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 여기. 네 앞. 나. (111/154)


#111 여기. 네 앞. 나.
2022.07.21.


리엘라의 본능이 먼저 그들을 알아보았다.

당신들이 왜, 어째서 여기에, 하는 생각들 같은 건 한발 늦게 들었다.


“리엘라. 정말 예뻐졌구나.”

“이야. 정말! 아주 번쩍번쩍해서 못 알아보겠는걸? 리엘라!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그동안 잘 지냈지?”

반갑게 외치는 목소리. 호탕한 웃음.

그것들에 리엘라의 발밑이 지하로 꺼지는 것만 같았다.

동료들과 마주한 그 단 한순간 만에 리엘라는 자신이 다시 궁핍했던 나날의 가련한 소녀로 돌아가 버렸음을 느꼈다.


“행크…….”

몸이 뻣뻣해졌다.

싸늘하게 외면당했던 그날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 가운데, 동료들 뒤로 처음 보는 얼굴의 사내도 보였다.


“당신은 누구시죠?”

“아, 아니. 행크 이놈이 허풍을 떠는 줄……. 저는 여기가 감히 어느 안전인 줄은 정말로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입니다!”

뻔뻔한 동료들에 비해 남자는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아시온을 통해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행크 용병단이 진 빚을 받겠다고 따라온 민가의 노름꾼이라고 했다.


“빚이요?”

“예. 자기 딸이 누군지 아느냐면서, 그깟 빚, 전부 한 번에 갚을 테니 얌전히 따라오라고…….”

‘내가 자기 딸이라고?’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제 몸에는 피보다 진한 동료애가 흐른다고 믿었던 시기도 분명 있긴 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죽을 자리에 제 발로 나타난 용기도 가상한데, 꼬리까지 달고 왔다니.”

리엘라가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헤르한의 턱에서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까딱 틀며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아시온.”

싸늘한 부름, 그 단 한마디에 담긴 명령을 알아들은 아시온이 곧장 행크 일행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행크는 병사들에게 끌려 나가는 게 뭐가 그리 억울한지 마구 몸부림을 쳤다.


“어, 어……. 이봐! 이거 놔. 우린 아직 리엘라랑 할 말이 많단……! 리……, 리엘라! 리엘라!”

헤르한의 몸이 불쑥 리엘라의 앞을 가리며 나왔다.

저 너저분한 모습으로 리엘라의 시야를 더럽히는 일은 없을 거라는 듯이.


“바로 베어버려. 아니면 그냥 파묻어 버려도 되고. 아. 산채로 말에 매달아서 제국까지 끌고 가는 편이 나으려나.”

자신을 지키는 넓은 어깨와 등.

그 든든한 모습 뒤에서 살포시 눈을 감았다가 뜨니 리엘라는 다시 자신이 선 곳이 제대로 보였다.

저는 더 이상 언제나 발을 동동거리던 예전의 그 소녀가 아니었다.

이 강인한 남자의 하나뿐인 연인이고, 또 소중한 이들의 굳은 선망과 신뢰를 받는 ‘황후’이지 않나.


“폐하. 저는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그래도 일단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세요.”

리엘라는 차마 분노와 걱정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저를 응시하는 헤르한의 손을 꼭 잡았다.


“제가 풀어야 할 일이잖아요.”

저들을 붙잡고 울고불고 싸우는 것이든, 아예 끝을 맺는 것이든.


“제가 할 수 있어요.”

리엘라의 결연한 부탁에 딱딱하게 일그러져 있던 헤르한의 미간이 풀렸다.

헤르한은 얕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온 대장. 잠시만요. 그들을 놔 줘요.”

그렇게 리엘라가 먼저 눈길을 준 것은 동료들 틈에 껴 있던 빚쟁이 사내였다.

리엘라는 그에게 자기 귀걸이 한쪽을 풀어서 건넸다.


“이거면 되겠어요?”

“예?”

“당신이 받아야 할 빚 말이에요.”

“아, 예! 예, 이거면 충분히……!”

리엘라는 병사들에게 그 사내를 풀어주라고 명했다.

두 손으로 깍듯이 귀걸이를 받아든 사내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다가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이쪽.

행크는 빚쟁이 사내가 돌아가는 것을 보며 참 만족스럽게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모두 오랜만이네요.”

“그래! 리엘라!”

리엘라가 아는 체를 해주자 나머지 동료들이 이제 살았다는 듯이 안도했다.

리엘라는 행크에게 나머지 귀걸이 한쪽을 내밀었다.


“자. 받아요.”

“이게 뭐냐, 리엘라?”

행크가 귀걸이 한쪽을 스윽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에이. 오해 마라. 우리는 이런 걸 원해서 온 게 아니야.”

말투는 짐짓 점잖았다. 하지만 비죽거리는 입가가 행크의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거나 먹고 떨어질 생각은 전혀 없다는 진짜 뜻을.


“그럼 뭐가 더 필요하죠? 원하는 걸 빨리 말해요. 우리 행군이 지체되고 있잖아요.”

어쭈. 제법인데. ‘우리 행군’이라고?

행크는 주름진 입술을 샐쭉 내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리엘라. 우린 가족이잖냐. 응당 다시 만나야 할 인연이니 만난 것뿐이란다. 오랜만인데 급하게 굴지 말자고. 그동안 못 나눈 얘기도 천천히 나누고 말이야. 그래. 그동안 잘 지냈고? 대단한 소식이야 기사로 읽었다만.”

“…….”

“그래도 명색이 내가 널 키워준 사람인데.”

“…….”

“네 새집에 초대 정도는 해주겠지?”

행크는 필요 없다던 귀걸이 한쪽을 제 주머니 안에 야무지게 챙겨 넣으면서 눈알을 굴렸다.


‘어쩜 이렇게 변한 게 하나도 없을까.’

리엘라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는 곧 수긍했다.

행크의 말이 맞았다. 이건, 이 길바닥 위에서 서로에게 몇 마디 독설을 퍼붓는다고 끝날 인연은 아니었다.


“좋아요. 황궁으로 초대할게요.”

침묵 끝에 떨어진 말에 반신반의하던 동료들이 승리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아시온이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리엘라는 그에게 담담하게 명령했다.


“아시온 대장님. 제 동료들을 이번 행렬에 포함해서 편대를 재정비 해주실래요? 말은 있는 모양이니 알아서 따라올 수 있을 거예요.”

아시온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리엘라를 한번, 그리고 리엘라의 어깨너머로 헤르한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헤르한은 끝까지 딱딱한 표정을 풀지 못했다.

*

그날 저녁, 헤르한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행군을 멈추고 거점을 잡았다.

예정에도 없이 계획을 수정한 이유는 리엘라를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리엘라.”

지금껏 거점에 머물러 쉴 때면 리엘라는 활기차게 바깥을 돌아다니면서 기사와 수행원들을 직접 챙기곤 했다.

그런데 오늘 리엘라는 헤르한의 부름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상념에 젖어, 창가에 묵묵히 앉아있었다.


 


‘생각해보니 너는 처음에 줄곧 그런 모습이었지.’

헤르한은 속이 먹먹했다.

지쳐 있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처음 만났을 때 텅 빈 껍데기 같았던 리엘라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해서.


‘말수도 없이, 늘 그렇게 먹먹한 눈으로 먼 곳만 보고 있었어.’

사실 리엘라는 재잘대기를 좋아하는 아주 귀여운 사람이라는 것.

부끄러움이 많은 만큼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

헤르한은 이 여인에게 수없이 굴복하고 나서야 겨우 그 진짜 모습을 보았다.


“아……. 폐하. 오셨어요?”

그런데 그 빌어먹을 놈들이 리엘라를 다시 아프게 하다니. 저렇게 힘없는 목소리로 자길 부르게 만들다니.

가장 치가 떨리는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놈들이 한때 저를 암살하려고 했던 놈들이어서도 아니고, 그레타의 수에 놀아난 멍청이들이라서도 아니고.

리엘라를 다시 ‘아픈 날들’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자들이라서.


“정말 못 참겠네. 화가 나서.”

“네?”

“쓰레기 같은 놈들이야.”

다짜고짜 뱉는 욕에 리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너는 그런 쓰레기들한테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귀한 것을 내주다니.”

그제야 리엘라는 상념을 깨치고 말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헤르한은 허리를 숙여 리엘라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하얗고 동그란 귓불을 아깝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리엘라가 헤르한의 말뜻을 알겠다는 듯이 ‘풋’ 하고 웃었다.


“황실 재산을 제가 너무 허투루 까먹었죠? 비싼 건데.”

낮에 행크와 빚쟁이에게 내주었던 귀걸이 이야기였다.


“값이 중요한 게 아니야.”

헤르한은 심통이 가득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게 속한 것이고 네게 닿은 것이니 귀한 거지.”

“…….”

“이 담요 한 장, 이 찻잔 하나도 마찬가지야. 네 흔적이 남았으니 전부 보물이라고.”

리엘라의 눈동자가 깊은 감정을 머금고 일렁거렸다.

무언가를 삭히듯 꾹 물고 있던 입술은 이내 애틋하게 열렸다.


“폐하는 그렇게 여겨주는구나.”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닌 사람도 있어요. 아닌 사람이 더 많죠. 행크는 내가 처음 줬던 선물을 바로 모닥불에 던져 버렸어요. 여덟 살 때였나. 바느질을 배워서 처음 만든 손수건이었는데.”

헤르한은 눈을 크게 부릅뜨는데 리엘라는 아프게 웃기만 했다.


“처음 만든 거니 엉성하긴 했죠. 천도 싸구려였고. 웬 돈도 안 되는 걸레짝을 만들었냐고 혼났던 기억이 나요.”

헤르한은 이를 악물었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뻗치는데, 그렇다고 그자들에 관한 어떤 말을 입에 담기는 더 싫었다.

어떤 식으로든, 리엘라가 그 괘씸한 자들에 관해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싫어서.


“리엘라. 지금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네 앞만 봐.”

“제 앞이요?”

“그래. 여기. 네 앞. 나.”

헤르한은 리엘라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네가 보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지금 너만 보고 있잖아.”

흔들리던 붉은 눈동자가 지그시 헤르한을 향했다.

말없이 오가는 눈빛 속에 안정을 되찾은 눈은 기어이 다시 맑은 빛으로 반짝였다.


“정말 그러네요. 엄청 예쁜 사람이 나만 보고 있네.”

드디어 리엘라가 웃었다.

애써 짓는 것이 아닌, 참 편안한 미소로.


“행복해하기만도 아까운 시간에 내가 울상을 짓고 있었나 봐요. 바보같이. 그렇죠?”

헤르한은 대답 대신 입을 맞추었다.

노을빛을 그대로 담고 일렁이던 붉은 눈은 곧 예쁘게 감기며 헤르한의 숨결을 받아들였다.

헤르한은 리엘라를 안아 침대에 눕히면서 저 역시 리엘라의 몸 위로 쓰러졌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 그 예쁜 몸을 구석구석 탐하는 입맞춤이 부드러웠다.

막 씻고 나와 아직 향유도 바르지 않은 몸, 그 순수한 체향이 헤르한은 더 달게 느껴졌다.


“폐하…….”

리엘라가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어딘가에 파묻혀 있던 헤르한의 입술이 곧장 올라와 말을 덮어버렸다.

그러면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호흡을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영락없이, 헤르한의 농간에 넘어가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오늘 밤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리엘라.’

헤르한은 점점 더 빠르고 강하게 리엘라의 정신을 앗았다.

완벽히 그의 의도대로였다.

자신의 사랑을 느끼는 것 외엔 그 어떤 상념에도 젖지 않도록.

그 어떤 아픈 기억도 리엘라를 더 붙잡지 못하도록.

*

노을빛이 들던 방 안은 어느새 더운 습기와 따뜻한 달빛만 은은했다.

기절하다시피 푹 잠든 리엘라의 고운 숨결을 따라 작은 어깨가 오르내렸다.

리엘라의 고민을 대신 짊어진 헤르한은 천사같이 고요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놈들은?”

“아. 정말. 도저히 눈 뜨고 못 봐주겠습니다. 리엘라 님의 명령이니 꾹 참고는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주군의 호출을 기다렸던 아시온은 재빠르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감시병을 붙여놔서 낮엔 얌전히 잘 따라오나 했더니. 거점에 짐을 풀자마자 술판을 벌이고 난리입니다. 자기들끼리만 그러면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시종들을 죄다 모아놓고는 지가 블리니테 황후를 다 키웠다는 둥, 부모나 마찬가지라는 둥, 진짜 같잖아서!”

아시온은 한참 험한 욕을 뱉고서야 주군 앞임을 알고 정신을 차렸다.


“폐하. 정말 저놈들을 꼭 황실까지 데려가야 하는 겁니까? 그냥 슬쩍 묻어버리고, 리엘라 님에겐 놈들이 도망쳤다고 대충 둘러대도 될 것 같은데?”

“안 돼.”

“예…….”

단호한 대답에 아시온은 시무룩했다.

사실 성질이 나서 막 뱉었지만 주군의 뜻은 아시온도 잘 알았다.

그들을 정리하는 것은 온전히 리엘라의 몫으로 남겨주려는, 그 깊은 뜻을.


“8살의 리엘라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이나 가나?”

“예?”

“분명 천사 같았겠지.”

그때 헤르한이 꺼낸 말은 아시온의 귀엔 좀 엉뚱했다.


“그 작고 예쁜 게 눈도 깜빡이고 말도 했겠지. 세상에 그보다 더 경이로운 게 있을까.”

“폐하, 무슨 말씀을…….”

“그런데 그런 아이를 저놈들은 숱하게 울리고 상처 입혔어. 저 더러운 놈들의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서 내가 모르는 리엘라의 모습을 빠짐없이 보기 전까지는, 안 돼. 파묻어도 안 되고, 죽이는 건 더 안 된다.”

‘뭐야, 그런 이유였어?’

상상도 못한, 하지만 과연 헤르한다운 논리에 아시온이 혀를 내두르는데.


“하지만 팔다리 하나쯤은 없어도 기억을 엿보는 데에 문제는 없겠지. 리엘라랑 저들 사이에 남은 정산을 해칠 것 같지도 않고.”

“예?”

“말이 그렇다고.”

아시온이 놀라서 바라보니 헤르한의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리엘라가 놈들을 가만히 두랬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 간밤에 도적이 들어서 놈들 팔다리를 한쪽씩 잘라갔다면 모를까.”

“…….”

“안 그래, 아시온?”

아시온의 눈이 번뜩였다.

평소라면 눈치가 없어 못 알아들었을 말도, 이번만은 같은 마음이라서인지 뜻이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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