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 네 빌어먹을 고향도 내가 지켜 (107/154)


#107 네 빌어먹을 고향도 내가 지켜
2022.07.07.


여느 날과 같은 날이었다.

창 안으로 드는 가을 햇살이 따사롭고, 창가의 화병에 꽂아둔 꽃향기도 그윽한 그런 날.


“블리니테 님. 팔을 이쪽으로 조금 들어주시겠습니까?”

결혼식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초빙된 재단사가 리엘라의 허리에 줄자를 감는 중이었다.


“블리니테 님은 어떤 드레스가 어울릴까요?”

“밑단이 풍성한 것도 좋을 것 같고. 몸매가 드러나는 디자인도 너무 우아할 것 같아요!”

“어떤 디자인을 입으시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우시겠죠!”

시녀들은 오늘도 부산스러웠고 몇몇은 조금 들떠 보이기까지 했지만 그것도 결혼식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로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말하자면 지금 이것은 어제와 다를 것이 없는 평화.

하지만, 그래서 리엘라는 머리가 더 어지러웠다.


“리엘라 님.”

때마침 의상실의 문을 열고 루가 들어섰다.

리엘라의 명령으로 호수궁에 갔다가 돌아온 루는, 리엘라에게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오늘 아침까지도 왕국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는 뜻.’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제로 일주일이 다 지났는데.’

제국이 왕국에 내어준 일주일의 말미.

더 정확히는, 그레타에게 내어 준 마지막 기회.

하지만 약속한 일자가 다 되었건만 왕녀는 자수는커녕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레타. 정말 당신은…….’

리엘라는 머리가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그런데 그게 하필 좋지 않은 타이밍과 맞물렸다.

이마를 짚으려고 손을 올렸는데 그때 막 재단사가 꺼내든 시침핀 끝이 리엘라의 손목을 길게 긁고 지나간 것이었다.


“아얏!”

“허억! 어, 어떡……! 괘, 괜찮으십니까?”

재단사는 어쩔 줄을 모르고 대뜸 한발 물러나 핀을 든 손을 벌벌 떨었다.

옆에 있던 시녀들은 전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리엘라에게 달려들었다.


“어머나. 블리니테 님! 괜찮으세요? 손목에 피가 나요!”

피라고 해봤자 얕게 할퀸 곳에 작은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을 뿐인데.


“피가 난다고?”

그걸 귀신같이 알고 등장한 헤르한 덕에 의상실 안은 통째로 얼어붙었다.


“폐, 폐하…….”

시녀들이 중죄인이라도 된 듯 사색이 되어 물러났다.

가장 창백하게 굳은 건 물론 재단사였다.

리엘라는 헤르한이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서는 것보다 더 빠르게 해명했다.


“제 실수예요. 제가 움직이는 바람에 다쳤어요.”

“다친 곳, 보여 봐. 리엘라.”

헤르한은 당장 리엘라의 손목을 애틋하게 감싸 쥐었다.

핏방울이 맺힌 상처를 보는 그의 눈꼬리가 안타까워 죽겠다는 듯이 아래로 늘어졌다.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듯 피를 핥아서 뱉어낸 헤르한은 입술을 잘근거리고 씹다가 곧장 재단사를 향해 몸을 틀었다.


“네가 감히 내 황후의 옥체에 피를 내었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오늘 두 발로 멀쩡히 황궁을 나갈 기대는 마라.”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재단사는 진작 꺼꾸러졌으리라.

리엘라는 죽일 듯이 으름장을 놓는 헤르한의 허리를 뒤에서 조용히 끌어안고, 그의 등에 이마를 기댔다.


“폐하.”

“……!”

“머리가 아파요. 조용히 쉬고 싶어요.”

나긋한 그 말 한마디에 맹수같이 날뛰던 헤르한이 주춤하더니 곧바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물론 재단사에 대한 분노까지 다 거둔 것은 아니었다.

헤르한은 모든 이들을 다 물리면서 그 재단사는 바깥의 근위대 병사에게 보내 따로 대기시켰다.


“어디서 무슨 사주를 받고 와서 공격한 건 아니겠지?”

“공격을 시침핀으로 하겠어요?”

“독이라도 묻혔을지 모르잖아.”

아. 헤르한이 입으로 상처 부위를 한번 빨아낸 건 그래서였나.리엘라가 피식 웃는 사이, 헤르한은 한숨을 한번 뱉고는 스스로 의심과 걱정이 과했음을 인정했다.


“괜찮을 거다. 네 곁에 들이기 전에 내가 먼저 저자를 검증했으니까.”

“계속 능력을 쓰고 계셨군요.”

“당연하지. 널 지키려면.”

“그러면 나도 정화의 힘으로 폐하를 지켜드려야겠네요.”

몸을 돌려 마주 선 헤르한의 가슴에 리엘라가 이마를 기댔다.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서 이런다지만, 헤르한의 눈에는 오늘따라 제품에 기대오는 몸짓이 참 연약하고도 지쳐 보였다.


“열이 있나? 조금 그런 것도 같고.”

헤르한의 다정한 손길이 리엘라의 볼을 살뜰히 어루만졌다.


“아침부터 너무 무리했나? 델쿠르 백작에게 네 오후 일정을 조정하라고 할게.”

리엘라는 이마를 기댄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도 애써 씩씩한 척은 하지 않았다. 힘든 것은 힘든 대로 내색하면서 리엘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래요.”

그제야 헤르한은 리엘라의 안색이 어두운 이유를 알아챘다.

마침 의상실 한쪽의 테이블 위에 놓인 신문이 보였다. 대사관에 사람을 보내 일부러 받아보았을, 리오타 왕국의 신문이었다.


“왕국에서 폭동이 일고 있대요. 귀족들은 불똥이 튈까 봐 다 도망가고. 국왕은 넋을 놓고만 있어요. 다들 자기 목숨 구할 궁리만 하고…….”

“…….”

“나라가 무너져 가는데 그레타 왕녀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잖아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렇게 비겁하죠?”

리엘라는 스스로 헤르한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계속 분통을 터트렸다.


“왕녀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어요? 그런 사람 때문에 내가 한때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던 게 다 수치스러울 정도예요!”

그 뒤로도 몇 마디의 열띤 토로가 더 이어졌다.

그레타가 너무 밉고 싫다는 둥. 왕국의 지도부가 하는 일도 다 마음에 안 든다는 둥.

선량한 백성들은 전부 폭도가 되어 가는데, 어쩜 아무도 그들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냐면서. 저 같아도 리오타 왕국에 있었다면 궁으로 쳐들어가 시위를 했을 거라는 둥.


“…….”

그렇게 속에 쌓인 모든 답답함을 죄다 풀고 나서야, 리엘라는 헤르한이 아무 대꾸도 없이 가만히 제 말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너무 화를 많이 냈나요……?”

순식간에 머쓱해져 묻는데, 헤르한은 잔잔히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는 대신 리엘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어 살결을 어르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넌 좋은 황후가 될 거야. 리엘라.”

그레타를 한껏 욕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칭찬을 한다고?


“네 몸에 상처가 난 것은 하나도 화내지 않으면서, 백성들이 입은 상처에는 화낼 줄 알잖아.”

리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화만 낼 줄 알면 뭐 해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누군가는 해결하겠지. 걱정 마.”

 

*

그날 오후엔 저번 연회에서 사귄 영애들과의 티타임이 있었다.

사교 모임의 일환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이번 모임의 목적은 리엘라의 결혼 준비를 돕는 것이었다.


“다들 이렇게까지 애써 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머. 블리니테 님! 무슨 말씀을 그리 서운하게 하세요? 무려 국혼이라고요!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해야죠. 자. 어서 앉아보세요.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리엘라는 제 앞에 펼쳐진 수십 권의 카탈로그에 또 눈이 핑핑 돌았다.

가구를 고를 땐 아시온의 조언대로 1번으로 통일해 위기를 잘 넘겼는데, 영애들은 시종들과 달라 만만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 등쌀 저 등쌀에 몇 가지 디자인과 보석을 겨우 골라내고 ‘드디어 끝났다!’ 싶었는데.


“네? 이제 겨우 티아라 하나를 골랐을 뿐이라고요? 아직 남은 예물이 서른 개는 더 되는데요?”

“아, 하하. 그럼 잠시만 실례 좀…….”

리엘라는 힘겹게 웃으며 잠시 자리에서 벗어났다.

손을 한번 씻고 복도의 창을 열어 찬바람도 쐰 후에 다시 응접실 쪽으로 돌아왔는데, 영애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블리니테 님이 평소보다 축 처져 계시네요.”

“당연하죠. 지금 리오타 왕국 꼴이 말이 아니잖아요. 고국이 그 모양인데 기분 좋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참 문제예요. 국왕은 왕녀를 파문한 거로 손을 털려는 모양이던데, 그걸로 되겠어요? 결국엔 왕가가 물러나야 할 텐데 계승자가 하나도 없다면서요?”

“멀고 먼 혈족까지 이미 다 선을 긋고 도망갔다나 봐요.”

“하긴. 그렇게 엉망이 된 나라를 누가 떠맡으려고 할까?”

영애들은 ‘아무튼 그러니 우리가 블리니테 님을 더 기운 나게 해드리자구요!’ 하고 의기투합하고 있었다.

참 고마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리엘라의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사님. 영애들 말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리엘라가 움찔했다.

꺾어진 복도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훤히 알 수 있었다. 아직까지 자신을 ‘대사님’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바로 ‘그’뿐이었으니까.


“이엘…….”

“오지 말고 거기서 들으십시오.”

리엘라는 복도로 뻗으려던 발을 멈추었다.


“리오타 왕국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두시지 않을 겁니다.”

“뭐라고요?”

“페오도르나 왕가는 축출할 테지만, 폐하는 대신 믿을 만한 자를 골라서 섭정을 세우고 왕국이 안정될 때까지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며 지켜보실 생각이십니다. 폐하는 리오타 백성들에 대한 구제책도 이미 마련해놓으셨습니다.”

“폐하가…….”

리엘라는 뭉클해서 뻑뻑해진 가슴 한쪽을 눌렀다.


“그걸 알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요? 내가 걱정할까봐?”

“……어쨌든 리오타 왕국의 일이고, 당신은 아직 나의 대사님이시니까.”

나의 대사님.

그건 이엘이 아직 형식상 자신의 보좌관으로 있으니 한 말이겠지.


“고마워요. 이엘 경.”

대답은 없었다.

조심스레 복도 끝으로 발을 옮겨 귀퉁이를 돌아보니, 이엘은 이미 돌아간 듯 앞이 텅 비어 있었다.

리엘라는 한결 가뿐해진 미소를 지으며 영애들에게로 돌아갔다.


“여러분. 죄송한데, 오늘 모임은 이만큼만 해도 될까요?”

“네? 아, 아니, 어째서…….”

영애 중 한 명은 아까 자신들이 나눈 대화를 리엘라가 들었음을 눈치채고 면목 없이 고개를 숙였다.


“블리니테 님. 저희가 경솔한 입으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아녜요. 다들 절 걱정해주신 거잖아요. 제가 우울할까 봐 일부러 마음 써주신 것 다 알아요.”

“그러면 왜…….”

“폐하가 보고 싶어서요.”

리엘라는 이제야 맑은 얼굴로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폐하와 오래 떨어져 있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병이 있어서.”

 

*



“폐하!”

그렇게 리엘라가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달려간 곳은 헤르한이 있다는 병영 연무장이었다.

공식 일정상으로는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직접 가서 보니 그건 훈련이 아니라 ‘출정 준비’였다.


“폐하?”

“아, 리엘라.”

헤르한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킨 양 뜨끔하더니 이내 이실직고를 했다.


“이따가 얘기하려고 했어. 정말이다. 당장 출발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네 허락을 받은 뒤에 천천히 가려고 했어.”

허락을 받고 가겠다는 사람이 벌써 수행 마차에 짐보따리까지 다 싣고.

리엘라는 헤르한에게로 한 발 더 다가가 그를 흘겨보았다.

리엘라가 다가선 것은 황제인데, 정작 더 긴장한 이들은 아시온과 마부와 행장을 챙기던 기사들이었다.


“어딜 가시는데요?”

헤르한은 리엘라의 손을 잡았다.

리엘라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리오타 왕국에.”

“국왕조차도 다 팽개친 걸 주워 담을 누군가가, 결국엔 폐하셨군요.”

“어쩔 수 없잖아. 네 나라니까.”

“…….”

“네가 뭔가를 더 잃게 되는 건 싫다.”

리엘라를 내려다보는 헤르한의 푸른 눈에는 따뜻한 신뢰와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입술을 물었다.


“너를 버린, 네 빌어먹을 고향도 내가 끝까지 지켜줄게.”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울컥하고 치밀었다.

백성을 버린 그레타가 미웠고, 딸을 버린 국왕이 가증스러웠는데, 사실은 그들을 향한 증오보다 더 무거웠던 건 바로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이대로 내 나라, 내 고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서운함.

자신을 모질게 떠나보낸 땅일망정, 자신이 나고 자란 추억이 깃든 곳임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것을 헤르한이 지켜주겠다고 한다.

가뜩이나 지킬 것이 많아서, 자신이 이렇게 손을 맞잡아주지 않으면 언제고 또 쓰러져버릴지 모르는 남자가.


“함께 가요. 폐하.”

“안 돼. 리엘라. 아직 왕녀도 붙잡지 못해서 위험해. 급한 상황만 정리하고 금방 올 테니…….”

“같이 갈래요.”

“…….”

두 사람의 눈길을 통해 다정한 투정과 애틋한 체념이 말없이 오갔다.

연무장을 빼곡히 메우고 채비를 하던 이들은 모두 동작을 멈추고, 마치 한 그루의 고목처럼 단단하게 선 연인을 충성스럽게 지켜보았다.


“아시온.”

이내 결심을 마친 헤르한이 입을 열었다.


“내 마차를 더 큰 것으로 바꾸어야겠어.”

아시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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