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 당신의 새로운 동료 (105/154)


  • #105 당신의 새로운 동료
    2022.06.30.



    “아직인가요?”

    “예.”

    리엘라의 물음에 제스가 뻑뻑해진 눈가를 만지며 대답했다.

    제스의 앞, 집무실 책상에 놓인 것은 두꺼운 책 크기의 직사각형 수정체였다.

    간단한 문구가 적힌 종이를 올려두면, 짝을 이루는 다른 쪽 수정체에 내용을 투사하는 신비로운 도구. 이른바 ‘긴급연락망’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계속 이렇게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거죠?”

    “예. 언제 반응이 올지 모르니.”

    국가 간에 긴급한 외신을 주고받을 때나 쓰는 이 귀중한 도구를, 모두가 눈이 빠지도록 종일 지키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폐하. 리엘라 님. 드디어 에릭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드디어!’

    바로 교역단을 빙자해 왕국으로 보낸 에릭에게서 그곳의 상황을 보고받기 위함이었다.


    “뭐라던가요?”

    “리엘라 님의 예상대로, 로리엘이 왕녀의 자백을 끌어냈다고 합니다. 왕녀가 폐하를 공격할 목적으로 로리엘에게 독약을 건넸음을 시인했습니다.”

    아.

    응접실 소파에 헤르한과 나란히 앉아 잠시 쉬던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맥이 탁 풀렸다.

    이제야 안심이 된다고 하기에는 만족감보다 더 깊은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어떤?”

    “그게…….”

    아시온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헤르한은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접 가서 확인하지.”

     

    *

    [……하여, 로리엘과 그레타 왕녀가 함께 투신. 로리엘은 사망. 그레타 왕녀는 행방불명.]

    수정체에 떠오른 메시지에 집무실에 모인 모두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침묵을 깬 건 제스의 신경질 가득한 불만이었다.


    “병사들이 그렇게 많은데 그거 하나 못 잡았어? 하여튼 칼만 든 놈들은 멍청해서 안 된다니까.”

    “다짜고짜 3층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잖아. 그걸 무슨 수로 막아?”

    “난간 아래에도 미리 병사를 배치했어야지. 이 멍청아.”

    제스와 아시온의 다툼이 이어졌다.

    정말 서로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다 잡은 왕녀를 또 놓쳐버린 상황이 답답해서였다.


    “그 아래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병사들도 외부에서는 쉽게 들어갈 수 없었을 거예요.”

    둘을 진정시킨 건 리엘라였다.

    왕궁에서 지내본, 특히 왕녀의 동궁에 직접 가본 적이 있는 리엘라이니 할 수 있는 말.

    덕분에 제스와 아시온은 머쓱하게 다툼을 멈추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같이 뛰어내렸는데 혼자만 살아남다니. 이럴 땐 참 운도 좋습니다.”

    “어쨌든 왕녀에게 독살 공모죄가 있음을 밝혀냈다는 건 큰 소득입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폐하?”

    “죽진 않았더라도 치명상은 입었을 테니 멀리 도망가진 못했겠지. 수색을 계속하라고 해. 그리고 왕녀를 찾을 때까지 국왕의 신병을 구속하도록 해라.”

    왕녀가 도망쳐버린 것은, 놀랍긴 했지만 아예 예상 못 한 상황은 아니었다.

    신중하게 준비한 작전이니만큼 헤르한은 여러 가능성에 대한 계획을 전부 다 마련해두었다.

    그리고 이 경우의 결말은.


    “왕녀가 끝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국왕을 포함한 페오도르나 왕가 전체를 고발하고 연대책임을 물을 것이다.”

    리오타 왕국의 왕권 교체.


    “그쪽 왕정에 피바람이 불겠네요.”

    그 순간 헤르한은 옆에 선 리엘라를 살폈다.

    리엘라는 제스의 말에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낯빛이 어두웠다.

    *



    ‘지도자가 흔들리면 결국 고혈을 짜내게 되는 것은 무고한 백성들이지.’

    늦은 밤.

    침실에 들기 전, 헤르한은 뜨거운 물에 몸을 씻으며 고민을 이어갔다.

    정치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리엘라를 생각했다.


    ‘리엘라는 아직 리오타 왕국의 백성인데.’

    아무리 이제는 그곳을 떠나왔다고 해도 ‘고국’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주는 의미는 클 것이다.

    이번 교역단에 곡식과 가축을 실어 리오타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자는 것도 리엘라의 생각이었다.

    그전까지 헤르한은, 왕실이 괘씸해서 볏짚만 가득 실어서 보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자신은 그런 리엘라 앞에서 네 나라의 뿌리를 뒤흔들겠다고 말한 것이다.

    혹시 배려가 부족한 결정이었을까?

    그 결정이 조금이라도 리엘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면 어떻게 하지?


    “리엘라.”

    헤르한은 욕실을 나오자마자 리엘라를 찾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리엘라는?”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3층 발코니에 가서 바람을 쐬고 오시겠다 하셨습니다.”

    “혼자 갔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으니 내실 보초병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루 양과 함께 나가셨습니다.”

    걱정을 덜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그게 더 헤르한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루 역시 리오타의 백성이니까.


    ‘역시 심란했나.’

    발코니로 향하는 헤르한의 걸음이 느렸다.

    왠지 리엘라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도 들어서.


    “폐하. 오셨습니까. 리엘라 님은 안에 계세요.”

    헤르한은 루에게 고갯짓으로 응답해준 뒤 발코니 안으로 들어갔다.

    리엘라는 난간에 몸을 기대고 허리를 한껏 숙여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날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있군. 리엘라.”

    “아. 폐하.”

    “위험하잖아.”

    헤르한이 뒤에서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잡아주자, 리엘라가 난간에서 떨어져 마음 편히 몸을 기대왔다.

    어쩐지 미소도 머금고 있는 듯해서 헤르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웃는 거야?”

    “네.”

    “왜?”

    “음? 폐하가 안아주시니까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알쏭달쏭해 하는 목소리였다.


    “기분 안 좋은 것 아니었어?”

    “제가요? 왜요?”

    “내가 네 나라를 멸망시켜버릴 거라고 해서.”

    “네?”

    리엘라는 아주 황당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는 이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요. 왕권이 바뀌는 거지, 나라가 망하는 건 아니잖아요.”

    “…….”

    “페오도르나 왕가는 타락했어요. 백성들을 위해서라도 폐하의 결정이 백번 옳아요. 리오타의 백성들은 강인하니 다 잘 이겨낼 거예요.”

    “그러면? 다른 고민이 있어?”

    “…….”

    “아까부터 조금 그래 보였거든.”

    리엘라는 잠시 침묵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어쩜. 당신 앞에선 아주 작은 감정의 티끌 하나도 감출 수가 없는 것인지.


    “사실 고민은 아니고. 아까부터 조금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어요.”

    “뭔데?”

    리엘라는 고민하다가 발코니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 3층이에요.”

    “그래.”

    “폐하. 3층에서 떨어져 보셨어요?”

    영문 모를 엉뚱한 물음이었다.


     

    *

    몇 시간이 지났는지, 아니면 며칠이 지나버렸는지.

    그레타는 알 수 없었다.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 봐도 내부는 칠흑처럼 어두컴컴할 뿐이었다.

    당연했다.

    이곳은 낮이든 밤이든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왕궁 밑바닥이니까.

    전쟁이나 반란 같은 환란이 생길 때 왕족의 임시 대피처로 만들어진 공간으로, 현재로선 부왕과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아직 아무도 여길 수색하러 오지 않는다는 건, 아버지가 날 버리지 않았다는 뜻이야.’

    그레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조금만 버티면 돼. 조금만…….’

    하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라치면 가까운 곳에서 병사들의 발소리나 고함이 들려왔다.

    그때마다 그레타는 심장이 조마조마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저 망할 자식들은 잠도 안 자?’

    어둡고, 축축하고, 냄새나고, 무서운 것보다 괴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아파.’

    테라스에서 떨어질 때 팔이 부러지고 발목이 비틀렸다.

    뼈가 망가진 곳만 그렇고, 피부가 까지고 살이 쓸린 곳까지 더하면 온몸이 넝마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로리엘 위로 떨어졌으니 망정이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른 순간, 또 머릿속에 로리엘의 마지막이 떠올라서 그레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레타는 꼭 제 안에 깃든 악령을 몰아내기라도 하듯이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애를 써도 그때의 떨림이 잊히질 않아서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나 사는 것만 생각해.’

    그레타는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또 병사의 발소리가 들리고, 또 로리엘의 눈빛이 떠올라 마음이 끔찍해질 때면 혀를 씹고 머리를 뜯어서라도 정신을 차렸다.


    ‘반드시 살아남을 거야. 조금만 버티면 돼. 난 살 수 있어.’

     

    *

    오기로 버틴다고 다 가능한 것이 아님을 그레타가 깨닫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그로부터 하루, 또는 이틀 뒤였다.

    여전히 시간의 경과는 알 수 없고 여전히 사방이 어두웠다.

    여전히 병사들의 경계가 엄중한 가운데, 바뀐 것은 오로지 그레타의 의지뿐이었다.


    ‘이렇게 죽게 되려나.’

    뼈가 부러진 곳에 염증이 생겨 팔다리가 새빨갛다 못해 파랗게 부어올랐다.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통증이 심했고, 몸도 주체할 수 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너무 괴로워.’

    한번 마음을 놓아버리고 나니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이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삶의 의지를 완전히 놓기 직전, 그레타는 우습게도 파비안을 떠올렸다.


    ‘나도 참. 답도 없네. 한심하긴.’

    왕궁으로 돌아온 이후, 그레타가 늘 바라보던 동쪽은 중앙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런데 이 안에서는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해서 어디가 동쪽인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어. 그게 편하겠어.’

    그렇게 의식이 흐려질 때쯤.

    발소리 하나가 가까워졌다.

    그레타는 잠깐 긴장했다가 말았다.


    ‘또 저러다가 그냥 지나가겠지.’

    지금까지 수백 번, 그랬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발소리는 멀어지긴커녕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아예 그레타가 숨은 굴 앞에서 몇 분을 맴돌았다.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든 그레타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냥 죽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한 와중에도, 제국에 붙잡히는 것만은 끔찍했는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리가 없…….’

    그때 그레타가 숨은 지하의 좁은 입구 문이 열리면서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머릿속이 멍해지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젠 정말 다 끝이다 싶었는데.

    ‘툭.’

    열린 문 안으로 손이 하나 들어오더니 웬 보따리 하나를 그레타 곁으로 던져 넣은 뒤 사라졌다.

    발소리는 그대로 멀어졌다.


    ‘……뭐야. 지금?’

    그레타는 한동안 충격에 얼어붙었다.

    차마 제 앞에 떨어진 보따리를 열지도 못하고 굳어 있다가, 한참 뒤에야 덜덜 떨면서 손을 뻗었다.

    보따리 안에는 깨끗한 물이 든 병과 마른 빵, 상처약과 붕대로 쓸 만한 천 조각 등이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누가……. 누가 이런 걸?’

    보따리를 아예 까뒤집어 탈탈 터니, 마지막으로 툭 떨어져 나온 건 작은 회중시계였다.

    시계엔 곱게 접힌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내일 밤 12시. 동쪽 후문.]

    *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쪽지에서 예고한 대로 다음 날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자, 여느 날처럼 주변을 수색하던 병사들이 전부 호각을 불며 서쪽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열두 시쯤이 되었을 땐, 그레타의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져 있었다.

    한참 심호흡을 하던 그레타는 네발로 기어서 며칠 만에 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처음 몇 번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해 바닥에 주저앉았다.

    급하게 받은 약을 쓰고 붕대를 감긴 했지만, 한쪽 발목은 아예 못 쓰게 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레타는 다른 한 발로 뛰다시피 절뚝거리면서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후문을 나가 코너를 돌자마자 작은 마차가 보였다.

    며칠이나 어둠 속에 갇혀있던 그레타에겐, 그 마차의 유리창이 튕겨낸 달빛마저도 너무나 눈부셨다.


    “당신 누구야?”

    그레타는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마차 앞에 서 있는 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깊게 눌러썼던 로브를 거두고 얼굴을 훤히 드러낸 사내가 가을밤의 달빛처럼 청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의 새로운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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