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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09.
다음 날 아침.
몇 시쯤 되었을까.
그저 창밖으로 어슴푸레 새어드는 빛이 너무 밝다고만 느끼면서 리엘라는 옆자리에 팔을 뻗었다.
헤르한이 누워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루. 루……. 폐하 어디에 있어요?”
꼭 잠꼬대처럼 묻는 말에, 바로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가 재빠르게 들어와 대답했다.
“이른 회의가 있어서 잠시 나가셨어요. 리엘라 님은 좀 더 푹 주무시라고 하셨습니다.”
루가 굳이 헤르한의 당부를 전할 것도 없었다.
리엘라는 루의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다시 몽롱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어찌나 피곤했던 것인지, 꼭 깊은 물속으로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한잠 속을 헤엄치면서 리엘라는 여러 꿈을 꾸었다.
손님들이 바글바글한 연회장에 입장하는 꿈. 그 한가운데서 무시무시한 적을 통쾌하게 이기는 꿈. 하늘을 나는 꿈. 그러다가 다시 지상에 내려와 세상에서 제일 예쁜 반지를 끼고, 헤르한에게 안겨드는 꿈까지.
“으응…….”
그러다가 리엘라는 문득 깨어나서 다시 뒤척였다.
“으음. 다 꿈인가.”
리엘라는 아직도 잠에 짓눌려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면서 중얼거렸다.
옆으로 자세를 고쳐 누우면서 오른손으로 왼손의 어딘가를 더듬었다.
그러면 분명히 만져지는 건 제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표면이 반질반질한 예쁜 반지.
“아니네. 꿈 아니네.”
리엘라는 눈을 감은 채로 히죽히죽 웃었다.
그러자 가까이서 누군가가 따라 웃는 아주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루?”
혼곤한 부름에 가까이에 있는 인기척이 응답했다.
“루. 나 물.”
또다시 누군가 황당한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
그리고 쪼르륵 컵에 물을 따르는 청량한 소리.
곧 누군가가 건넨 크리스털 잔이 리엘라의 손끝에 닿았지만 리엘라는 그걸 집어들만큼 손에 힘이 있지는 않았다.
손끝에 툭툭 물컵이 몇 번 닿았다가 그냥 떠났고 리엘라는 그저 목이 말라 안타까운 마음에 눈을 감고 누운 채로 칭얼거리기만 했다.
“물. 나 물 주……, 읍.”
곧 리엘라의 입술 위로 따뜻하고 뭉클한 것이 덮쳐왔다.
뜨겁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언가가 깊이 들어와 벌어진 입안으로 차가운 물이 몇 모금 흘러들었다.
‘아. 시원해.’
갑작스럽게 덮쳐든 촉감에 살짝 찌푸려졌던 리엘라의 미간이 다시 펴졌다.
꼴깍꼴깍.
리엘라는 생명수를 들이켜는 것처럼 물을 다 받아마시고 입맛을 다셨다.
“또.”
다시 같은 촉감.
두 번째로 물을 받아마시고야 간밤의 지극한 갈증이 채워지면서 점차 정신이 들었다.
리엘라가 제대로 된 이성을 되찾고 헤르한을 알아보았을 때도 그의 입맞춤은 계속되고 있었다.
리엘라는 아주 찰나에 놀랐고, 곧 익숙한 감각이 반가웠고, 따라서 아주 기꺼이 자신에게 입을 맞추는 헤르한의 목을 감고 그를 더 깊이 끌어당겼다.
평소보다 길었던 잠투정만큼 입맞춤도 길었다.
한참 후. 열심히 물을 받아먹고 목을 다 축인 리엘라에 비해, 헤르한은 오히려 갈증이 이는 듯이 정염에 타는 눈으로 리엘라를 보았다.
리엘라는 아직 잠기운이 주렁주렁 달라붙은 눈으로 사랑스럽게 그를 응시했다.
“언제부터 보고 계셨어요? 말도 없이 대뜸 오셔서 놀랐잖아요.”
“대뜸, 나라서 더 좋지?”
뻔뻔한 물음에 입맞춤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붉은 입술이 예쁜 미소를 머금었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 위로 상체를 가까이 숙이면서 리엘라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가느다란 그의 손끝이 리엘라의 네 번째 손가락 위 반지에 닿았을 때는, 그걸 만지면서 귀엽게 히죽거리던 리엘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리엘라. 넌 늘 그렇게 예뻐?”
그런 질문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다니.
리엘라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헤르한의 가까운 얼굴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울 정도로 너무 예쁘던데. 아무래도 화공을 불러서 옆에 상주시켜야겠어. 네 모습 하나하나 다 화폭에 남겨야 할 것 같아.”
“뭐하러요.”
아직 잠결이니까. 조금은 낯부끄러운 대답을 해도 되겠지.
리엘라는 빙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뭐하러 그림으로 그려요. 그냥 옆에 두고 보세요. 전 앞으로 평생 폐하 옆에서, 매일, 이렇게 예쁠 텐데.”
*
리엘라는 그 뒤로 조금 더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정말 피곤했던 것인지, 어제 침실로 돌아온 후로는 기억이 아예 깜깜했다.
“눕자마자 잠드셨어요. 제가 옷을 갈아입혀 드렸고요.”
아침 목욕을 도와주는 내내 루는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욕탕의 더운 수증기 때문인가 했더니, 진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어제 폐하께서 리엘라 님을 직접 안아서 오신 건 기억하세요? 1층 로비에서부터 침실까지 안고 오셨는데, 그걸 한두 명이 본 게 아니에요. 심지어 연회에 오신 손님들도 보셨는데. 다들 벌써 두 분 사이에 사랑이 넘쳐서 큰일이라고, 분명 제국 사상 역대급 커플이 될 거라고!”
“아, 아니. 그런 것 말고요.”
리엘라는 금세 루만큼이나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고 괜히 욕조 안의 물을 첨벙거리며 얼굴을 씻는 척했다.
“연회는 어떻게 되었느냐니까요?”
“아. 리엘라 님이 잠드시는 것을 보신 뒤에 폐하가 다시 회장으로 내려가서 잘 마무리하셨어요.”
“내가 사라져서 폐하가 곤란해진 건 아니고요?”
“아뇨. 다들 이해해주시는 분위기였어요. 폐하께서 미인은 원래 잠이 많은 법이라고. 그러니까 모두들 이렇게 잠이 많은 황후를 얻게 된 것도 영광으로 알고 받아들이라는 식으로 말씀하셔서, 다들 웃으셨거든요.”
“…….”
곤란해지긴커녕 날개를 단 사람처럼 득의양양하게 굴었구나.
자기를 믿고 맡기라더니, 이걸 듬직하다고 해야 할지 웃긴다고 해야 할지.
“저……. 리엘라 님…….”
“네?”
그때 루가 신나서 떠들던 것과 달리 수줍게 리엘라를 불렀다.
욕조 안에 앉아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이만 나오라고 보채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리엘라 님은 이제 정말 황후가 되시는 거죠?”
아주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살피면서도, 설레는 마음과 조마조마한 마음이 전부 드러나는 솔직한 얼굴이었다.
그건 어쩌면 이 순간 자신의 얼굴과도 똑같을 것이라서.
리엘라는 물에 비친 제 얼굴이 루만큼이나 발그레한 것을 한번 보고는 풋 웃은 뒤에 느긋하게 대답했다.
“네.”
“……!”
“아마도 그런 것 같은데요.”
욕조에서 ‘첨벙’ 하고 작은 물보라가 일었다.
루가 갑자기 달려들어 리엘라를 껴안은 통에.
“정말로.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응. 고마워요.”
*
오후엔 헤르한이 미리 호출해놓은 가구 장인들이 들이닥쳤고, 황제의 내실과 침실 안의 가구들을 교체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침대가 더 큰 것으로 바뀌었고 옷장과 테이블도 전부 새것으로 교체되었다.
서재 옆쪽의 침실은 리엘라를 위한 방으로 아예 새로 꾸며졌다.
개인 옷장과 화장대, 늘어져서 책을 읽기 편한 안락의자와 티테이블 등이 놓였지만 침대만은 들어오지 않았다.
잠은 무조건 황제의 침실에서 자라는 뜻이었다.
“우선 큰 가구만 먼저 들이겠다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나머지는 블리니테 님의 취향에 맞는 것으로 고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본궁 집사장이 건네 온 것은 백과사전보다 더 두툼한 카탈로그였다.
커튼과 카펫. 샹들리에와 실내를 장식할 소품들이 각 카테고리별로 수백 개씩은 수록된 것을 보고 리엘라는 혀를 내둘렀다.
아시온이 내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선택하기 힘들 땐 전부 1번을 고르시면 됩니다. 보통 제일 좋은 것이 제일 앞에 실리니까요.”
아.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엘라에게로 아시온은 정중히 한 발 더 다가왔다.
“잠은 푹 주무셨습니까? 갑자기 이 난리가 벌어져서 잘 못 쉬셨죠?”
“괜찮아요. 엄청 푹 잘 잤어요.”
“다행입니다. 저희도 폐하를 말려보려고 했는데 실패했거든요. 아무리 황후라고 해도 궁은 따로 쓰는 게 정상인데. 이렇게 본격적으로 살림을 합쳐버리시니 원.”
“왜 말려요? 말리지 마세요. 저는 좋은데.”
리엘라가 말하며 웃자 옆에 앉아 있던 제스가 성질을 버럭 냈다.
사실 그는 아시온이 도착하기 전부터 먼저 와서 리엘라의 몸 상태를 체크하는 중이었다.
“이보세요. 혈압 재는 중엔 말씀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또다시 재야 하잖아요?”
그러자 리엘라가 대답할 새 없이 아시온이 끼어들었다.
“야. 제스. 넌 ‘이보세요’가 뭐야? 이제 폐하의 부인이 될 분께.”
“그럼 뭐라고 하는데?”
“대사님. 아니면 블리니테 님.”
제스는 정곡이 찔려 아시온의 시선을 외면했다.
이제 리엘라에게 경칭을 해야 한다는 건 제스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노력 아닌 노력도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막상 민망한 마음에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할까?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아시온 저 속없이 해맑은 녀석은 어제부터 곧잘 ‘블리니테 님, 블리니테 님.’ 해대고 있다.
혼자만. 의리 없게.
“아시온 대장님. 전 괜찮아요.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셔도 돼요.”
“그렇습니까? 그럼 ‘리엘라 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어, 그럼 저도…….”
마침 잘 됐다 하며 틈을 노리고 덤벼드는 제스에게 리엘라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
“미안하지만 제스 경은 칼같이 해줘요. 블리니테 님으로. 우리 그렇게 친하지도 않잖아요?”
“……으윽.”
“한번 해 봐요. ‘블리니테 님’.”
오후 검진 내내 잔소리를 들은 것을 복수하기라도 하듯이 리엘라가 짓궂게 그를 놀렸다.
제스는 차마 그런 리엘라에게 덤비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손에 쥔 혈압계 펌프만 죽어라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때 헤르한이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스를 신나게 놀리던 리엘라의 눈은 단번에 그쪽으로 반짝이며 옮겨갔다.
“폐하. 그게 뭐예요?”
“선물이야.”
“와. 너무 예뻐요!”
그쯤에서 검진을 포기한 제스는 리엘라의 팔에 감았던 혈압계를 풀었다.
리엘라는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꽃을 찾아가는 나비처럼 헤르한에게로 풀쩍 날아갔다.
“이걸 가져오시느라 늦으셨군요?”
어쩐지. 아시온만 들어오는 것이 이상했는데.
“그래. 앞으로 매일 하나씩 네게 가져다 바치려고.”
“이런 걸 매일요? 매일 고백하시려고요?”
리엘라가 웃으니까.
헤르한은 그녀를 마냥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고백일 수도 있고. 뇌물일 수도 있고. 의미는 그때그때 다를 수 있지.”
“그럼 오늘의 의미는요?”
“오늘은…….”
리엘라는 헤르한이 대답을 머뭇거리는 그 짧은 순간,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간 걱정과 고민을 읽어냈다.
마침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아시온이 일어나 다가왔다.
“회의실로 모시겠습니다. 리엘라 님.”
*
“뭐라고요? 시온 공작이…… 죽어요?”
리엘라는 자신이 방금 들은 것을 믿지 못하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시온 공작이 죽었다고. 어제만 해도 살아 있던 그 남자. 자신을 집요하게 노리며 탐색하던 그 남자가, 죽었다고.
헤르한이 커다란 꽃다발까지 공수해 온 이유가 있었다.
오늘의 꽃다발은 저더러 놀라지 말고 잘 버티라고 주는 예방약이었다.
“그래. 오늘 아침에 보고를 받았다.”
“우리 쪽 병사들이 그런 건가요?”
“아니.”
“그러면 연맹에서 뭔가 눈치를 채고 처단한……?”
헤르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도 아니라고? 그러면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엘라는 이어진 아시온의 대답을 듣고 기겁했다.
“병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시온 공작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답니다.”
“네? 스스로요?”
“예. 마차에서 내려서 산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벼랑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리엘라는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장면임을 떠나,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후손을 못 찾아서 절망한 걸까요? 뒤가 밟히는 것을 알고 다 포기한 걸까요?”
“저희도 그 가능성을 생각해봤지만 이엘 바이스는 회의적이더군요. 시온 공작은 그렇게 쉽게 포기를 할 사람은 아니라고.”
“그러면…….”
“뒤에 더 큰 누군가가 있다는 거지. 십 년을 가까이 써먹던 허수아비를 단칼에 벼랑 아래로 내몰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고 대담한 누군가가.”
리엘라는 주먹을 꾹 쥐었다.
다른 한 손은 헤르한과 맞잡고 있는데도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은밀하게 탐색전이나 할 시간은 이제 지난 것 같다.”
헤르한이 결론을 내렸다.
“리엘라. 당장 내일 우리의 약혼 사실을 세상에 공표할까 해. 이제부터 널 향한 공격은 전부 황제인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