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널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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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널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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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널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2022.07.10.
이틀 뒤, 헤르한은 리엘라와 함께 리오타 왕국을 향해 출정했다.
제국을 호령할 예비 황제 부부의 뒤를 따른 것은 아시온과 1 기사단의 일부, 그리고 황후 근위대였다.
꼭 필요한 인원을 빼고는 편제를 가볍게 해서 속도를 내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해 죽겠군.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돌아와서 바로 결혼식을 올려야겠어.”
헤르한은 일부러 더 그렇게 투덜거렸다.
리엘라는 그게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란 걸 잘 알았다.
확실히 처음 며칠은 꼭 여행을 가는 것처럼 들뜨기도 했다. 이따금 황제와 리엘라의 행렬임을 알아본 제국민들이 참 밝은 환호를 보내주어서 더욱.
하지만 국경을 넘어가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리오타 왕국.
지방의 민가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백성들이 다 어디로 갔죠?”
“대부분이 피난을 하고, 나머지는 농가를 떠나 도적이 되었거나 왕성으로 갔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고작 방탕한 왕가가 몰락하는 것만으로도 들풀들은 거세게 동요하고 있었다.
왕성에 가까워갈수록 백성들의 험난한 현실은 더욱 살벌하게 실감이 났다.
“폐하. 리엘라 님. 여기부터 두 분은 마차로 기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요? 무슨 일이죠?”
“왕성 가득 폭도들이 운집해 있습니다.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도 공격을 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말을 멈춘 제국 기사들이 전부 비장한 얼굴로 검과 방패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겠지. 왕국이 이렇게 무너진 데에는 제국의 책임도 없지 않으니까. 리오타 백성들의 원망이 우리를 향할 만도 해.’
“걱정 마. 리엘라.”
“하지만 여기서 싸움이 벌어지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우리에겐 엄청 강한 무기가 있으니까.”
“엄청 강한 무기요?”
헤르한은 그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리엘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왕성에 접어들었다.
아시온의 말대로 왕성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성난 군중들로 바글바글했다.
저 멀리 보이는 왕궁은 허무하게 성문을 벌린 채였다. 왕궁의 병사들은 진작 다 도망친 모양이었다.
“잘난 놈들의 마차다!”
“누구냐? 꼭꼭 숨어 있지 말고 이리 나와!”
이윽고 황제의 행렬을 발견한 백성들이 무기를 든 채로 다짜고짜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시온은 가장 선봉에 서서 검을 뽑고 그들에게 외쳤다.
“모두 공격을 멈추고 길을 터라!”
“네놈들이 누군데?”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제 폐하와 예비 황후이신 리엘라 블리니테 님이시다!”
백성들에게 당당히 정체를 밝히라는 건 헤르한의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선전포고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리엘라는 걱정을 떨치지 못했고, 제국 기사들 역시 전부 허리춤 검집에 손을 얹은 채 긴장 태세를 유지했다.
리엘라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기도하듯 간절히 포갠 두 손 위에는 헤르한의 커다란 손이 놓였다.
“떨지 마.”
“…….”
“괜찮아.”
“…….”
“이제 눈 떠도 돼. 리엘라.”
“…….”
헤르한이 안심시켜주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리엘라는 겨우 눈을 떴다.
군중으로 빼곡했던 전방의 시야가 말끔했다.
“이게…….”
모두는 황제의 마차를 기점으로 양옆으로 갈라져 서서 왕궁으로 향하는 길을 훤하게 터 주고 있었다.
위협적으로 치켜들었던 무기는 절로 다 내려놓은 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도, 협박과 아우성도 들리지 않았는데.
“황제 폐하라는 말에 겁먹고 물러난 건가요?”
“아. 글쎄요. 제 생각에, 그보다는…….”
아시온이 이유를 설명할 틈도 없이, 옆으로 물러난 군중들이 먼저 울부짖었다.
“리엘라 블리니테 님! 우리의 황후 폐하!”
“고국으로 돌아와 주셨군요!”
“부디 저희를……. 당신의 나라를 구해주십시오!”
*
“제국에선 대사님으로 뵈었는데, 이젠 황후 폐하로 뵙습니다.”
마침내 입성한 왕궁 안.
미리 나와 있던 에릭은 리엘라 앞에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직은 아니에요.”
“리오타의 땅 위에서는 이미 모두 블리니테 님을 황후 폐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에릭의 그 다정한 말에 리엘라는 괜한 감정이 또 울컥했다.
아까 왕성에서 만났던, 뭣도 아닌 자신을 대단한 희망이라도 되는 양 부여잡고 울부짖던 백성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일단 조금 쉬어야겠군.”
“폐하. 아까 전해 듣기로는 도착하자마자 국왕을 만나러 가시겠다고…….”
눈치도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릭은 지친 리엘라의 어깨를 감싼 황제의 손길을 보고서야 의문을 거두었다.
“머무실 곳을 정돈해 두었습니다.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에릭이 앞장선 곳은, 왕궁의 서쪽 별궁이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뭔지.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할까?”
“뭐 하러요. 본궁 쪽은 엊그제 폭도가 들어서 아직 위험하다잖아요.”
“정 불편하면 왕궁 밖에 거처를 마련해도 돼.”
“전 정말 괜찮아요. 오히려 신기하기도 하고…….”
리엘라는 감회에 젖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수라장인 본궁에 비해, 별궁은 예전과 다름없이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여기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참 아픈 줄 알았는데.
사실 이곳은 괴로운 기억 못지않게 좋은 추억도 제법 남아있는 곳이란 걸 깨달은 건 저편의 무성한 정원을 보고서였다.
“저기서 폐하랑 처음 손을 잡고 산책을 했었는데.”
그 말에 헤르한 역시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지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기분이 이상해요. 그땐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이렇게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은. 제 옆에 폐하가 계실 줄은 더더욱 몰랐고.”
“흐음.”
헤르한의 표정은 리엘라와 달리 조금 의미심장했다.
“폐하는 아셨어요?”
혹시 헤르한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도 있는 건가?
리엘라의 진지한 물음에 헤르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네가 내 황후까지 되어줄 줄은 몰랐지. 그때만 해도 난 내가 오늘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도 생각 안 했으니까.”
“그런데 왜…….”
“하지만 널 사랑하게 될 것 같단 생각은 했어.”
가을 정원의 울긋불긋한 빛깔을 오롯이 담던 눈동자가, 이제는 다시 리엘라를 향해 반짝였다.
“그래. 확실히. 그건 그때부터 알았던 것 같다.”
*
황제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국왕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별궁 침실에 리엘라를 눕혀둔 후, 기사들을 앞세워 나타난 헤르한은 말로 설득할 것도 없이 문을 부수라고 명령했다.
제국의 무력 앞에 국왕의 마지막 방어책은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꾀죄죄한 몰골의 국왕은 곧장 헤르한 앞에 네발로 기어와 애원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말미를 주시오. 그레타 그것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붙잡아 바칠 테니까…….”
“기회는 이미 줄 만큼 주었어. 국왕.”
헤르한은 기사들에게 고갯짓했다.
국왕을 일으켜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 한 것이었으나, 겁에 질려 몸이 굳어버린 국왕은 좀처럼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질 못했다.
헤르한은 그냥 개처럼 엎드려 있기를 택한 국왕 앞에 준비해 온 협정안을 던졌다.
“순순히 서명한다면 목숨은 살려주지.”
국왕은 반쯤 미쳐서 제대로 글을 읽지도 못했다.
헤르한은 용케도 아직 도망가지 않고 남아있던 왕실 측 말단 공무원 하나를 불러와 협정안을 대신 읽도록 했다.
[페오도르나 가문의 정계 영구 퇴진, 일가 전원 유형]
[죄인 그레타 페오도르나에 대한 수배령 유지]
[죄인 검거 시까지 타란 2세는 제국이 지정한 장소에 구금]
[리오타 왕국 정부에는 제국이 임명한 인물을 수장으로 하는 섭정 내각 설립]
사실상 리오타 왕국을 엘슈바이크 제국의 속국으로 편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조치들에 국왕은 납작 엎드린 채로 흐느꼈다.
“황제이시여. 제발……. 부디 선처를…….”
“선처는 그대의 백성들에게 베풀 것이다. 그대의 몫은 아니지.”
“그래도 제발……. 하, 한 번만 더 기회를…….”
“본 협약에 대한 국제회의의 동의는 얻었다. 이곳 백성들도 이미 새 주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던데.”
“…….”
“서명을 거부하겠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왕궁을 지키고 있는 나의 병사들을 전부 데리고 제국으로 돌아가겠다. 그것을 원하는가?”
“…….”
“왕궁 밖은 폭도로 들끓고, 그대의 병사들은 이미 다 도망쳤으니. 그 틈에서 그대가 과연 몇 시간이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긴 하군.”
“…….”
국왕은 더 버티지 못하고 제국의 협정안에 인장을 찍었다.
페오도르나 왕가의 몰락.
하나 애초에 부흥한 적도 없으니 아쉬워할 사람도 없는, 역사의 낱장에 적힐 몇 줄에 불과한 순간이었다.
*
“이제야 큰 산을 하나 넘었군요.”
“망가진 걸 버리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야. 비워진 자리를 채워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어렵지.”
헤르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심했다.
회의실 테이블, 헤르한의 옆자리에 앉은 리엘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께서 직접 고르셨다는, 그 ‘섭정’은 어떤 분이신가요?”
“음. 그분은…….”
아시온은 난감한 웃음과 한숨을 동시에 뱉어냈다.
“그쪽도 좀 만만치가 않달까. 조금 골치가 아픕니다.”
“만만치 않은 분이라고요?”
서류상으로 보기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왕국 중부 지역에 기반을 둔 브레니케 공작.
왕위 계승 서열로는 23위.
리오타 왕국 내 몇 안 되는 상단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입 대부분을 복지 사업에 사용하고 있는 독지가였다.
덕분에 왕국의 귀족 중에선 드물게 백성들의 평가가 좋은 인물이기도 했다.
“외국 유학을 다녀와서 식견도 풍부하고, 정치 감각도 뛰어나신 분입니다. 무엇보다 폐하께서 능력으로 직접 검증하셨고요. 가장 사심 없이 권력을 수행할 만한 분이라는 평가입니다.”
“아주 좋은 분 같은데요?”
“그게……. 다 괜찮은데 단점이 하나 있습니다.”
“단점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 상황이 급한데.”
“그 단점 하나가 ‘섭정’으로서는 너무 치명적이니 문제입니다.”
“……뭔데요?”
두 사람이 대화하는 내내 헤르한은 제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아시온은 그런 주군과 똑같이 골이 아프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의 말을 안 들으려 한다는 겁니다.”
*
그날 이른 회의를 마치고 침상에 들자마자 헤르한은 곧바로 잠들었다.
‘폐하가 나보다 먼저 잠드는 건 잘 없는 일인데.’
리엘라는 고단하게 닫힌 그의 눈꺼풀을 어루만졌다.
오뚝한 콧날도,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조금씩 희롱하며 그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 어깨가 얼마나 무거우세요? 내가 겁먹지 않게 버티고 서 있어주랴, 죄지은 사람들 혼쭐 내주랴. 이젠 내 고향의 백성들까지 더 짊어지시고.’
리엘라는 헤르한의 이마에 슬며시 입을 맞추고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긴장이 풀린 건 마찬가지였지만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헤르한이 자신을 보듬듯이, 저 역시 제 사람들을 보듬어주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루. 어디 있어요?”
“예. 리엘라 님! 부르셨나요?”
리엘라는 빙긋 웃으며 재빠르게 나타난 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랑 갈 데가 있어요. 따라와요.”
리엘라와 루를 데리고 나서자, 침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대 병사가 상자를 가지고 따라 나왔다.
상자는 리엘라가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이게 뭔가요, 리엘라 님?”
“그냥 몇 가지 조금 챙겼어요.”
“우와! 그냥 몇 가지가 아닌데요? 옷감에 보석에……. 이건 엄청 진귀한 찻잎과 과일인데. 이걸 다 어디에다 쓰시려고요?”
“루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네?”
리엘라는 눈을 휘둥그레 뜬 루를 향해 웃어주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잖아요. 이거 가지고 집에 다녀와요. 가족들도 많이 보고 싶을 텐데.”
“…….”
“루도 알겠지만,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아서요. 이틀 안에는 돌아와야 해요. 처음으로 주는 휴가인데 짧아서 미안해요.”
“리엘라 님…….”
달처럼 크게 뜬 눈에 곧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마차를 한 대 내줄 테니까 안델 경과 함께 다녀와요. 폐하께 허락받은 일이니 걱정은 말……!”
와락.
루가 안겨드는 통에 리엘라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리엘라는 웃으면서 그런 루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애초부터 이번 행군에 루를 데리고 온 건 이럴 목적에서였다.
루뿐만 아니라 왕국에서 차출되었던 시종들 모두를 데려왔고, 집으로 보내주었다.
이번 휴가가 끝난 후 고향에 남을지 아니면 다시 제국으로 갈지는 개개인에게 선택권을 줄 생각이었다.
물론 루는 물을 것도 없이 다시 제국행을 택하겠지만.
“이럴 시간 없어요. 얼른 출발해야 할 텐데?”
엉엉 우는 얼굴과 달리 몸은 애가 닳아서 루는 발을 동동거렸다.
펄쩍 뛰면서 기뻐했다가 또 리엘라에게 안겼다가. 다시 바쁘게 자기 짐을 챙기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루는 마차에 올랐다.
리엘라는 성문까지 가서 떠나는 루를 배웅했고, 루는 마차가 멀어질 때까지 계속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바람이 찹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블리니테 님.”
“그래요.”
그때.
리엘라의 근처에 웬 인기척이 다가섰다.
호위 기사가 단번에 검을 빼 들었으나 상대와 눈이 마주친 리엘라는 기사를 만류시켰다.
리엘라 앞으로 다가온 건 고루한 인상의 귀부인이었다.
“블리니테 님 되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이 왕궁의 시녀장입니다. 그러잖아도 찾아뵈려고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뵙는군요.”
“제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아뇨. 제가 아니라, 블리니테 님께서 용건이 있으실 듯하여서.”
“네?”
자기가 날 붙잡아놓고 내가 용건이 있을 거라니?
리엘라가 알쏭달쏭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잠시 후였다.
“그간 왕실이 밀린 죗값을 모두 받으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시녀장의 말에 억지로 끌려오듯 나타난 이들의 낯이 눈에 익었다.
왕궁에 잡혀있던 시절.
자신을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억지로 약을 먹이고, 팽개치던 끔찍한 얼굴들.
“당신들은…….”
그레타의 시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