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98/154)


  • #98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2022.06.05.


    리엘라는 오도 가도 못한 채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선 시종에게 다시 먼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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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성 시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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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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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회는 처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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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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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긴. 폐하께서 즉위하신 후에 이런 큰 연회는 처음이라 다들 긴장했다고 들었어요. 고생이 정말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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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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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앗. 내가 말이 좀 많았나요?”

    연회 내내 바쁘게 떠들어대는 영애들 틈에 있다 보니 수다가 그새 옮은 것인지.

    아니면 긴장이 풀려서 저도 모르게 허튼 말들이 마구 새어 나오는 것인지.

    리엘라는 저 자신이 웃겨서 실없이 웃으며,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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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새 가을이네요.”

    어느덧 별이 뜬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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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이렇게 밤바람이 선선해졌는지도 몰랐네.”

    연회장의 시끌벅적한 웃음과 음악이 벽 너머로 그대로 흘러드는 공간에서, 난간에 기댄 리엘라의 몸은 점점 더 느른해져 갔다.

    아. 폐하는 언제 오시려나.

    꼭 사과해야 하는데. 이대로 영영 안 오시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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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험합니다.”

    그때.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시종이 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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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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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세게 불어서 난간에 그렇게 기대면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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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어어-!?”

    시종의 경고를 알아듣기가 무섭게 난간에 걸친 몸이 거센 밤바람에 흔들거렸다.

    당황한 리엘라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급하게 움직이다가 난간을 헛짚는 바람에 오히려 바깥으로 몸이 크게 휘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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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앗!”

    그대로 기우뚱 리엘라의 몸이 바깥으로 기울어지려는 찰나에, 시종이 그녀의 몸을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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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아앗!”

    리엘라는 시종에게 붙잡힌 채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볼썽사납게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 정도에 그친 것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난간 아래로 추락할 뻔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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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으……. 괜찮아요? 구해줘서 고맙…….”

    리엘라는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그 순간, 자신을 구해준 시종의 얼굴이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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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청명한 하늘에 뜬 구름처럼 은은한 푸른빛의 머리카락. 에메랄드처럼 오묘한 빛의 눈동자.

    그저 일감을 피해 도망친 시종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운 사내의 외모에 리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그가 예뻐서가 아니라.

    꼭 어디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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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혹시 우리…….”

    리엘라가 느리게 물었다.아마 그쯤부터였으리라. 점차 시야가 뿌예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한 건.

    완전히 의식이 흐려지기 직전, 리엘라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의 손목을 꽉 잡고 있는 사내의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절로 눈꺼풀이 감겨 와서 리엘라는 끝내 그에게 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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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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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라. ……엘라!”

    리엘라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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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음.”

    리엘라가 얕게 신음하자 그녀를 향한 부르짖음은 더 크고 애처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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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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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리엘라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천장의 밝은 조명이 눈을 찔러오나 했더니, 곧 창백하게 질린 헤르한의 얼굴이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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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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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미처 ‘폐하’ 하고 부를 틈도 없이, 헤르한이 리엘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앓는 소리를 냈다.

    리엘라는 한 손을 들어 그런 헤르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조금씩 정신을 되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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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연회장 대기실……. 아직 창밖은 밤이고. 옷도 그대로이고. 어렴풋이 연회장 소리도 아직 들리고. 잠깐 정신을 잃은 건가…….’

    상황을 설명해준 건 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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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코니 앞에 쓰러져 계시더군요. 저랑 대기실에서 헤어진 지 10분도 안 됐는데, 어떻게 그새에……. 제 탓입니다. 그냥 대기실에서 쉬고 계시라고 할 것을.”

    제스는 또 한숨을 뱉어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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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방 의식을 찾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젠 좀 괜찮으십니까? 물을 좀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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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오래 이러고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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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분 정도요.”

    그러면 그 10분 동안 폐하는 계속 이러고 계셨다는 건가.

    미안한 마음에 계속 헤르한을 어루만지는 리엘라의 손가락 사이로,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감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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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저 이젠 괜찮아요. 이제 다 잘 끝났다고 생각하니까 한 번에 긴장이 풀려서 잠깐 정신을 잃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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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혹시 모르니 검진 도구를 좀 가져오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생각했다가 리엘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제스는 일부러 자리를 비켜주려고 나간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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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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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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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고개 좀 들어보세요. 네?”

    리엘라가 몇 번을 더 부르고야 헤르한은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으라니 들긴 했지만 그래도 리엘라가 야속해서 도저히 눈은 못 보겠다는 듯 벽을 향해 선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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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죄송해요. 많이 걱정하셨죠?”

    그 말에 헤르한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가 풀기를 반복했다.

    많이 걱정했느냐고? 과연 걱정만 했을까?

    제스의 성화에 어쩔 수 없는 척 발코니로 왔다가 쓰러져 있는 리엘라를 보았을 때, 그는 눈앞이 캄캄해져서 숨이 멎는 줄만 알았다.

    어째서 리엘라는 늘 이렇게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치는 것인지.

    아무리 적을 속이기 위한 술수였다지만, 다른 사내의 손을 보란 듯이 잡는 이 철없는 연인을 향해서 투정 한 번 부릴 여유도 주질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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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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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보지 마.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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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폐하를 어떻게 보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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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있는 대로 겁줘놓고 그렇게 애틋하게 보지 말라고.”

    걱정했던 것만큼 속상함이 커져서, 헤르한은 결국 화를 내듯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리엘라는 나긋하게 그의 말을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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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가 좋아서 눈빛이 저절로 애틋해지는 걸 어떻게 해요.”

    그 말에 헤르한은 다시 리엘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상태로, 정말 못 살겠다는 듯이 노려보기도 하다가, 뭐라고 한소리를 하려고 하기도 하다가.

    때마침 일어나려고 힘겹게 움직이는 리엘라를 보고서는 더 참지 못하고 다시 소파에 걸터앉았다.

    아직 서운함이 가득 남아 있는 표정에 비해, 리엘라를 일으켜주는 손짓은 한없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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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했어요.”

    그때 몸을 다 일으킨 리엘라가 다짜고짜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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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이에요.”

    혹시나 헤르한이 또 고개를 돌려버릴까 봐, 리엘라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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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굳이 이엘의 손을 잡으면서 나서지 않았어도 폐하가 해결해주셨을 텐데. 폐하를 믿고 기다렸어야 했는데.”

    무슨 사과를 하는 건가 했더니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까 일을 얘기하는 건가.

    헤르한은 기가 차는 한편, 저 사과에 속상한 마음이 눈 녹듯 한 자신도 민망해서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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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마음이 급했어요. 그 남자가 의심을 거두지 않을까 봐. 그래서 우리가 또 위험해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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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어.”

    헤르한은 못 이기는 척 리엘라의 사과를 받으면서 잔소리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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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신 그러지 마. 특히 이엘 바이스 그자는…….”

    그자는 널 진심으로 사랑하니까.

    헤르한은 저도 모르게 섬뜩해진 눈빛을 거두고서 다른 방향으로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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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자는 아직 위험하니까.”

    끄덕끄덕.

    리엘라는 두 번이나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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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또 잘못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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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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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더 크게 잘못한 것.”

    헤르한은 깊은숨을 내쉬며 리엘라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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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대로 아프면 어떻게 해. 리엘라. 힘들었으면 얘길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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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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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닌가. 이건 내 잘못인가. 아침부터 도망치랴, 울고불고하면서 내 청혼 받아주랴. 많이 지쳤을 텐데 내가 또 널 무리시킨 거로군.”

    미안하다는 뜻이었는데 리엘라는 민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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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도망친 거 아니었다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많이 울고불고하지도 않았고……! 딱히 쓰러질 정도로 힘든 것도 아니었는데…….”

    몸의 피로를 만만히 본 건가?

    리엘라는 생각하다가, 쓰러지던 그 순간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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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그런데 발코니에서 시종 하나 못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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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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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아까 발코니에 같이 있었어요. 머리는 푸른색이고. 제가 쓰러질 때 그 시종이 절 잡아주었는데…….”

    헤르한은 인상을 쓰며 기억을 되짚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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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혼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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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요……?”

    리엘라가 쓰러질 때 함께 있던 시종이 있었다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고 확인해봐야 할 일이지만 가장 급한 일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당장 헤르한의 눈에 더 밟히는 건 온통 리엘라였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나, 갑갑해 보이는 드레스, 평소보다 더 높은 구두를 신느라고 붉어진 발,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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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되겠다. 일단 돌아가서 이만 쉬자.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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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하지만 아직 연회가 안 끝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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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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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손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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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또. 내 말 안 듣고 혼자 나서기라도 하려고?”

    평소보다 따끔한 헤르한의 꾸중에 리엘라는 잔뜩 혼난 학생처럼 입을 다물었다.

    헤르한은 무릎을 굽혀 그런 리엘라의 눈높이에 제 시선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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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말대로 해 줘. 리엘라. 더 무리했다가 내 연약한 황후께서 어떻게 되어버리기라도 하면, 그땐 내가 정말로 미쳐버릴지도 몰라.”

    다정한 애원에 리엘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헤르한이 리엘라를 두 팔로 안아 올렸다.

    리엘라는 반사적으로 헤르한의 목을 껴안고 매달렸다.

    둘은 그 자세로 연회장 대기실을 나서서 본성 로비를 가로질렀다.

    도대체 자신은 하루에 몇 번이나 이 사람을 애원하게 만드는 걸까.

    리엘라는 확실히 자기는 골칫덩이가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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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제가 그랬잖아요. 전 실수투성이 황후가 될 거라고. 폐하께서도 다 알고 시작하신 거니까 제가 이렇게 속 썩인다고 해서 절 버리시면 안 돼요.”

    어이가 없는지 헤르한이 ‘참나’ 하며 웃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에게 더 꼭 매달리면서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

    그날 밤, 간만의 연회로 불야성을 이루는 황궁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온 공작은 이엘을 몰아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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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엘. 혹시 이상한 수작을 벌이는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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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무슨 수작을 벌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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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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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확인시켜드렸는데도 믿지 못하시겠다면 그냥 다 그만둘까요? 앞으로 공작 어른께서 직접 후손을 찾으시겠습니까?”

    이엘이 제 목에 걸고 있던 마석을 꺼내서 시온 공작에게 내밀었다.

    시온 공작은 그것을 언짢은 얼굴로 쳐다보기만 할 뿐 차마 건네받지는 못했다.

    이엘을 황궁으로 보내라고 한 것도, 이엘에게 마석을 맡기라고 한 것도 전부 ‘그분’의 뜻이었으니까, 자신이 함부로 번복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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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다. 앞으로 두고 보겠다. 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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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살펴 가십시오.”

    시온 공작은 한참 끙- 소리를 내며 이엘을 노려보다가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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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그 여자 같았는데 말이지. 그 여자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후손이라는 거지? 마석에 반응이 없었으니 오늘 그 연회장 안에 없던 것은 확실하고.’

    덜컹거리는 마차 안.

    시온 공작은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달달 떨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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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쨌든 당장 보고를 올리러 가야겠군. 황궁까지 가서 아무 소득도 올리지 못한 것을 알면 또 얼마나 화를 내실지.’

    그때였다.

    앞으로 닥칠 일에 시온 공작이 몸서리를 치며 떨던 그때.

    그가 별안간 웅크리고 있던 어깨를 펴고 목을 빳빳이 들었다.

    짜증이 가득 담겨 있던 그의 잿빛 눈동자는 어느새 감정과 초점을 잃고 텅 빈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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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차를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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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차를 세워라.”

    시온 공작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명령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똑같이 따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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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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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가겠다.”

    마차가 멈추었다.

    일단 말을 세운 마부는 마차의 문을 열며 시온 공작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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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 어른. 어디까지 걸어가시려고 그러십니까? 아직 댁까지는 한참인데요?”

    시온 공작은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마부가 당황해서 따라가는데도, 그를 무시한 채 마차에서 내려 앞으로만 걸을 뿐이었다.

    마부는 한참 공작 어른을 부르며 그의 뒤를 쫓다가, 순간적으로 엄습한 위화감에 발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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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 어른의 걸음걸이가 원래 저랬던가?’

    시온 공작의 기이한 행동에 당황한 건 마부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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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가 뒤를 밟는 것을 눈치챈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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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아직 모르지. 조용히 따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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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황제가 보낸 기사들은 은밀하게 움직이며 시온 공작과의 거리를 더 좁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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