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데
(106/154)
106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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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데
2022.07.03.
제국에서 파견된 병사들은 리오타 왕궁 안을 쥐 잡듯 샅샅이 수색했지만 그레타 왕녀를 끝내 찾지 못했다.
사건이 발생한 후 사흘째 되는 날에는 왕녀가 이미 왕궁 밖으로 도주했으리라 보고 궁내 수색을 그만두었다.
리오타 왕국의 왕실에는 곧 국가 간 공식 교신을 통해 제국의 입장문이 전달되었다.
그레타 왕녀의 자백에 따라 그녀를 로리엘과 황제 헤르한의 독살을 공모한 죄인으로 간주하고 응당한 처벌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었다.
엘슈바이크 제국과 리오타 왕국 간 평화 협정은 자연히 파기되었다.
더불어, 그간 리오타 왕실이 엘슈바이크의 황제 헤르한과 그의 정혼자인 리엘라 블리니테에게 위협을 가해왔던 전력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국제 사회의 여론은 철저히 엘슈바이크 제국의 편이었다.
대륙의 제1 패권국인 엘슈바이크 제국에 등지려는 이는 없었거니와, 리오타 왕국의 만행은 감히 편을 들어주기가 낯부끄러울 정도로 조악하고 죄질이 분명했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싸움조차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리오타 왕국은 그저 맹수의 눈앞에 잠시 얼쩡거렸던 날파리 정도였고, 거리의 호사가들은 리오타 왕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날이 과연 오늘일지 내일일지를 두고 내기를 벌였다.
“부디 공식 답변을 하십시오! 국왕 전하.”
“…….”
“퇴진 의사를 밝히시고 용서를 구하는 성명이라도 발표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과 궁인들의 목숨이라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이러다간 다 죽습니다! 전하!”
“…….”
대신들이 밤낮으로 몰려와 문을 두드리는데도 국왕 타란 2세는 그저 왕궁 깊숙이 들어앉은 채 농성을 시작했다.
제국의 병사들은 그 무책임하고 미련한 태도에 할 말을 잃어, 왕실이 망가져 가는 모습을 관망했다.
그러는 동안, 왕궁에서 대기 중인 에릭에겐 황제 헤르한의 은밀한 지령이 도착했다.
[……하여, 로리엘 이그드니스의 ……에 대해 조사하라.]
*
“또 기다리고 있었어? 자고 있으라니까. 리엘라.”
어두운 밤.
침실 안 테이블에 촛대 하나만을 밝힌 채 초조하게 앉아 있던 리엘라는 고개를 들어 피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회의로 늦는 헤르한을 기다리는 것은 최근의 리엘라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과였다.
“폐하가 없으니 잠이 안 와요.”
“그래도. 이제 결혼 준비까지 시작하려면 더 피곤해질 텐데.”
“그래서 더 기다렸어요. 내 피로가 풀리려면 폐하가 옆에 있어야 하니까.”
다가온 헤르한의 기척에 촛불 하나가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헤르한은 그 작은 불꽃만큼이나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리엘라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예상대로 리엘라의 손이 찼다.
“말도 예쁘게 하기는.”
헤르한은 픽 웃으며, 긴장감에 굳어버린 작은 손을 온기가 돌도록 이리저리 만져주었다.
이대로 계속 웃어주고만 싶은데.
이제부터 전해야 할 소식은 리엘라를 더 잠 못 이루게 할 것이라 헤르한은 마음이 불편했다.
“오늘 에릭에게서 추가 조사 결과를 전달받았다.”
“…….”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리엘라.”
리엘라가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헤르한은 리엘라가 숨을 고를 시간을 주면서, 리엘라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그러면…….”
리엘라는 떨림이 가득한 숨을 뱉어내다가 눈을 살포시 감았다.
“폐하. 3층에서 떨어져 보셨어요? 전 떨어져 봤거든요.”
“뭐? 언제? 어디에서? 다쳤어?”
“지금이 아니라요, 어릴 때. 장난을 친다고 나무에 올랐다가. 그렇게 많이 다치진 않았어요. 며칠 다리를 절었던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예요.”
처음 왕가의 일을 전해 들었던 날 밤.
뜬금없이 옛날이야기나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헤르한도 그 의미를 곧장 알아챘다.
“로리엘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얘길 하는 거지?”
“네.”
“3층이라 해도 머리 쪽으로 떨어졌다면 즉사할 수 있어.”
“그렇다고 해도 이상해요. 로리엘이 왕녀를 안고 떨어졌다고 했잖아요. 그럼 두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떨어졌을 텐데, 왕녀는 살았어요. 그것도 곧장 도망을 칠 수 있을 만큼 멀쩡하게.”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선 황궁 3층 발코니,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높이의 아래를 내려다보면 더더욱 그랬다.
“어쩌면, 로리엘의 죽음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로리엘의 죽음에 숨겨진 다른 이유’
헤르한이 왕궁에 있는 에릭에게 보낸 지령은 바로 그것이었다.
로리엘 이그드니스의 타살 가능성을 은밀히 조사하라 일렀고, 오늘 도착한 그 조사 보고서는 참 잔인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네 말대로 로리엘은 추락한 직후에도 잠시간은 살아 있었던 모양이야.”
헤르한이 열어서 보여준 보고서 안에는 그녀의 절박한 생존의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고 쥐어뜯은 바닥, 손톱 밑에 까맣게 낀 흙.
“그러면 역시 로리엘이 죽은 건…….”
“……그래.”
어떻게 된 거라는 설명이 없이도 리엘라는 곧장 헤르한의 대답을 이해했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분노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안쓰럽게 생각해야 하는 건가?
리엘라는 복잡한 마음에 혼란스러워 하다가, 이내 결연해지기를 택했다.
“폐하.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리엘라의 붉은 눈동자는 곁에서 타들어 가는 촛대의 불빛을 그대로 품고서 강단 있게 일렁거렸다.
“이대로 왕실이 왕녀의 뒤치다꺼리를 대신하도록 두지 마세요. 반드시 왕녀를 잡아서, 꼭 본인에게 죗값을 물도록 해야 해요.”
“하지만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몰라.”
헤르한이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었던 건 리엘라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평화를 찾길 바라서였다.
왕국과의 악연이 가장 괴로울 이는 바로 리엘라니까.
하지만 리엘라는 씩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간이 더 걸린 대도요. 왕녀는 누군가의 뒤에 숨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 알겠다.”
헤르한은 더 반박하지 않고 그런 리엘라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의 황후께서 그러시길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손끝에 여리게 닿는 살결은 아직도 여전한데, 리엘라는 어느새 용서할 사람과 그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분할 만큼은 굳건해져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도주한 왕녀를 대신해 페오도르나 왕가에 죗값을 물으려던 제국은 새로운 입장문을 왕국 측에 전달했다.
[일주일의 말미를 주겠다. 만일 그 안에 왕녀 그레타 페오도르나가 나타나 죄를 고백하고 벌을 달게 받는다면, 죄인 당사자를 제외한 왕실에 대한 연대책임은 묻지 않겠다.]
입장문을 전달받자마자 국왕 타란 2세는 곧장 병상을 떨치고 일어났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 내내 침묵과 외면으로 일관하던 그가 공식 석상에 나타나 제일 먼저 내린 명령은 제 딸에 대한 수배령이었다.
“샅샅이 뒤져서 그레타를 찾아! 현상금……. 현상금을 걸어서라도 그 미련한 것을 잡아 와라!”
“하지만 명색이 왕녀 저하인데 어떻게 현상금을…….”
“이 시간부로 그레타를 우리 페오도르나 왕가에서 파문한다. 그 아이는 이제 내 딸도, 뭣도 아니야!”
*
인적이라곤 없는 어두운 숲속.
수풀만이 우거져 산짐승조차도 발길을 하지 않을 법한 곳에 버려진 별장 한 채가 있었다.
그레타는 바로 그곳에 있었다.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세상을 관전하면서.
“난리가 났네요. 그냥 왕조 하나 갈아치우고 끝날 줄 알았더니. 당신을 제대로 붙잡기 전엔 일이 제대로 안 끝날 모양인데?”
“…….”
“당신이 순순히 목을 내놓는다면 이 사태가 조금은 진정될지도 몰라요. 자.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사내의 물음에도 그레타는 고고하게 앉은 자세를 풀지 않았다.
다만 주먹을 꽉 쥔 그레타의 시선이 꽂힌 건 앞에 놓인 신문이었다.
[그레타 페오도르나 왕녀. 왕실에서 공식 축출.]
[왕위 계승자 부재. 리오타 왕국의 위기.]
[고위 귀족들은 외국으로 잇따라 망명…….]
[페오도르나 왕가의 퇴진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폭동이 곳곳에서 일어…….]
빼곡하게 적힌 글들 하나하나가 화살처럼 그레타의 심장에 날아와 꽂혔지만, 그레타는 이제 절망에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그것들이 더 아프지도 않았다.
“혹시 자수할 생각이 있으면 왕성으로 보내줄게요. 마차라면 얼마든지 있으니.”
그때 사내가 다시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제 성질을 돋우자고 건들거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에 그레타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쉽게 놓아줄 거면 날 뭐 하러 구해줬지?”
“이 아가씨. 구해줘도 난리군요?”
“웃기잖아. 새로운 동료니 뭐니. 대단한 계획이라도 꾸밀 것처럼 날 여기로 데려와서는 아무 설명도 없이 사육만 하는 꼴이?”
확실히 상대는 ‘은인’이라기엔 온통 수상한 구석들뿐이었다.
“넌 대체 뭐야?”
“나에 대해 묻는 건 아직 한참 일러요.”
“날 어쩌려는 건데?”
“그걸 묻는 것도 이르고.”
어이없네.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바보 같은 선문답만 이어가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화를 내려는 찰나, 사내가 그레타의 손을 쥐었다.
“……!”
갑작스럽게 다가선 사내의 손이 제 흰 손등 위를 덮은 순간, 그레타는 이상하게 온몸의 털이 쭈뼛 일어서면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몸이 제 몸이 아닌 것처럼 뻣뻣하게 느껴졌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잖아요?”
훌쩍 다가선 사내의 인영이 그레타의 머리 위를 덮었다.
그냥 손이 닿은 것뿐인데 아주 무거운 것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숨을 쉬기가 가빴다.
“자수.”
“…….”
“할 거예요, 말 거예요?”
“…….”
“난 망할 패는 꾸역꾸역 들고 있고 싶지 않은데.”
사내가 싱긋 웃었다.
그 푸른 눈과 시선이 부딪친 순간 그레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레타는 사내에게 잡힌 제 손을 거칠게 탁 빼내면서 외쳤다.
“안 해! 자수 같은 걸 왜 해?”
“정말?”
“그래. 내가 미쳤어? 내가 살려고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데!”
“무슨 짓까지 저질렀는데요?”
사내가 생글거리며 묻는 말에 다시 그레타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몇몇 장면들이 그레타의 머릿속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테라스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던 그 순간. 팔다리가 부러져 몸이 괴상하게 비틀렸던 로리엘. 그 상태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자길 업신여기며 올려다보던 로리엘의 눈.
“그 돌은 뭔데? 아. 날 죽이려고? 그레타. 과연 네가 할 수 있겠어? 넌 평생 뒤에서 남을 조종할 줄만 알았지. 정작 네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는 고고한 공주님이잖아?”
제깟 게 뭔데 날 업신여겨. 하찮은 시녀 따위면서.
더 생각할 여지도 없이 온 힘을 실어서 휘둘렀던 팔.
기어이 ‘끅’ 하며 사람의 목숨이 끊어질 때 나던 소리나, 완전히 숨이 멎을 때까지도 한껏 부릅뜬 채 자신을 노려보던 그 섬뜩한 눈동자 같은 것.
그랬다.
로리엘을 죽인 것은 자신이었다.
테라스 아래로 떨어져 헐떡이는 그 멍청한 여자의 목숨을, 마지막까지 철저히 앗았다.
‘하지만 그게 왜? 뭐가 어때서? 하찮은 시녀 목숨 하나 따위.’
그레타는 애써 전신을 뒤덮는 떨림을 털어냈다.
고개 숙인 시선에 다시 언뜻 들어온 건 아까 보던 신문이었다.
삽화로 실린 것은 망국을 예감하며 울부짖는 백성들의 모습이었다.
‘하찮은 백성들 목숨 따위.’
그레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중얼거렸다.
“절대 자수 같은 거 안 해.”
리엘라. 왕실과 백성들의 목숨을 인질 삼아 날 협박하면 내가 흔들릴 줄 알았어?
죄책감을 자극하면, 내가 울면서 여기서 나가 죗값을 치를 줄 알았냐고?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정의롭진 않아.
아니. 그건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호구 같은 거지.
“리엘라. 난 네 수에는 안 당해. 끝까지 버텨서 살 거야.”
그레타는 저주하듯 자신의 다짐을 되뇌었다.
내내 생글거리던 사내의 눈이 ‘리엘라’라는 이름이 의미심장하게 번뜩이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