 끼는 대접하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미움이 쌓인 시간만큼 완전히 잊어내는 데에도 똑같은 시간이 걸린다.

헤르한은, 제가 할 일은 결국 그 시간을 기다려주는 것임을 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