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날 살리기로 결심했으면
(97/154)
97 날 살리기로 결심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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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날 살리기로 결심했으면
2022.06.02.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헤르한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듯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시온의 말대로,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높은 구두만큼 높아진 신분으로 연회장에 입장하는 것 말고.
손님들에게 황제의 파트너로서 좋은 첫인상을 보이는 것 말고.
‘내 목숨을 노리는 이들과 대면해서 이겨야 할 시간.’
“리엘라.”
“네. 폐하.”
“겁먹을 것 없어. 넌 나…….”
“전 폐하만 보고 있으면 된다고요?”
결연하게 헤르한의 말을 가로챈 리엘라가 씩씩하게 미소 지었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한번 내려다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내, 그는 옆을 지나던 시종에게서 샴페인 잔을 하나 받아들었다. 다른 한 손을 들어 악사의 연주도 다른 곡으로 바꾸었다.
작전 개시를 알리는 신호.
멀찍이서 그 신호를 알아본 이엘이 황제와 리엘라가 선 곳으로 몸을 틀었다.
검은 연미복을 갖추어 입은 그의 옆에는 백발의 노신사가 함께였다.
‘이엘…….’
리엘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사건이 있었던 날 이후, 이엘을 대면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엘 바이스.”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가까이 다가와서 선 이엘은 고개를 들지 않을뿐더러, 리엘라 쪽은 절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리엘라는 그런 그의 외면이 못내 씁쓸했다.
괘씸한 것 같기도 하고.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흉터가 생겼네.’
일부러 턱까지 높은 깃을 세우고 화장도 두껍게 했지만, 그래서 더욱 리엘라의 눈에는 그의 상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날 속이니까 그렇지. 그러게 왜 그렇게 미운 짓을 했어요.’
이엘이 얼마나 가혹한 문초를 당했을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가 응당히 치러야 할 대가였고,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싸움에 임해야 할 때니까.
“폐하. 괜찮으시다면 전에 말씀드린 저의 후견인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연습했던 대로.
이엘이 담담한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헤르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엘을 따라왔던 노신사가 잿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한발 앞으로 나왔다.
“이처럼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존엄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아젠느 왕국의 아르빈 시온이라고 합니다.”
“이엘에게 많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아젠느에서 공작위를 갖고 있다지.”
“아젠느를 떠나 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폐하의 땅에선 그저 포목 상단을 운영하는 장사치일 뿐입니다.”
“이엘과 같은 우수한 학도들을 후원하는 훌륭한 독지가기도 하지. 겸손이 지나치군. 시온 공작.”
“과찬이십니다. 폐하.”
시온 공작이 주름진 입가를 올리며 웃었다.
물론 그는 공작도 아니고 훌륭한 독지가도 아니었다.
아젠느 왕국은 바다 건너 멀리에 있는 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출신 신분을 조작할 대상국이 된 것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뛰어난 인재의 덕을 보게 된 것도 모두 공작의 덕이로군.”
그래도 헤르한은 시치미를 뚝 떼고 연기를 이어갔다.
“저번 소동에서 이엘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는 공작도 들었을 거야.”
“예. 소식을 듣고는 저도 놀랐습니다.”
“이엘이 활약해주지 않았더라면 나와 나의 정인 모두 위험해졌을 테지.”
‘나의 정인’
그 말에 시온 공작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났다.
일순간, 내내 공손한 척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의 시선이 헤르한의 옆에 선 리엘라에게로 옮겨갔다.
리엘라는 태연한 척 숨을 고르면서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그의 눈빛을 감내해냈다.
‘리엘라 블리니테.’
굳이 황제가 옆에 끼고 있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눈이 갔을 만한 여자.
먹잇감을 탐색하는 맹수처럼 리엘라를 노려보던 시온 공작이 다음 단계로 쳐다본 것은 이엘 쪽이었다.
더 정확히, 그가 바라본 것은 이엘의 목에 걸린 마석.
‘……아니?’
그때 시온 공작이 눈을 부릅뜨고 동요했다.
“왜 그러지, 시온 공작? 뭔가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폐하.”
그걸 지켜보는 헤르한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이엘의 마석은, 태초부터 그런 것처럼 새까맣기만 할 뿐이었다.
*
“가짜 마석을 만들어.”
“예?”
“아무리 연맹이라고 해도 후손을 판별해내는 건 이엘의 마석 하나에 의존하고 있지. 그러니 이걸 역으로 이용하면 충분히 눈속임할 수 있을 거다.”
가짜 마석을 이엘의 목에 걸어 리엘라를 의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헤르한이 낸 묘안이었다.
“폐하. 명하신 대로 장인을 모셔왔습니다.”
헤르한은 그렇게 급하게 불려온 장인 앞에 두 개의 보석을 건넸다.
하나는 이엘의 마석. 다른 하나는 세공되지 않은 흑요석이었다.
“그 흑요석을 깎아서 이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야 한다. 할 수 있겠나?”
“예, 예. 하오나 폐하. 색이 다릅니다만. 이것은 푸른빛이 감돌고 있습니다.”
장인의 물음에 헤르한은 바로 답했다.
“빛은 상관없어. 모양만 같으면 된다.”
어차피 그 멍청한 자들은 푸른빛이든 붉은빛이든 볼 일이 없을 테니까.
*
어색하게 웃는 시온 공작의 동공이 갈 데를 모르고 사방팔방 흔들렸다.
‘그냥 까만색? 저 여자가 가까이 있는데도 마석이 아무 반응이 없잖아? 내가 그동안 정말 헛다리를 짚은 거라고?’
헤르한은 굳이 공작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아도 그런 그의 생각이 전부 읽히는 것 같아 우스웠다.
“어쨌든 이토록 훌륭한 인재를 키워 보내준 것에 대한 치하는 언젠가 분명히 하도록 하지.”
“예, 예. 감사합니다. 폐하.”
시온 공작의 고개가 맥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럼 이걸로 끝인가. 생각보다 싱겁군.
헤르한이 리엘라와 함께 돌아서려는데, 그대로 물러나나 싶던 시온 공작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 폐, 폐하! 외람되오나, 아직 드릴 말씀이…….”
“무엇이지?”
“그게……. 그러니까…….”
시온 공작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제 후원 업무가 어쩌고, 또 폐하가 해주신다는 치하가 어쩌고, 중언부언하고 있지만 결국은 아직도 의심을 말끔히 떨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해. 연맹은 꽤 오랫동안 날 의심했으니까. 그동안 이엘의 행적도 충분히 의심스러웠고.’
리엘라는 잠깐 고민하다가 결심을 굳혔다.
원래의 계획상, 자신이 할 일은 그저 황제의 옆에서 시온 공작에게 얼굴을 보이고 마석의 무반응을 확인시켜주는 것뿐이었지만.
“이엘 경!”
리엘라는 발랄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모두가 보란 듯이, 특히 시온 공작이 보란 듯이 이엘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이엘 경. 얘기가 길어질 모양인데 우리는 저쪽에 가 있을래요?”
“……!”
“……!”
예정에 없던 돌발행동에 이엘과 헤르한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시온 공작 역시 전보다 더 크게 부릅뜬 눈으로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을 빤히 보았다.
리엘라는 그의 의심이 다 풀릴 때까지 일부러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이엘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섰다.
“두 분이 말씀 나누시는 동안 우리는 저쪽으로 가서 같이 디저트를 먹어요. 네? 어때요?”
이엘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리엘라와 눈을 마주쳤다.
리엘라는 거칠게 동요하는 그의 검은 동공에 당당히 응수하면서 눈빛으로 말했다.
‘당황하지 말아요. 흔들리지 말아요. 날 살리기로 결심했으면 끝까지 노력하라고요.’
리엘라는 일부러 이엘에게 팔짱을 꼈다.
“가요, 나랑 같이. 폐하. 저 다녀와도 되죠?”
시온 공작의 눈은 그렇게 맞닿은 두 사람의 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쨍하리만치 까맣기만 한 이엘의 마석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했다.
한참 뒤.
시온 공작은 마지못해 사실을 받아들인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가 말했다.
“이 늙은이가 숙녀분을 지루하게 만든 모양입니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폐하.”
시온 공작이 돌아서서 멀어졌다.
리엘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팔짱을 풀었고, 이엘은 리엘라에게 풀려나자마자 쏜살같이 몇 발 뒤로 물러났다.
“……공작 어른을 배웅하고 오겠습니다.”
이엘이 고개를 숙인 채 도망치듯 멀어졌다.
“폐하! 어때요? 저 잘했죠? 우리 계획이 정말 먹혔…….”
그리고 헤르한도, 쌩하니 등을 보이고 돌아서 버렸다.
*
“폐하가 삐졌어요.”
“예?”
“제가 이엘의 손을 잡고 팔짱을 꼈다고, 삐지셨어요.”
리엘라가 대답했다.
아직 연회는 한창인데 왜 혼자 대기실에 있느냐고 물었던 제스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 자리에서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그 시온 공작이라는 그 할아버지가 어디서 또 다른 무슨 마석 같은 걸 구해와서 절 다시 시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요.”
“…….”
“게다가, 사실 저보다도 더 위험한 건 폐하 아닌가요? 나만 후손인가? 자기도 후손이잖아요? 다 폐하를 위해서. 필요해서 한 일이었는데.”
제스는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리엘라의 한탄에 제 귀를 틀어막았다.
“그만하십시오.”
“뭘요?”
“제 앞에서 사랑싸움 같은 거 하지 마시라고요. 못 들어주겠으니까.”
제스가 몸서리치는 것에 리엘라는 기운 없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제스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헤르한에 대한 것이든, 어쨌든 리엘라의 원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폐하를 믿고 기다렸으면 됐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충동적인 행동이었던 건 사실이기도 했다.
“역시……. 제가 먼저 사과를 해야겠죠?”
“연애 상담 안 합니다. 전.”
제스는 냉담하게 손사래를 치고 돌아섰다.
그대로 아예 떠나버리나 했는데,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대기실로 돌아왔다.
“발코니에 가 계십시오.”
“네?”
“찬바람을 쐬면 복잡한 머릿속이 좀 환기가 될 겁니다.”
“……?”
“아. 제가 폐하를 발코니로 모시고 갈 테니까, 거기서 기다리시라고요. 거기서 찬바람 쐬면서 둘이 화해를 하시든지, 더 싸우시든지. 뭐.”
리엘라는 성질을 내고 픽 나가버리는 제스를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사과를 하러 가자.’
제스의 말대로 발코니로 나가 찬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니 구름 위를 걷듯 방방 떴던 정신이 좀 가라앉는 듯했다.
“흐아아아……!”
리엘라는 크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꼭 꿈만 같은 하루였다.
헤르한에게 청혼을 받고, 울고, 투정도 부리고.
‘이 반지를 끼고…….’
이 반지를 끼고 헤르한의 백성들 앞에 나아가 얼굴도 보이고, 연맹에서 저를 탐색하러 온 남자를 속여 내쫓기까지 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하루였어. 정신이 하나도 없네. 연맹은 이제 한동안 잠잠할까? 폐하가 시온 공작에게 미행을 붙일 거라고 하시긴 했는데.’
리엘라는 달빛에 빛나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앞으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정말 황후가 되는 건가?’
그러다가 제 풀에 피식 웃기도 했다.
‘하긴. 그 전에 폐하 마음부터 잘 풀어드려야지. 안 그러면 하루 만에 이 반지를 도로 뺏길지도 모르겠어.’
큰일들을 한 번에 치러내고 나른하게 긴장이 풀려가는 그때.
옆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세요!?”
잔뜩 긴장해서 한쪽 발코니 문을 열어젖힌 리엘라는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 놀라라.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예요?”
연회장의 시종이었다.
아마 정신없는 일터에서 도망 나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던 모양이지.
“거기 있어도 되니까 방금 내가 엄청 웃기게 하품한 건 비밀로 해줄래요?”
“…….”
“괜찮아요. 같이 바람 쐐요.”
시종은 어쩐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날 아나?’
리엘라는 생각하다가 혼자 웃어버렸다.
그야. 오늘 이 황궁 안에 모인 사람들 중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