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 브레니케 공작 (109/154)


#109 브레니케 공작
2022.07.14.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한발 뒷걸음질 치려다가 주먹을 꼭 쥐고 버텼다.

더는 도망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이제 죄인도 아니고, 든든한 내 편도 있고.

무엇보다 이제는 저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으니까.


“블리니테 님께서 왕궁에서 머무시던 당시, 이 아이들이 많은 무례를 저질렀다 들었습니다. 그러니 뜻대로 처분하시길 바랍니다.”

시녀장이 말했다.

그녀의 엄한 목소리에 일렬로 늘어선 시녀들이 다 함께 떨었다.

네가 더 앞으로 가라며 서로의 등을 떠미는 그녀들은 전부 죽상으로 리엘라 앞에서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레타가 도주한 이후로 왕궁의 일꾼들도 대부분 도망쳤다 들었는데.”

“그, 그게……. 저희도 도망을 쳤다가 돌아왔습니다.”

“어째서요?”

“블리니테 님이 곧 왕궁으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들어서……. 용서를 빌고 싶어서…….”

감동이라도 받아야 하는 건가.

리엘라는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를 ‘블리니테 님’이라고 공손히 부르며 눈도 못 마주치는 저 시녀는, 그레타의 바로 뒤에서 자신을 하찮게 훑어보던 바로 그 시녀였는데.


“정말로 내게 용서를 빌러 온 건가요?”

“……!”

“왕녀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도망쳐버린 마당에 본인들한테도 불똥이 튈까 봐 무서워서 온 건 아니고요? 내게 사면을 받으려고?”

“그, 그런 것은……!”

몇몇이 움찔거리며 튀어 올랐고 또 몇몇은 이를 물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제야 찬찬히 뜯어보니 하나같이 망가진 몰골들이었다.

왕녀를 찾는답시고, 또 왕녀의 숨은 죄를 명백히 밝힌답시고 문초를 받았을 그녀들이었다.

리엘라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의 손발이 부르터 있었고 눈가가 퀭했다.

인과응보란 참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블리니테 님.”

시녀 중 한 명이 무너지듯 주저앉아서 참담하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나머지도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그 무력한 모습에 리엘라는 왠지 허탈한 마음마저 들었다.


“내가 아직 족쇄를 찬 죄인이었어도, 여러분들이 제게 사과를 했을까요?”

힘이 깃들지 않아서 더 따끔한 일침에 시녀들의 울음 섞인 사죄가 드세졌다.

그들이 뱉어내는 울음에는 온갖 회한이 다 녹아 있었다.

단지 한때 리엘라를 겉으로만 판단하고 하대했던 그 순간뿐만 아니라, 그레타의 그림자에 숨어서, 또 그레타가 만들어준 허영에 취해서 살았던 날들에 대한 후회 전부.


“잘못했어요. 옳지 못하다는 건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 줄 알았습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리엘라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저들의 눈물이 과연 자신에 대한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왕녀가 받아야 할 벌을 지금 이 순간 저들이 나누어서 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왕녀님. 그래도 이 시녀들이 당신보다는 낫네요.’

이들은 적어도 제 발로 돌아왔고, 먼저 무릎을 꿇었고, 용서를 빌고 있으니까.


“여러분들은 가장 큰 잘못은 잘못된 주인을 섬겼다는 거로군요. 참 가엾게도……. 결국은 여러분 또한 누군가의 백성이었을 뿐인데 말이에요.”

허망한 마음이 녹은 그 말에 어째선지 시녀들보다도 그녀들 뒤에 서 있는 시녀장이 더 뜨끔하며 몸을 떨었다.


“용서는 천천히 하겠어요.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진 않을게요. 주인을 잘못 만났다 하더라도 결국 처신을 하는 것은 본인의 몫이니까.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본인 몫의 죗값을 치르세요. 그리고 다음 기회가 또 온다면, 그때는 좀 더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길 바라요.”

리엘라는 그렇게 말하고 시녀들에게서 돌아섰다.


“블리니테 님. 이대로 가시는 겁니까?”

“네.”

리엘라는 어쩐지 자신에게 할 말이 남아 보이는 시녀장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아니면 제가 저분들에게 채찍질이라도 해야 하나요?”

꼭 따지기라도 하는 듯한 말투에 시녀장이 반발심 어린 눈으로 리엘라를 응시했다.


“죄를 지은 것은 제가 아닙니다. 바로 저 아이들이지요.”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어찌 자신에게 화를 내냐는 듯한 눈빛.

리엘라는 그게 더 괘씸했다.


“윗사람이라면 아랫사람을 보듬을 줄 알아야죠.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미리 따끔하게 가르치고, 그럼에도 실수했다면 먼저 나서서 책임져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그러지는 못할망정, 제게 먹잇감 내어주듯이 던져 주시고는 팔짱만 끼고 있다니요. 정말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나요?”

‘당신이 제일 나빠.’

리엘라는 그런 눈빛으로 시녀장을 흘겨보다가 떠났다.

리엘라가 등을 돌린 자리에 우두커니 남겨진 시녀장은 한참 뒤에 홀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

다음날, 잠에서 깬 헤르한은 눈을 뜨자마자 제 옆에 누운 리엘라를 확인하곤 안도하며 리엘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네가 없어진 줄 알았어.”

“네?”

“잠깐 깼는데……. 네가 없었어. 그래서 놀랐는데…….”

처음엔 웬 엉뚱한 말을 하는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어제저녁의 얘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저녁에 잠시 나갔다 왔어요. 그때 잠깐 깨셨나 봐요.”

“응. 그랬나. 아닌가.”

풉.

폐하도 잠꼬대를 다 하네.

리엘라는 눈을 감고서 느리게 말하는 헤르한을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어딜 다녀왔어?”

“그냥, 루도 집에 보내주고. 또 옛날에 알았던 사람들 만나서 싸움도 좀 하고.”

“싸웠다고?”

헤르한이 한쪽 눈꺼풀만 윙크하듯 들어 물었다.


“네.”

과연 그걸 ‘싸움’이라고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겼어?”

“음.”

리엘라는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아마도요?”

“……잘했네.”

헤르한은 잠결에 빙긋 웃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그의 품에 파고들면서 리엘라는 그 일을 다시 생각했다.

그레타의 시녀들에게 스스로 죗값을 치르라 했고, 천천히 용서하겠다고 했다.

일부러 리엘라의 침실 창에서 내다보이는 곳까지 따라와서 무릎을 꿇은 그 시녀들은 밤새 그 상태로 있었다.

밤새 빌다가, 잠깐 쓰러져 졸다가, 곧바로 화들짝 일어나 다시 꿇어앉고.

리엘라는 날이 완전히 밝은 것을 확인한 후에 근처의 기사를 시켜 그 시녀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그때 비로소 마음 한구석이 후련했으니.

이 정도면 ‘이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시녀장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때였다.


“폐하. 아직 주무십니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헤르한은 아직 잠결이었고, 리엘라가 대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나가서 아시온을 맞았다.


“무슨 일인가요? 오늘은 일정이 없잖아요?”

“급하게 생겼습니다.”

황실도 아닌데, 리오타 왕궁에서 황제에게 급하게 생길 일이 뭐지?


“브레니케 공작이 왔습니다. 폐하께 공식적으로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



“공작이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은 몰랐어요. 폐하의 소환 명령도 무시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리엘라는 급하게 채비를 하는 황제의 곁에서 말했다.

사실은 약간 투덜거리고픈 마음도 있었다.

얼마 전 직접 제국까지 와서 황제를 만나고 간 적도 있다던 브레니케 공작은, 정작 헤르한의 섭정 명령에는 심드렁했다고 한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헤르한이 왕궁에 도착할 시일을 미리 알리고 소환을 명령했지만, 브레니케 공작은 그것을 무시하고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공작이 뜻을 돌렸다면 고마울 일이지.”

“그래도 서운하잖아요.”

“서운하다니, 뭐가?”

“폐하는 좋은 분인데, 그걸 몰라주고 간을 보는 것만 같아서.”

그 말에 헤르한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새 주인을 고르는 일이야. 하물며 브레니케 공작은 왕국 사람이고, 난 제국의 섭정으로 그를 내세우려는 것이니 그로서는 당연히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지.”

“……그래요?”

“오히려 내 예상보다 결단이 빨라서 이상할 지경인걸. 몇 주는 더 걸릴 줄 알았는데.”

헤르한은 고개를 갸웃함과 동시에 어깨 으쓱거렸다.


‘뭐. 폐하가 괜찮으시다면 됐지만…….’

리엘라는 애써 꿍한 마음을 풀고 헤르한과 함께 나섰다.

제국 기사들이 브레니케 공작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로 앞장섰고, 리엘라는 황후라는 공식 자격으로 헤르한의 에스코트를 받아 함께 나아갔다.

헤르한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리엘라는 혹시나 자기가 실수 할지도 모르니 내내 입을 꾹 다물고만 있겠다고 했다.

그건 나름대로 정말 진지한 다짐이었는데.


“두 분 폐하를 뵙습니다.”

“어? 당신은 어제의 그 시녀장?”

소탈한 회색 원피스에 머리를 틀어 올리고 시녀들을 자신에게 내던졌던 그 시녀장이, 오늘은 자주색 드레스를 갖추어 입고 나타나서는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는 것이었다.


“브레니케 공작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고자 왔습니다.”

 

*

협상 테이블에 앉은 브레니케 공작은 시종일관 차분하고도 기품 있었다.

그녀는 사업가 출신답게 빈틈없이 철저하면서도 공손하게 제 요구를 주장할 줄도 알았다.

제국 측이 내민 복잡한 서류들을 아주 꼼꼼하게 검토하고 의논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리엘라는 속으로 자신을 꾸짖었다.


‘폐하께서 고른 섭정이 부인이셨을 줄이야. 공작이라고 해서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다니. 나도 참…….’

민망하고도 머쓱한 마음이었다.

동시에, 조금은 배신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시녀장이라는 건 다 거짓말이었다는 거잖아.’

어젯밤의 일은 아마 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브레니케 공작이 또 조금 괘씸했다.

폐하를 믿지 못하고 몇 번이나 청을 거절했다더니, 이젠 몰래 나타나서 자길 시험까지 하고.

그러면 그 결과는? 나는 시험에 통과했나?


“공작의 요구사항은 더 없나?”

그쯤 헤르한과 공작의 협의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앞으로 내각이 꾸려지면 더 의논한 뒤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당장은 국가 정상화에 필요한 비용 충당이 시급하니, 그 방안을 모색해 볼 생각입니다.”

“아. 그거라면.”

문서를 내려놓은 헤르한이 공작을 반듯하게 보며 말했다.


“우리 제국에서 원조하도록 하겠다.”

“그것은……!”

“세수가 안정될 때까지는 필요할 거야.”

“……사양하겠습니다.”

그저 넙죽 받아야 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공작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분도 담보도 없는 자금을 지원 받았다가 훗날 덜미가 잡힐까 저어됩니다.”

예상 못 한 거절에 헤르한도 주춤한 그때, 입을 연 것은 리엘라였다.


“저를 명분과 담보로 하시지요. 공작.”

브레니케 공작은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은은한 갈색 눈동자를 보면서 리엘라는 차분하게 숨을 골랐다.

그녀가 시녀장이든 공작이든. 또는 저를 시험했든 아니든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제 그레타의 시녀들 앞에서 내보였던 건 자신의 진심이었고, 이 자리에서도 자신은 진심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 그뿐이니까.


“아시겠지만 저는 곧 제국의 황후가 됩니다. 현재 리오타 왕국의 대사이기도 하고요. 대외 지원을 제안할 수 있는 관료로서, 또 이곳을 친정국으로 둔 황후로서, 제가 직접 리오타 왕국에 대한 지원을 진행하겠습니다. 여론은 무리 없이 따라와 줄 거예요. 그래도 어렵겠습니까?”

“…….”

잠시 침묵이 일었다.

고집을 꺾지 않을 것 같던 브레니케 공작은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 그 정도면 명분은 충분할 것 같군요.”

“…….”

“그럼 제국의 지원은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협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남은 세부 사항들은 제국의 대신들과 브레니케 공작의 섭정 내각이 시간을 두고 조율할 터였고, 이제 황제와 공작에겐 그들의 동맹을 다짐하며 악수를 나누는 일만 남았다.


“브레니케 공작. 난 그대가 내 명을 거절할 줄 알았다.”

“예. 폐하.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때 헤르한의 돌발 질문에도 브레니케 공작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페오도르나 왕가든, 엘슈바이크 제국 황실이든, 이름만 바꾼 야욕가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또 다른 권력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제국이 이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믿을 수도 없었고요.”

“알 만하군.”

모두가 예상했던, 참 괘씸한 답변이었다.

헤르한은 오히려 여유로운 웃음으로 받아치며 되물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바꾼 이유는?”

“아. 그것은, 황후께서 아실 것인데.”

순간 회의실 안 모두의 눈이 리엘라를 향했다.

리엘라는 난데없이 뜨끔하면서도 알쏭달쏭했다.

브레니케 공작과 모종의 일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공작을 설득하거나 한 적은 없는데.


“황후께서 제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뭐라고? 리엘라가?”

내내 담담하던 헤르한이 예상 밖의 이름에 놀라 물었다.

리엘라는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턱 벌렸다.


‘제가 언제요!?’

정작 브레니케 공작은 오히려 자애로운 웃음을 머금고서 답을 이어갔다.


“주인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섬기는 백성 또한 잘못이 있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백성이기에 용서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가르쳐주시더군요. 그동안 나라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했던 백성으로서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공작을 앞두고 헤르한과 리엘라는 짧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정말 그랬어, 리엘라?”

“뭐, 대충 비슷한 말을 하긴 한 것 같은데…….”

당황하는 리엘라에게 브레니케 공작이 한발 다가왔다.

리엘라는 그녀가 내미는 악수를 받았다.

브레니케 공작의 손은 의외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좋은 새 주인을 만나길 바란다던 황후 폐하의 당부가 부디 저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길 바랍니다.”

“물론이지요. 운 좋으신 거예요. 우리 폐하는 엄청 좋은 분이시거든요.”

내내 빳빳하게 굳어 있던 공작의 입꼬리가 전에 없이 화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깐깐하고 괴팍한 여인이기만 하던 그녀가 참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었다.

이 땅의 어머니이자, 또 다른 헤르한의 백성이 될 사람.


“두 분 폐하가 꾸려갈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됩니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돕겠습니다.”

그런 그녀가 겸허한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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