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 너나 먹어 (103/154)


  • #103 너나 먹어
    2022.06.23.


    가을 아침의 서늘한 바람이 발끝에 닿았다.

    리엘라가 잠결에 발을 오므리며 이불 안으로 밀어 넣자, 곧바로 ‘끼익’ 하고 창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언제 들어도 참 듣기 좋은 목소리.


    “리엘라. 깼어? 더워하는 것 같아서 창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차네.”

    리엘라는 아직 잠을 떨치고 눈을 뜨기도 전에 미소부터 지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고역인 날들이 있었다. 살아가야 할 이유도 알 수 없고, 오늘이 어제보다 더 나아지리란 희망도 보이지 않았던 그 언젠가.

    아마 헤르한을 만나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그가 찾아와주기 직전의 그 순간이, 리엘라의 삶에서는 가장 어두운 순간이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도 있듯이.

    다 끝이 난 줄 알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보니 리엘라의 하늘에 어슴푸레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고, 그게 바로 헤르한이었다.
    리엘라는 이제 눈을 뜨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제대로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웃음이 나서 문제였다.

    이렇게 겁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살아도 좋은 건가 걱정이 될 정도로.

    ‘쪽’
     


    ‘얼마든지 그렇게 살아도 좋아’.

    그렇게 대답해주듯이 헤르한이 허리를 숙여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리엘라는 그제야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아직 잠기운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눈가엔 꾸밈없는 행복이 떠올랐다.


    “바람 좋아요. 창문 다시 열어주세요.”

    “춥지 않겠어?”

    “폐하가 안아주시면 되죠.”

    쿡쿡.

    낮은 웃음과 함께 다시 창문이 조금 열렸다.

    청량한 바람이 들어와 조금 전 입맞춤이 내려앉았던 리엘라의 이마를 시원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몇 시죠?”

    “열한 시.”

    “네!?”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는 리엘라를, 다시 침대로 돌아온 헤르한이 잡아서 눕혔다.

    그뿐만 아니라 영영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뒤에서 끌어안아 품 안에 가두기까지 했다.


    “폐하. 이럴 때가 아니…….”

    “아주 푹 잘 잤나 봐. 내 말도 잊은 걸 보면.”

    “무슨 말…….”

    “오늘 일정 전부 취소했다고 했잖아. 오늘은 휴가라고.”

    “아.”

    헤르한의 말이 맞았다.

    모처럼 푹 잔 덕택인지, 복잡하던 머릿속이 싹 비워진 것처럼 말끔했다.


    “함께 쉬는 건 오랜만인데 뭘 할까? 원한다면 황궁 밖으로 놀러 나가도 좋고.”

    “전 폐하랑 이러고 있는 게 좋아요.”

    “좋지.”

    “그럼 오늘은 정말 종일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응. 아시온이 오지만 않으면. 정 내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와서 보고하라고 했거든.”

    “그렇구나.”

    다시 편안히 누운 리엘라는 헤르한의 품 안에서 꼼지락대며 중얼거렸다.


    “절대 안 왔으면 좋겠다. 아시온 대장님.”

    “그러게.”

    헤르한이 뱉은 웃음이 리엘라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건 이미 꽉 찬 행복을 누릴 대로 누린 두 사람의 욕심이었을까.

    ‘똑똑.’
     


    “아시온입니다. 폐하.”

    어쩜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지.

    헤르한은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고, 리엘라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헛웃음을 뱉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헤르한과 리엘라가 함께 맞는 아침을 익숙하게 여기듯이, 아시온도 이젠 더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는 실수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정말 중요한 일만 보고하라고 했다.”

    “…….”

    “별 볼 일 없는 일이면 네 목숨도 별 볼 일 없이 끝날 줄 알아.”

    끝까지 휴가에 미련을 놓지 못한 헤르한의 엄포에 문밖에 선 아시온이 주춤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헛기침할 뿐, 끝까지 아예 물러서지는 않았다.


    “폐하. 나오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냥 여기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오늘 아침, 리오타 왕국으로 보낸 교역단이 왕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입니다.”

    곧바로 다시 잠을 청하기라도 할 듯하던 헤르한이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온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폐하. 우리 일어나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굳이 소리를 내지 않고도 눈빛을 통해 두 사람의 뜻이 통했다.

    리엘라를 끌어당겨 안은 채로 숨을 몇 번 고르던 헤르한은, 이내 평소의 진중한 얼굴로 돌아와 문가를 향해 명령했다.


    “곧 나갈 테니 대기해. 제스와 필을 호출하고, 긴급연락망을 준비시켜 놓아라.”

    그 후 두 사람은 차분하게 준비를 시작했다.

    또 새로운 싸움이 눈앞에 놓였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불안해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럼 갈까? 리엘라.”

    “네. 준비 다 됐어요.”

    리엘라는 그저 헤르한의 손을 단단히 잡을 뿐이었다.

    또 그렇게 겁도 없이, 기꺼이.


     

    *

    축포가 연이어 터졌다.

    양옆으로 도열한 군악대의 연주도 계속되었다.

    리오타 왕국의 국왕 타란 2세는 가장 화려한 제복에 붉은 망토를 걸치고서 만면에 화색을 띤 채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교역단을 맞이하는 것 치곤 과한 환영이었다. 왕가가 직접 마중을 나와 있을 일도 아니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이 교역단이 그냥 교역단인가. 무려 엘슈바이크 제국에서 온 교역단.


    “환영하오! 정말 반갑소! 먼 길을 오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았소?”

    국왕은 근래 들어 가장 환한 웃음으로 물자를 가득 싣고 들어서는 마차 행렬을 보았다.

    가장 선두의 말에서 내린 이는 그런 국왕 앞으로 나아갔다.


    “담당관은?”

    “제가 담당관입니다.”

    ‘네놈이?’

    국왕은 당황한 시선으로 상대의 위아래를 훑었다.

    담당관이라는 자는 그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할 뿐, 그 뒤에는 그럴듯한 작위도 직위도 따라붙지 않았다. 복장도 평범했다.


    ‘그 여자가 직접 오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적당한 후임이 올 줄 알았는데. 못해도 중앙 관료쯤은 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국왕의 앞에 곧 붉은 밀랍으로 봉해진 교지와 문서가 놓였다.


    “황제 폐하의 칙서와 이번 교역품 목록입니다.”

    “오오, 그래!”

    아무렴 좋았다.

    한몫만 든든히 챙길 수 있으면 그만이지, 하고 신나게 목록을 열어보던 국왕은 또 금세 얼떨떨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금은? 비단은? 상아 조각이나 향유도 없고. 그 대단한 북부 광산에서 나온다는 보석은 단 하나도 없고.’

    “목록은 이게 다인가?”

    “예.”

    “이게 다라고?”

    당황한 국왕은 이번엔 황제 헤르한의 칙서를 열어보았다.

    내용은 간단했다. 올해 리오타 왕국의 농가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큰 곤경에 빠졌다고 하니 이번 교역품은 그들을 구제할 곡식과 가축으로 한정한다는 전언이었다.


    “아, 하하하……. 폐, 폐하께서는 여전히 사려가 깊으시군.”

    “구호품은 이번 교역을 성사해낸 대사 리엘라 블리니테의 이름으로 남김없이 백성들에게 배급하고 그 내역을 보고하란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그, 그래…….”

    이젠 표정 관리를 하려야 더 할 수 없이 국왕의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단상 옆에서 고목처럼 우뚝 서서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던 그레타의 입가는 씁쓸한 미소로 일그러졌다.


    ‘그럼 꽃다발에 리본이라도 매달아 보내줄 줄 알았어요? 우리가 뭐가 예쁘다고.’

    그레타는 휙 돌아섰다.


    ‘칼 든 군대나 안 보내준 걸 고맙게 여겨야지.’

     

    *

    그날 밤이었다.

    국왕 타란 2세는 아무리 합리화를 해봐도 때때로 치솟는 울분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우리 왕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아니, 물론 제국이 교역단을 보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선전은 충분히 되지만……. 그렇다고 보급품을 리엘라 블리니테, 그 여자의 이름으로 뿌리라는 건 뭔가! 우리 왕실의 체면이 뭐가 되느냔 말이야!’

    국왕은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를 어쩐다. 이럴 줄도 모르고 일을 벌여놓았으니……!’

    사실 왕실은 연이은 전시 행정으로 파산 직전이었다.

    심지어 이번 교역단을 호화롭게 맞이한다고 무리를 하는 바람에 비상 곳간까지 다 비운 상태였다.

    교역단이 들고 온 물자로 파탄 난 재정을 메워볼 생각이었는데 그 계획도 이젠 다 물거품이 되었다.


    ‘이게 다 그레타가 초를 친 탓이야! 그 후손인지 뭔지 하는 자식과 결혼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어디에 갖다버리고 왔는지는 입도 열지 않고. 대체 제국에서 무슨 사고를 치고 온 거지? 고얀 것이…….’

    그때였다.

    ‘쾅쾅!’

    ‘쿠웅!’

    복도 밖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단말마의 비명도 들린 것 같았다.


    “밖에 무슨 일이냐?”

    후다닥. 수십 개의 날렵한 발소리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국왕은 벌떡 일어나 진땀을 흘렸다.

    벌벌 떠는 늙은 손은 침대 아래에 숨겨둔 호신용 검을 찾아 먼지 낀 바닥을 더듬거렸다.


    “프레드. 프레드! 밖에 있느냐? 무슨 소란이냐고 물었다!”

    국왕의 애타는 부름에 들려온 건 호위기사의 대답이 아니라 ‘억’ 하는 비명이었다.

    문을 부수듯 쾅 소리가 몇 번 더 나더니, 이윽고 국왕의 침실 문이 끼이익 저항 없이 입을 벌렸다.

    국왕은 침대 앞에 서서 다 낡아빠진 검 한 자루만을 들고 덜덜 떨었다.


    “누, 누구냐! 네놈은!”

    국왕의 호통에 안으로 들어선 인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낮에 보았던 제국 교역단의 담당관이었다.

    작위도 없고 직위도 없으나 눈빛만은 형형하던 그 사내는, 낮과 달리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검을 든 채였다.


    “전하. 늦은 시간에 무례를 무릅씀을 용서해주십시오.”

    그의 뒤로 같은 갑옷을 입은 사내들 수 명이 더 늘어섰다.

    황금색 사자 문장을 어깨에 짊어진 그들의 위압에 질려 국왕의 입술은 핏기 하나 없이 파래져 갔다.


    “네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느 안전인 줄 알고……!”

    “국왕 전하의 안전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전하를 간악한 탈주범으로부터 지켜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뭐라? 간악한 탈주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곧장 두 명의 병사가 국왕의 양옆에 붙었다.


    “안내에만 잘 따라주시면 전하께서는 목숨을 보전하실 수 있습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

    거기에 더해진 극한의 두려움에 전의를 상실한 국왕은 병사들의 억센 제압 없이도 알아서 스르륵 녹슨 검을 놓았다.

    *

    밤이 늦도록 그레타는 여전히 동쪽을 향해 난 창만 바라보았다.

    그때 문밖에 인기척이 들렸다.

    덜커덕.

    끼이익.

    묵직한 것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들으니, 시녀가 기어이 식사 트레이를 끌고 온 모양이었다.


    “안 먹는다고 했잖아! 미친 거 아니야? 지금이 몇 신데?”

    그레타는 문가를 향해 휙 신경질을 냈다.

    그깟 몇 끼니 거른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또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예 문손잡이를 쥐고 돌리는 듯이.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 안 먹는다고. 그냥 꺼지라니까?”

    재차 짜증을 내니, 덜커덕 소리가 멎고 대신 문 앞에 묵직하게 ‘쿵’ 하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레타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나한테 성질부려?”

    어제나 그제였다면 그냥 무시했을 일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오늘은 끓어오르는 분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밤안개가 자욱하게 껴서 동쪽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리엘라 블리니테, 그 이름을 다시 들은 것 때문인지.


    “야!”

    맨발로 쿵쿵거리며 나온 그레타는 문을 확 열어젖혔다.

    문밖, 어두운 복도엔 검은 실루엣이 멀어지고 있었다.


    “야! 그래 너.”

    그레타의 앙칼진 부름에 검은 형체가 몇 발 떨어진 곳에서 우뚝 멈추었다.


     


    “일 똑바로 안 해? 시녀 따위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감히 내가 누구라고 대들어?”

    “……먹어.”

    “뭐?”

    그레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와중에 또 식사 타령?

    저게 진짜 미친 건가?


    “야. 너 이리 와. 너 지금 나한테 뭐라……. 우욱.”

    그레타는 한껏 성질을 부리다 말고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무슨 고약한 냄새지?

    꼭 시궁창에 처박힌 것처럼, 오물이 썩는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때였다.


    “난 많이 먹었으니까 너나 처먹으라고!”

    코를 틀어쥐고 눈을 부릅뜬 그레타의 앞에 검은 형체가 불쑥 달려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역질나는 오물을 뒤집어쓴, 웬 괴물 같은 것이, 사람을 죽일 듯이 표독스러운 눈을 하고서.

    문 앞에 내려놓았던 통을 들어 그레타의 머리 위에 그대로 들어 엎는 것이었다.

    푸다다닥.

    통 안에 들어있던 끈적끈적한 내용물은 역겨운 냄새를 풍기며 그레타의 전신을 뒤덮고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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