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 세상의 곳곳에서 (100/154)


#100 세상의 곳곳에서
2022.06.12.


다음날 황실 공보관은 [제국의 현 황제 헤르한과 리엘라 블리니테의 약혼에 관한 공식 입장문]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정권이 바뀌며 한동안 살벌한 피비린내만 풍기던 이번 황실이 처음으로 발표하는 경사였다.

황제의 약혼 소식을 실은 소식지 역시 제국 전역에 뿌려졌다.

소문은 국경 너머로도 퍼져나갔다.

국가 간의 정식 연락망을 통해 소식이 전해졌고 답신들도 속속들이 도착했다. 축하의 뜻을 담은 외신이 빗발쳤다.

헤르한은 이미 세상을 여러 번 떠들썩하게 만든 남자인 동시에 현재 대륙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이기도 했다.

세간의 이목이 쏟아진 쪽은, 당연히 그런 황제 헤르한의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여자.

이국의 평민 아가씨라는 것 외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는, ‘리엘라 블리니테’였다.

천하의 요부라든지. 세상을 뒤흔들 절세가인이라든지.

그게 아니라 사실은 어마어마한 뒷배경을 가진 권력자의 딸이라든지.

여기저기에 온갖 낭설이 떠돌았고, 가십지의 일면은 모두 비슷한 제목이 궤를 달리하며 장식했다.

[철혈 황제를 사로잡은 여인!]

[베일에 싸인 피앙세]

세상의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리엘라 블리니테’의 모습을 상상하고, 기대하며, 말을 옮겼다.

하지만.

세상 곳곳에는, 아직, 그 어떤 공식 발표나 소식지에서도 담지 않은 ‘진짜 리엘라 블리니테’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

리오타 왕국.

왕실.

서신을 받아든 타란 2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한동안 ‘끄응’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차마 뭐라 답신을 쓰지도 못한 채로 ‘기어이……. 기어이…….’ 하는 말만 신음처럼 뱉던 그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그레타가 있는 동궁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라.”

“구, 국왕 전하. 왕녀님은 아직 주무시…….”

“저 요망한 것이! 이 나라를 다 말아먹고, 쳐 잠이 와?”

타란 2세는 시녀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레타가 자고 있다는 시녀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레타는 일어나 있었다. 어제 그랬고, 그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 역시 귀신같은 몰골을 하고 창가에 앉아 멍한 상태였다.


“이 정신 나간 것!”

성큼성큼 그레타에게로 다가간 타란 2세는 그녀의 정수리 위에 서신을 집어 던졌다.

촤라락. 그레타의 머리를 때린 종잇장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훑어 내리며 아래로 떨어졌다.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멍청하게 앉아 있을 참이야?”

국왕의 드잡이에도 그레타는 목석처럼 앉아서 꼼짝하지 않았다.

국왕은 더 속이 터졌다.


“뭐 대단한 거라도 할 것처럼 제국으로 가더니 결국은 거지꼴로 쫓겨나기만 하고! 그래. 기어이 끝장을 보니 좋더냐?”

그레타는 제 발아래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빠르게 내용을 슥 훑어 내린 그녀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그 용병…….”

“또 그 타령이세요? 맨날 똑같은 말만 하기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그레타는 힘없이 피식 웃었다.


“대체 뭐가 문제예요? 황제는 그년이랑 알아서 행복하게 지내라고 해요. 제국의 평화가 우리 왕국의 평화라면서요? 양국 간 사이엔 아무 문제도 없고 며칠 뒤면 황실이 보낸 정다운 교역단도 도착할 텐데 뭐가 그리 언짢으시냐고요?”

“너……! 뚫린 입이라고……!”

“그럼 입 막고 죽을까요, 그냥?”

그레타는 서늘한 눈으로 제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나가주세요.”

냉담하게 국왕을 내쫓고 다시 그레타가 쳐다보는 것은 동쪽으로 난 창이었다.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먼 하늘을 보면서 그레타의 눈동자는 다시 초점을 잃고 아득해졌다.

*

리오타 왕국의 국경지.

제국의 교역단이 잠시 정차한 곳.


“폐하도 정말 너무하시는군. 우리가 떠나 있을 때 이렇게 깜짝 소식을 발표하시다니? 우리 이러다가 결혼식도 놓치는 거 아니겠지?”

“에이. 국혼이 그리 쉬워? 준비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아무튼, 어서 이번 원정을 끝내고 돌아가자고.”

“리오타 왕국에 온 김에 황후가 되실 분에게 헌상할 기념품을 사 가야겠어. 고국의 물건을 받으면 특히 기뻐하시지 않겠어?”

시끄럽게 떠들던 마부와 병사들이 전부 쉬러 간 틈에 제일 끝쪽에 있는 마차의 짐칸이 슬그머니 열렸다.

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뛰쳐나온 검은 형제는 맑은 공기를 맞닥뜨리자마자 숨통을 쥐어짜며 괴롭게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욱. 우웩. 우에엑. 켁. 켁!”

로리엘은 네발로 기면서 눈물 콧물을 다 쏟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망할! 언제까지 이 똥통 안에 있어야 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어. 왕실은 대체 언제 도착하는 거야?’

로리엘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주변에 버려진 빵 조각을 주워들었다.

비위가 상해서 먹는 족족 다 토해내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견뎌야 했다.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씹어 삼켜서, 소화해내야 했다.

그러다가 바닥에서 병사들이 두고 간 소식지를 발견한 로리엘은 이미 다 부르튼 입술을 또 세게 깨물었다.


‘……그래. 결혼, 하든지 말든지.’

황제와 리엘라의 결혼이 진행되어 간다는 얘기는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로리엘의 속을 뒤집는 건 다른 쪽이었다.

소식지에는 얼마 전 경매에서 억만금에 낙찰되었던 보석 ‘여왕의 태양’이 결국은 결혼 예물로 제국의 새 황후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비화가 실려 있었다.


‘제길……. 그냥 아예 강물에 던져버리고 왔어야 했는데!’

곧 전 세계의 국빈들이 모여들어 역사상 가장 성대한 결혼식이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로리엘이 보고 있는 것은 리오타 왕국에서 발간한 소식지인 만큼, 황제의 약혼녀와 친분이 두터운 그레타 왕녀와 국왕 타란 2세도 당연히 결혼식에 초청받게 될 거란 기사도 있었다.


‘뭐? 친분이 두터워? 그 결혼식엘 가겠다고? 꼴값 떠네. 진짜. 내가 이 꼴인데 당신은 고고한 척하게 내가 가만히 둘 줄 알아? 조금만 기다리라고. 이제 거의 다 왔으니까.’

로리엘은 소식지를 갈가리 찢어발기며 남은 빵 쪼가리를 입안에 게걸스럽게 욱여넣었다.

*

리오타 왕국.

남부의 어느 작은 산간 마을.

신문을 구겨 쥔 사내 하나가 헉헉거리며 언덕을 뛰어올랐다.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면서 그가 박차고 들어간 곳은 이끼로 잔뜩 뒤덮인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이, 이, 이봐! 이거 봤어? 어? 당장 일어나봐. 지금 잠이나 잘 때가 아니라니까?”

“왜. 깨어있으면 배고프기밖에 더해?”

“아. 그러지 말고 당장 이것 좀 읽어봐!”

“뭔데?”

오두막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퍼질러 누워 있던 남자는 회색 수염을 아주 지저분하게 기른 상태였다.

그는 한껏 인상을 쓰면서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뭐. 일감이 될 만한 거라도 실렸나?”

“거기 말고, 여기 말이야. 제일 큰 기사!”

“아 뭔데. 정말…….”

노안이 온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메인 기사를 읽다가, 곧 입을 턱 벌렸다.


“리엘…….”

그는 소리 내서 헤드라인을 다 읽지도 못하고 충격에 침묵했다.

그의 동료들 몇은 눈을 반짝이며 반응을 기다리다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내내 석상처럼 굳어 있던 남자는 그냥 신문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동료들은 복장이 터진다는 듯이 소리를 빽 질렀다.


“리엘라가 제국의 황후가 된다잖아!”

“동명이인이겠지.”

“그럴 리가 있어? 우리가 그 황태자……, 아니, 그 황제랑 그 난리를 쳤는데! 그자가 리엘라를 제국으로 데리고 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대체 무슨 영문이람? 아니. 그러지 말고! 잘만 하면 우리도 다시 살길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그의 동료들은 언짢은 얼굴로 다시 드러누워 버린 남자를 억지로 일으켜 몰아세웠다.


“이봐! 정말 가만히 있을 거야, 행크?”

 

*

마지막으로, 위치를 알 수 없는 어느 숲속의 어두컴컴한 저택 안.


“하하하.”

난로 불빛에 비추어 소식지의 글을 읽던 사내는 크게 웃었다.

이렇게 소리를 내서 크게 웃어본 것이 대체 언제인지, 그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한 줄 한 줄 글을 읽어 내려갈수록 사내의 입꼬리는 더 흥미롭다는 듯이 위로 올라갔다.


“우리 황제 폐하. 세게 나오시네. 꽁꽁 감추려 할 줄 알았더니, 아예 대놓고 드러내기 전략이라.”

헤르한은 황태자일 시절부터 종종 그랬다.

언뜻 보기엔 엄청난 욕심쟁이에 성질만 부릴 줄 아는 자 같은데, 한 번씩 반짝이는 지략을 펼치는 것이었다.

욕심이 많을 거라면 대신 멍청하든가.

멍청하지 못하고 똑똑할 거면 겸손하기라도 하든가.

그런데 헤르한은 욕심도 많고 머리도 비상한 황태자였다.

당연히 썩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한번 쫓아냈을 때, 그때 제대로 싹을 잘랐어야 했는데.


“그런 욕심 많은 분이, 다시 황실로 돌아온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결혼을 다 하신다고.”

사내는 앉은 자리에서 두 번째, 세 번째의 소식지를 전부 읽었다.

대부분은 도움이 되지 않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했지만, 나름대로 시간을 때울 만큼의 재미는 있었다.


“맞아떨어지는 건 이 정도인가.”

사내는 가느다란 손으로 기사가 빼곡히 적힌 소식지를 주욱 찢었다.

신빙성 없는 내용들을 다 찢어서 난로 안에 집어 던지고 나니, 남은 줄글은 몇 되지 않았다.

[엘슈바이크 제국 황제의 공식 약혼 발표……]

[새 황후가 될 ‘리엘라 블리니테’는 리오타 왕국의 평민 용병 출신……]

[국경의 차이와 신분의 차이를 모두 뛰어넘은……]

[……세기의 사랑.]

맑게 웃던 사내의 입술이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싸늘한 침묵을 머금었다.

자신이 찢어서 남긴 마지막 줄글, ‘세기의 사랑’ 부분을 노려볼 때 특히 더 그랬다.


“폐하. 당신만 보물을 찾고 있던 건 아니에요.”

사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말했다.


“세상의 모든 게 당연히 다 당신의 차지인 것도 아니고.”

그는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종잇조각 중 단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리엘라 블리니테]

리엘라 블리니테. 리엘라 블리니테.

사내는 그 입술을 마법 주문처럼 웅얼거렸다.

맑은 하늘색 눈동자가 잠시 추억에 잠긴 듯 반짝였다.

냉담했던 얼굴엔 어느새 다시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게다가 이 사람을 발견한 건……. 내가 당신보다 먼저거든요.”

사내는 결국 그 이름 한 구절만을 남기고, 남은 종이를 전부 집어 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길 안에 던져 넣었다.


 
붉은 혀를 날름거리는 난로 바깥으로는 아직 타다 만 땔감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예를 들면 황실 시종들이 입을 법한 블라우스와 조끼라든가.

또는 어느 이름 없는 노인의 모든 행적이 적힌 기록이라든가.


‘아무튼, 재미있게 됐어.’

사내는 빙긋 웃었다.


‘나도 기대에 부응할 재미있는 전략을 짜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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