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 제법 황후처럼 보여서 (101/154)


  • #101 제법 황후처럼 보여서
    2022.06.16.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제 헤르한과 리엘라 블리니테의 약혼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 지도 며칠이 지났다.

    온 세상이 들썩이는 만큼 리엘라의 생활도 당연히 180도 바뀌었다.

    시작은 물론, 실수 만발이었다.

    *



    “갑자기 일손이 너무 많아졌어요.”

    황제의 정혼자로 공표된 이후, 리엘라의 시녀와 호위가 몇 배로 늘었다.

    리엘라는 새 보좌관인 델쿠르 백작에게 하소연했다.


    “목욕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시녀도 루 하나면 충분해요.”

    그 말을 한 다음 날, 리엘라를 모시던 시녀들이 절반으로 줄었다.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저녁 황궁 동쪽 후원에서 엉엉 울고 있는 시녀를 만났다.

    리엘라의 명으로 좌천되었다는 시녀였다.


    “백작. 어떻게 된 건가요? 좌천이라니요? 전 그냥 너무 많은 사람이 저 때문에 고생하는 것 같아서 한 말이었는데…….”

    “지금 이 궁 안에 있는 시녀들에게 최고의 영예는 예비 황후 폐하이신 블리니테 님을 모시는 일입니다. 몇 단계나 되는 선발 과정을 거쳐서 블리니테 님의 시녀로 겨우 발탁이 되었는데, 사흘 만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생각하니 상심할 수밖에요.”

    “그, 그런 줄은 몰랐어요. 당장 취소할게요. 어제 했던 말은 없던 것으로 하겠어요. 전부 제 시녀로 쓸 테니 다시 다 복직시켜주세요!”

    비슷한 일은 또 있었다.

    매일매일 새 드레스와 새 구두를 신는 것이 낭비 같아서 전날과 입었던 것과 같은 차림으로 준비하라고 명령했더니 그 사실을 안 의전 대신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었다.


    “블리니테 님! 어찌……. 의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너무 사치가 아닌가 해서요.”

    “지금껏 착용하신 것들을 포함해 이 의상과 액세서리들 모두 황성의 고위 귀족들이 예비 황후께 헌상한 것들입니다.”

    “네?”

    “특히 오늘 내어 드린 이 드레스는 남부의 장인 연합이 특별히 진상한 옷감으로 지은 것이니, 그 갸륵한 정성과 황실의 체면을 생각하시어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한 번은 꼭 착용해주심이…….”

    “이, 입을게요! 당장 입을게요. 다 입을 테니 전부 주세요!”

    손님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리엘라는 제 영웅담을 듣겠다며 찾아온 귀족 영애들과 티타임을 가졌다.

    긴장했던 것과는 달리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꽤 그럴싸한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모임을 마치고 영애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어서야 아무도 준비된 다과에 손을 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여러분. 혹시 다과가 입에 맞지 않으셨나요?”

    “아, 아니요! 블리니테 님. 그런 것이 아니오라……!”

    난감해하던 영애들은 한참 뒤에야 멋쩍어하며 겨우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블리니테 님께서 드시질 않아서요.”

    “네? ……헉!”

    생각도 못 한 이유에 리엘라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이 찻잔을 집은 후에 나머지 손님들이 차를 드는 테이블 매너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제는 자신이 바로 그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임을 잊었을 뿐.


    “어, 어떡하죠?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긴장했나 봐요.”

    “어머! 아, 아녜요. 블리니테 님. 사과하지 마셔요. 저희가 도리어 송구합니다.”

    또 실수였다.

    영애들에게 죄송하다는 사과를 해서 그녀들을 난감하게 만들어버리다니.


     

    *



    “‘높은 사람’ 역할 해내는 거……. 도무지 적응이 안 돼요.”

    그날 밤. 리엘라는 헤르한을 붙잡고 버거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급하게 생각하지 마. 리엘라. 곧 적응하게 될 거야. 리오타 대사가 되었을 때도 잘 해냈잖아.”

    “그때랑은 비교도 안 된단 말이에요.”

    평소 같았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리엘라였다.

    오늘따라 투정이 짙은 것에 헤르한은 리엘라를 마냥 귀엽게 보던 것을 거두고 진지하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흘러내린 이불 아래, 근육이 잘 짜인 그의 상체가 달빛에 도드라졌다.

    미간은 리엘라에 대한 걱정에 살짝 찡그린 채였다.


    “누가 네게 듣기 싫은 소리라도 했어? 누구야?”

    “누군지 알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절대 가만히 두지는 않지.”

    단호한 대답에 리엘라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사람 없어요. 다들 상냥해요. 차근차근 기다려주시고요. 그런데 그냥.”

    “…….”

    “그냥 제가 욕심이 나서요.”

    헤르한은 옆에 걸어둔 가운을 걸치고 아예 침대에서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풀이 죽어 둥글게 말린 어깨가 참 사랑스럽고도 안타까웠다.


    “잘하고 싶어요. 뭐든 잘해서 폐하께 어울리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헤르한은 리엘라의 작은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리엘라가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고 있는 건 황실 관료들의 명단이었다.

    수백 명의 이름과 초상화뿐만 아니라 가문을 포함한 출신 내력이 모두 적힌 아주 두꺼운 문서.


    “그래서 오늘 밤 그걸 다 보고 자려고?”

    “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다 외우려고요.”

    어쩐지, 안 잘 거냐고 아무리 유혹을 해 봐도 꼼짝도 안 하더라니.


    “그러려면 오늘 밤이 아니라 며칠은 못 잘 텐데?”

    “그래도요. 오늘 마주친 대신의 이름을 몰라서 인사도 제대로 못 받아줬어요. 내일은 똑같은 실수는 안 하고 싶어요.”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는 없다고 대답하면 될 일이었다.

    이름을 모른다면 물어보면 될 일이고, 그러면 상대는 당연히 리엘라를 이해해줄 테니까.

    하지만 이건 ‘리엘라의 욕심’에 관한 문제였다.

    제 백성이 될 사람을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주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런, 훌륭하고 사랑스러운 황후가 되고자 하는 것.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욕심을 무시할 권리가 없었다.


    “좋아. 그러면.”

    그래서 헤르한은 서류를 덮어버리고 리엘라를 침대로 데려가는 대신, 리엘라 옆에 있던 의자를 빼내서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리엘라가 아까부터 골치를 썩이며 보고 있던 페이지 일부분을 가리켰다.


    “그로스만 일가는 대대로 법무 대신을 지내는 가문이야. 그래서 현 법무 대신의 영식이 현재 이 부서에서 차관으로 일하며 수련하고 있지. 보면 곳곳에 그로스만 일가가 많지?”

    “어……. 네……. 그러네요.”

    “그리고 여기. 드레이먼과 로마이어는 성씨는 다르지만 가주가 사촌지간이라 같은 가문이나 마찬가지지. 어느 안건이든 항상 의견을 같이하니 유념해 두면 도움이 될 거야.”

    “…….”

    리엘라는 대답하는 대신 헤르한을 빤히 보았다.

    피로감을 떨치고 앉아 진중하게 서류를 내다보는 그의 얼굴은 꼭 그림 같았다.

    짙은 속눈썹 아래, 천천히 줄글을 훑는 푸른 눈동자는 이내 위로 떠올라 제 모습을 거울처럼 담았다.


    “같이 밤새워줄게.”

    그 잔잔하고 나긋한 음성이 리엘라의 심장을 꿍 울렸다.

    아이처럼 불평하고 칭얼대던 못난 자신을 단박에 감싸 안는 말이었다.


    “폐하는 저보다 더 바쁘시잖아요. 쉬셔야…….”

    “나의 황후께서 이렇게 고생하시는데, 어딜 감히 내가 혼자 자.”

    그래도 미안한데.

    헤르한까지 못 자게 할 거라면 차라리 공부를 포기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덮으려고 뻗은 손을, 헤르한이 살포시 감싸 쥐었다.


    “이렇게 손만 잡아주면 돼. 그러면 밤새우는 것쯤이야.”

    리엘라는 얼결에 맞잡은 손을 빤히 보다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그거면 돼요?”

    “그리고 열 장마다 입맞춤 한 번?”

    “흠?”

    “……스무 장?”

    “그래요. 스무 장. 좋아요.”

    리엘라가 사뿐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헤르한도 피식 웃었다.
    거래가 성사되었고, 헤르한은 예쁘게 미소를 머금은 리엘라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져 주었다.


    “선불이거든.”

    헤르한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서류의 한 장을 넘겼다.

    *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바쁜 나날일수록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리엘라는 어느덧 완연해진 가을 아침의 기운을 맞이하며 침실을 나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블리니테 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침실 밖에는 리엘라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며 대기하던 시녀들 너덧 명이 한 번에 아침 인사를 건넸다.

    리엘라는 능숙하게 그 인사를 받고서 시녀들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정갈하게 몸을 씻고 의상실로 이동하니 미리 준비된 세 벌의 드레스가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어떤 것으로 할까요, 블리니테 님?”

    “왼쪽 것으로 하죠. 오후에 근위대 발대식이 있으니 색을 맞추는 게 좋겠어요.”

    시녀의 공손한 물음이 리엘라는 어느새 난감하지 않았다.

    어제 입었던 것을 또 입겠다는 바보 같은 말도 이제는 하지 않았다.

    입장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 요즘, 리엘라는 예전에 자신이 남들이 배려한답시고 했던 행동들이 이제는 배려가 아니게 될 수도 있음을 확실히 알았다.

    대신, 다른 방식의 배려가 가능하다는 것도.


    “밀리 양. 솜씨가 참 좋네요. 머리 모양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영광입니다, 블리니테 님!”

    씩씩하게 대답한 시녀는 불과 얼마 전 후원에서 울었던 바로 그 시녀였다.

    리엘라가 내일도 그녀에게 머리를 부탁하겠다고 말하니, 시녀는 물 먹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채비를 마치고 나오자 응접실엔 제스가 있었다.

    리엘라는 그를 내실 안, 자신의 서재로 안내했다.


    “황후가 되실 거라고 해서 폐하의 회의 기록까지 일일이 다 확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제가 보고 싶어서요. 우리 폐하께선 어제 무슨 일을 하셨나 알아두면 좋잖아요.”

    리엘라는 나긋하게 말하고선 제스가 가져온 회의 기록을 건네받았다.

    그때 한 시종이 서재 안으로 차와 과일을 내왔다.

    리엘라는 미소 띤 얼굴로 시종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에, 제스에게도 상냥한 눈짓을 건넸다.


    “들어요. 제스 경.”

    제스는 그런 리엘라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어쭈’ 하며 헛웃음을 뱉어주어야 할 시점이었는데도 왜인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흐트러짐이라곤 없는 바른 자세로 앉아 찻잔을 드는 리엘라의 동작에서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 모습이 이젠 정말, 제법, ‘황후’처럼 보여서 조금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언제 이런 모습이 된 거지?’

    리엘라가 훌쩍 성장한 걸까. 아니면 진작 성장한 리엘라를 자신이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연맹에 관한 단서는 더 찾은 게 없나요?”

    그때 리엘라의 진지한 질문에 제스는 상념을 떨치고 헛기침을 했다.


    “흐흠. 그러잖아도 폐하의 명으로 이엘 바이스를 리오타 대사관에 복직시켰습니다. 일부러 황궁 밖으로 출퇴근하도록 하고 지켜보는 중인데 아직 그에게 접근해오는 자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군요. 얼마 전에 시온 공작을 그렇게 만든 마당에 그쪽에서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겠지요.”

    “예. 뭐.”

    리엘라가 빳빳한 어깨를 한번 주물렀다.

    제스는 서류로 시선을 돌리는 척하며 까칠하게 물었다.


    “어깨가 아프십니까?”

    “네. 목이랑. 조금요.”

    헤르한이 리엘라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건 바로 그때였다.


    “어디가 아프다고?”

    “아. 폐하!”

    리엘라는 언제 피로했냐는 듯이 화사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찍 오셨네요. 벌써 회의가 끝났어요?”

    “그래. 발대식 전에 옷을 갈아입으려고. 리엘라, 너는 벌써 준비를…….”

    리엘라는 대답 대신 헤르한 앞에 야무지게 서서 치맛단을 들고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취하는 자세로 자신을 선보였다.


    “마친 모양이네.”

    완벽하게 아름다운 리엘라에게 반한 것이 먼저. 말을 마친 것은 그다음.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반응이 마음에 든다는 듯이 웃었다.


    “나가서 폐하의 환복을 준비하라 이를게요.”

    헤르한에게 앉을 자리를 양보하고 집무실을 돌아나가는 리엘라의 걸음이 차분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사뿐하게 내디디면서도, 축이 흔들리지 않고 중심이 단단히 잡힌 정숙한 걸음이었다.


    “뭐……. 이젠 꽤 봐줄 만하네요.”

    웬일로 제스가 후한 평가를 하는 것에 헤르한은 팔짱을 낀 채로 피식 웃었다.

    봐줄 만한 게 아니라 보기만 하기엔 아까울 정도인 거지.

    그래도 헤르한은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살짝 인상을 쓰며 뻐근한 목을 어루만지던 리엘라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제스. 이따가 있을 발대식 식순을 조금 수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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