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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안마 말고 다른 건? (102/154)


  • #102 안마 말고 다른 건?
    2022.06.19.


    그날 오후엔 새 근위대의 발대식이 있었다.

    기존 기사단의 인원을 정비해 황후의 호위를 전담하는 부대로 재편성하는 것이었고, 이들이 충성을 맹세할 대상은 당연히 예비 황후인 리엘라였다.

    리엘라는 기사들의 새 주군으로서 그들의 가슴에 훈장을 일일이 직접 매달아주었다.

    기사들은 리엘라 앞에 검을 세우고 무릎을 꿇어 충성을 맹세했다.

    황제 헤르한의 공식 선포가 이어졌고, 축포와 함께 근위대가 황궁을 빙 돌아 행진하는 것으로 행사가 마무리되었다.


    ‘분명 식순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단상 앞쪽에 쭈욱 늘어앉은 내빈들을 소개하는 순서라든지, 몇몇 대신들의 축사라든지.

    그런데 다시 한번 순서표를 살펴봐도 해당 내용이 없었다.


    ‘원래 이랬던가?’

    리엘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고 어깨를 으쓱했다.


    ‘일찍 끝나면 좋지 뭐!’

     

     

    *

    발대식이 순조롭게 끝난 이후엔 기사들의 새로운 맹세를 기리는 연회가 열렸다.

    리엘라는 수줍음에 떨면서도 제일 앞장서서 건배사를 해냈고, 기사들은 우렁찬 건배로써 그들의 새 주인에게 화답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예. 블리니테 님의 검과 방패가 되어 심장을 바치겠습니다.”

    “푸흡. 그래요. 고마워요. 안델 경.”

    리엘라는 기사 하나하나의 이름을 모두 불러주며 일일이 의기를 북돋워 주었다.

    새 근위대 기사들은 대부분 2 기사단에서 활약하며 리엘라와 친분을 쌓은 이들이었다.

    그들 중 지원자를 위주로 몇 단계의 엄중한 실력 검증을 거쳤고 헤르한의 개별 심사까지도 통과했으니 전부가 실력자임을 넘어서 믿을 만한 충의를 증명한 셈이었다.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블리니테 님께 맹세의 잔을 올립니다.”

    그런 기사 한 명이 리엘라의 앞에 잔을 내밀었다.


    ‘드디어 맹세의 잔을 나누는 의식이구나.’

    리엘라는 살짝 긴장한 마음에 침을 꼴깍 삼켰다.

    검의 맹세를 마친 기사는 그의 주군과 반드시 술잔을 나누어야 한다는 유구한 전통이 있었다.


    ‘총 서른 명이니 서른 잔. 마시는 시늉만 한다고 해도 최소한 한 모금씩은 마셔야 할 텐데. 흐아. 괜찮을까?’

    오늘따라 리엘라가 남달리 긴장한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취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추태라도 부리면?

    그때. 심호흡하던 리엘라는 반대편 상석에 앉은 헤르한과 눈이 마주쳤다.


    “괜찮다니까. 리엘라.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오늘의 의식을 앞두고 초조해하던 리엘라에게 헤르한은 수도 없이 말해왔었다.


    ‘하지만 폐하가 날 챙겨주는 건 챙겨주는 거고, 내가 취하는 건 취하는 거라고요.’

    이제 와서 울상을 짓는 데도 소용없었다.

    반대편에 앉은 헤르한은 저를 믿는다는 듯이 빤히 보고만 있고, 이런 상황에 도망을 칠 수도 없으니.


    “안델 경의 잔을 받을게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난관을 잘 견뎌내리라.

    리엘라는 굳게 다짐하며 기사가 내미는 잔을 받았고, 침착하게 입을 댔다.

    그런데.


    ‘어? 달다?’

    의식에 쓰이는 술은 몹시 독한 술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서 앞에 서 있는 기사나 옆에서 술을 따라주는 시종을 흘긋거려보아도 모두 태연하기만 했다.

    리엘라는 최대한 얼떨떨한 반응을 감추고 자신의 잔을 다시 채워 기사에게 내밀었다.

    잔에 담긴 것을 한입에 털어 넣은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리엘라에게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났다.

    두 번째 기사도, 세 번째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왜 아무도 지적을 안 하지? 이건 술이 아니라 그냥 과일 주스잖아?’

    뭔가 자신만 모르는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범인은 분명히 그 사람일 텐데.

    합리적 의심을 시작한 리엘라가 건너편에 있는 헤르한을 흘겨볼 무렵, 다섯 번째로 잔을 나눈 기사가 물러났고 그것으로 의식을 마친다는 델쿠르 백작의 안내가 이어졌다.


    “네? 아직 다섯 명밖에 안 했는데?”

    “의식을 간소화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해서 대표로 다섯 명만 선발했습니다.”

    “저는 그런 명령 내린 적 없는데, 누가…….”

    어리석은 물음이었다.

    예비 황후이자 새 근위대의 주인인 자신을 거치지 않고 이런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한 사람뿐.


    “리엘라. 이젠 의식도 다 마쳤으니 우린 먼저 쉬러 가자.”

    헤르한이었다.


    “폐하.”

    리엘라는 어느 틈에 단상을 가로질러 자신의 테이블 앞에 와서 선 헤르한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내내 저 멀리에서 냉담하게 앉아 있기만 하더니, 의식이 끝나는 줄은 어떻게 알고 이렇게 훌쩍 다가와 있나.

    그제야 이 모든 게 헤르한의 작품이었다는 깨달음이 밀려들었다.

    발대식이 예정보다 빨리 끝난 것도.

    이 중요한 전통 의식에서, 기사들이 맹세의 술이 아닌 사과 주스를 마시고도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가 앉은 것도.

    리엘라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 눌렀다.


    “가자. 리엘라. 내가 너무 피곤해서 그래.”

    “하지만 제가 벌써 자리를 비우면 안 되잖아요?”

    “괜찮아. 공식 식순은 다 끝났으니까. 이제부터는 그냥 뒤풀이 연회일 뿐이고. 우린 없어도 돼.”

    “……정말이에요?”

    늘 저 모르는 음모를 펼치는 헤르한이니 이 말도 마냥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야. 의심이 가면 델쿠르 백작에게 물어봐.”

    확실히, 델쿠르 백작을 흘깃거리니 그는 가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네가 아직 ‘높은 사람’ 경력이 부족하니 말해주자면, 이런 자리에서 상급자는 일찍 빠져주는 게 예의야. 그래야 기사들도 좀 편안히 먹고 마시지.”

    “음……. 그건 맞는 말 같기는 한데.”

    “그렇다니까.”

    헤르한은 아예 테이블 안쪽으로 돌아와 리엘라를 잡아 일으켰다.

    두 사람이 일어서자 각자의 자리에서 연회를 즐기던 기사들을 포함한 모든 손님도 기립했다.

    그들에게 한 손을 들어서 남은 시간을 편히 즐기란 메시지를 건넨 건 헤르한이었다.


    “그럼……. 우린 들어갈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리엘라의 손을 헤르한이 꼭 잡았다.

    연회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리엘라는 비로소 숨통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

    리엘라는 내실 안으로 돌아온 것이 무색하게 씻자마자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내일 헤르한이 주관하는 회의에 공식 자격으로 참관하기로 되어있어서, 미리 안건을 공부해두려는 심산이었다.


    “아. 나 내일 회의 취소했어.”

    그런데 열띠게 공부를 시작하는 리엘라를 흘긋 보더니, 헤르한이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말하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리엘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헤르한은 벌써 침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뒤였다.


    “회의를 취소하셨다고요? 왜요?”

    리엘라는 깜짝 놀라서 헤르한을 쪼르르 따라 들어갔다.


    “내가 피곤해서.”

    “…….”

    동그랗게 떠올랐던 눈은 점차 헤르한을 향해 가늘어졌다.


    “우리 오늘은 일찍 잘까? 공부하지 말고?”

    “왜요? 폐하가 너무 피곤하셔서요?”

    “그래.”

    이쯤이면 속셈이 들킨 것을 훤히 알 텐데도 헤르한은 뻔뻔했다.


    “오늘 행사를 간소화한 것도 폐하가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고, 절 연회에서 빼내 오신 것도 폐하가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고.”

    “응. 아주 죽겠군. 그동안 너무 무리했나? 나 이러다가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거기에 같잖은 연기까지 더해가며 괜히 허리를 비트는 헤르한의 모습에 리엘라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이가 없다거나. 진짜 웃겨 죽겠다거나.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피식 웃어넘기면 될 것 같은데, 왠지 마음 한구석이 뻑뻑하면서 울컥한 것은 왜일까.

    아마 헤르한의 말만큼이나, 자신이 그동안 너무 무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차하면 한계에 이를 정도로.


    ‘그냥 나 피곤해 보이니 쉬라고 말해주는 편이 더 쉬웠을 텐데.’

    만약 헤르한이 그랬다면 지금까지 열심히 애쓰던 것이 조금 허탈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헤르한은 그저 자신을 지켜봐 주기만 했다.

    자신이 과하게 욕심내면 욕심내는 대로.

    묵묵히 도와주면서, 뒤로는 언제나 든든한 안전망을 치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참 감사한 사람.

    참 아름다운 사람.

    그런 그가 노을빛을 듬뿍 받은 채로 벌써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직 하늘에 붉은 기운이 다 가라앉지도 않은 초저녁인데.


    ‘잠도 없는 편이면서.’

    아직도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벌써 잠을 청하는 것인지.

    한껏 나른한 표정으로 눈꺼풀을 닫고 누워버린 헤르한의 모습에 리엘라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여태까지 자신을 사납게 몰아세우던 북풍이 거치고, 맑은 햇살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럼 저도 일찍 잘래요.”

    공식적인 그의 정혼자가 된 이래 처음으로 이 이른 시간에, 리엘라는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곧장 헤르한의 품으로 깊게 파고들면서는 참고 참았던 속내도 터트려버렸다.


    “사실 저도 힘들어 죽겠거든요. 다 그만두고 잠이나 푹 자고 싶어요.”

    그러자 그제야 내내 눈을 감고 잠든 척하던 헤르한이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리엘라. 잠깐 돌아봐. 등 보이고 앉아봐.”

    “왜요. 안겨 있고 싶은데.”

    억지로 떨어져 나와 등을 보여주자 뭉친 어깨와 목으로 헤르한의 손이 올라왔다.


    “아…….”

    헤르한은 그렇게 한참이나 리엘라의 뭉친 근육을 손수 풀어주었다.

    그 자상함이 좋아서.

    아니면 그냥 헤르한의 손길이 좋아서.

    리엘라는 빙긋 미소 짓다가 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그거 아세요? 저 되게 부자가 됐어요.”

    “뭐?”

    “없는 게 없어요. 영애들이 선물해줘서 손수건도 한 백 장은 있고요. 드레스랑 구두랑. 어제는 남부 상단에서 진주 목걸이도 보내줬고. 켈트온 상단 알죠? 거기선 실크 원단도 보내줬어요.”

    “그렇군. 좋겠네. 부자라서.”

    헤르한이 낮게 웃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걸 가져본 적은 없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절 사랑해 준 적도 없고요. 제가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 있죠.”

    “…….”

    “그래서 어깨가 아픈가 봐요. 짊어진 게 많아서.”

    헤르한은 여전히 미소 지으면서 커다란 손으로 계속 리엘라의 목덜미를 어루만져주었다.

    늘 여리기만 하던 목이 지금은 얼마나 뻣뻣한지.

    기품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늘 긴장한 채로 꼿꼿하게 있던 탓이다.

    많이 힘들었을 텐데.


    “폐하도 그러셨어요?”

    그런데 리엘라는 자신이 힘들었노라 생색내는 대신 오히려 헤르한에게로 몸을 돌려 동그란 눈을 치켜떴다.


    “폐하는 저보다 짊어진 게 훨씬 더 많으시잖아요. 폐하는 괜찮으세요?”

    “글쎄. 안 괜찮다고 하면?”

    “그럼 이제 순서를 바꿔볼까 하고요.”

    “뭘?”

    “이제는 제가 안마를 해드릴게요.”

    아직 헤르한이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리엘라는 결연한 표정을 짓더니 제 옷소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피로는 내가 모두 풀어드리리, 아주 씩씩한 다짐을 하며 손을 풀던 리엘라의 몸이 일순간 붕 떠올랐다.

    헤르한이 리엘라를 들어 올려서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둔 것이었다.


     


    “안마 말고 다른 건?”

    “다른 거 뭐…….”

    리엘라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당연히 몰라서 한 질문도 아니었다.


    “리엘라.”

    헤르한이 보채듯 이름을 불렀다.

    그의 큰 손이 리엘라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안마를 받는답시고 내내 몸을 맡겼던 손길인데도, 대뜸 낯설고 농염했다.


    “많이 사랑받아서 부자가 됐다며. 그 사랑 나한테도 좀 나눠주면 안 되나.”

    안 되긴요.

    이미 다 당신 것인데.

    리엘라가 그렇게 대답할 새는 없었다.

    애틋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붉은 시선에 인내심이 바닥난 헤르한이 먼저 몸을 일으키며 리엘라를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입술은 그렇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드럽게 서로에게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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