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나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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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나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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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나의 황후
2022.05.26.
“어떻게 됐나? 폐하는?”
“2층 일반 서고에 대사님과 함께 계십니다.”
“리엘라 양을 찾았어? 두 분 다 무사하시지?”
황실 도서관 로비.
병사의 대답에 곧장 2층 계단을 향해 시동을 거는 아시온을 제스가 잡아끌었다.
“왜? 당장 폐하께 가야……!”
“진정해. 눈치도 없긴.”
“내가 뭘!?”
아시온은 일단 자기 옷을 잡아당기는 제스의 손을 뿌리친 후에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폐하가 리엘라 양과 함께.
병사들을 전부 서고 바깥으로 물리시고서.
“아…….”
머쓱한 표정으로 멈춰 선 아시온을 제스가 다시 한번 더 잡아당겼다.
“때 되면 나오시겠지?”
“폐하가 알아서 하시겠지.”
아시온은 2층 계단 위, 그 중앙에 굳게 닫힌 서고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우리 아무래도 만만찮은 황후 폐하를 맞게 생겼어.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드시네.”
안도감 섞인 한탄에 동의하면서 제스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앞으로 참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듯이.
아시온은 그런 제스를 보며 피식 웃음을 뱉었다.
제스가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이만 연회장으로 돌아가 준비나 마저 하고 있자는 뜻이었다.
*
커다란 책장이 드리운 그늘에.
사방에 책이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는 바닥 한가운데 웅크리고 앉은 리엘라는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였다.
제법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리엘라는 한 곳만을 말없이 응시했다.
헤르한이 꼭 쥔 손, 그 손가락 가운데에 붉게 빛나고 있는 영롱한 보석에.
헤르한은 그 손을 아주 소중하게 붙들고서 한동안 숨을 죽인 채 리엘라의 반응을 살폈다.
몇 번이나 주저하며 꿀렁거리던 그의 목울대는 한참 뒤에야 조심스러운 소리를 냈다.
“그래서?”
사로잡힌 듯 반지만을 보고 있던 리엘라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눈높이를 맞춘 채로 대답을 기다리는 헤르한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남자가 내 앞에서 이렇게 떤 적이 있던가.
신기하기도 하고 멍하기도 해서 헤르한을 빤히 보는데, 그가 다시 초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만히 저를 바라만 보는 리엘라의 시선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리엘라. 나의 여왕이 되어줄 건가?”
‘내가 당신의 여왕이…….’
리엘라는 다시 고개를 숙여 반지를 보았다.
반지의 보석은 리엘라의 붉은 눈동자와 꼭 같은 빛깔로 타오르면서 헤르한의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나의 자리를 찾았듯, 당신 역시 그럴 각오가 되었느냐고.
***
헤르한이 자신에게 청혼할 계획이란 걸 알아챈 직후.
리엘라는 루와 시녀들을 전부 떨치고 나와서 제스를 찾아갔다.
“여왕의 태양이네요.”
“네?”
“그 다이아몬드의 이름 말입니다. 여왕의 태양.”
아.
리엘라는 작게 탄식했다.
귀한 물건일 줄은 알았지만, 그런 대단한 이름까지 붙어있는 보석이라니, 역시나.
“저에게 다시 가져오신 이유는?”
“숙제를 끝냈어요. 제스 경이 준 물음에……. 답을 알아서요.”
“그렇습니까.”
제스는 심드렁했다.
그다지 놀라지도 않는 것을 보면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한 모양이었다.
결국 자신이 황제의 뜻을 알아채고 여기로 오리라는 것을.
리엘라는 그게 참 괘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중언부언할 것 없이 솔직한 마음을 터놓아도 된다는 것이니까.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리엘라는 다짜고짜 자신의 복잡한 속내를 꺼냈다.
“내가 폐하의 짝이 된다는 건 이 나라의 황후가 된다는 것인데……. 그건 너무 큰일이에요. 무섭고 부담스러워요. 생각도 해본 적 없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시다고요?”
제스는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있습니까? 폐하 옆에 본인이 아닌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것.”
“……!”
“폐하께서 다른 여자를 품으시고, 거기서 후사를 보시고, 평생을 함께…….”
“제, 제스 경! 말이 너무 심하잖아요!”
“제가요? 마땅히 할 말만 한 것 같은데? 리엘라 양이 황후를 할 생각이 없다면, 다른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폐하는 이제 시한부도 아니시니.”
“그…… 그렇지만…….”
리엘라는 속이 화끈거려 볼까지 뜨거워졌다.
헤르한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모습이라니. 그런 건 상상 속에서도 용납할 수 없다.
“왕관의 무게니, 정치가 어떻고 여론이 어떠니 하는 건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제가 감당해야 할…….”
“폐하께서 결심하신 이상 감당은 저희가 합니다. 방법을 고민하는 것도 저희의 일이니 리엘라 양은 리엘라 양 본인이 원하는 꿈만 그리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
리엘라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서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헤르한의 곁에서 그를 지키고 사랑하는 것.
더는 어디로도 숨지 않고. 더는 누군가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한 그의 사람으로 인정받아서, 언제나, 어디서나, 헤르한의 손을 꼭 잡고 힘을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단지 안투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라, 헤르한의 유일한 ‘사랑’으로서.
리엘라는 심호흡했다.
“그러다가 제가 정말 황후가 되어야겠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
“제가 정말 황후가 되어서 다 난장판을 치면? 허구한 날 제스 경을 불러서 이래라저래라 거들먹거릴 수도 있는데?”
“다 제 운명이죠. 그런 게 무서웠으면 지금까지 폐하 옆에 있지도 못했습니다.”
제스는 달관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어쨌든. 지금 결정하기가 정 버거우면 반지를 다시 가져가서 꼭꼭 숨겨버리시든지요. 폐하는 그 반지 없이는 당장 청혼하시진 못할 테니까.”
인심 써서 친절한 대안까지 알려주는데도 리엘라는 선 채로 곰곰이 생각만 했다.
그러다가 휙 돌아서더니, 연구실을 나가다 말고 물었다.
“이따 아시온 대장님이 여기로 오시죠?”
“예. 연회 막바지 준비로 단체 야근이라. 곧 올 겁니다. 왜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말없이 스윽 나가버리는 리엘라의 모습에 제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폐하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도망칠 생각이면 미리 말을 해 줘야 대책이라도 세울 거 아냐?’
마지막까지 미처 꺼내지 못한 계약서를 떠올리며 제스가 아쉬움의 입맛을 다시던 그때.
이번엔 아시온이 흐느적거리면서 들어섰다.
“야. 제스. 난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다. 먼저 저세상 가서 기다릴 테니……. ……어?”
힘없이 말하던 아시온은 별안간 바닥으로 푹 엎어져 소리 질렀다.
“야!”
“왜?”
“야-!”
제스는 책상 밖으로 나와서야 아시온의 ‘야’가 자신을 부르는 말이 아니라 그저 감격과 환호에 찬 울부짖음이었음을 깨달았다.
거북이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아시온이 손을 벌벌 떨면서 쳐다보고 있는 건, 제스의 책상 앞 바닥에 살포시 떨어져 있는 ‘여왕의 태양’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살았다, 나 이제 살았다, 하는 안도의 절규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아시온은 그 상태 그대로 수십 번을 허공의 신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뒤에야 벌떡 일어섰다.
“제스! 나 먼저 폐하께 간다! 너 알아서 정리하고 와!”
여왕의 태양을 낚아챈 아시온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근래 볼 수 없었던 아시온의 씩씩한 뒷모습. 그리고 그 뒷모습에 피식 웃어버리는 저 자신의 꼴을 생각하다가 제스는 문득 혀를 내둘렀다.
‘우리 벌써 적응한 건가.’
글쎄.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이젠 악마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
암담한 것 같기도. 기대되는 것 같기도.
***
“리엘라. 대답은?”
헤르한이 다시 물었다.
같은 물음이 반복될 때마다 헤르한의 푸른 동공은 더 불안하게 떨렸고 눈길은 더 집요해져 갔다.
리엘라는 꾹 물고 우느라고 빨개진 입술을 퉁명스럽게 오물거렸다.
“황제이시면서, 아무 데에서나 무릎 꿇지 말라고 했잖아요.”
“여기가 왜 아무 데나야. 네 앞인데.”
일으켜 세우려고 해도 꼼짝하지 않는 헤르한 앞에서, 리엘라의 시선은 다시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향했다.
“너무 과분해요. 이렇게 예쁜 거.”
“너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
헤르한이 몸을 더 가까이했다.
“리엘라. 넌 나에게 넘치는 존재야.”
고개를 든 리엘라는 가까이 맞댄 얼굴에서 저 대단한 보석 반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다.
바로 자신을 보는 헤르한의 눈이었다.
진짜로 과분한 건 이 반짝이는 반지가 아니라, 그의 마음.
하지만 그 과분한 것이. 너무 깊고 아득해서 과연 내가 다 껴안을 수나 있을까 싶은 그 마음이 리엘라는 욕심이 났다.
“전 세상에서 제일 어설픈 황후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되어주긴 한다는 거지?”
“…….”
“나의 황후가. 나의 반려가.”
헤르한이 반지를 낀 리엘라의 손등을 들어 그 위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내가 평생 남은 목숨을 다 바쳐 섬길 나의 주인이 되어준다는 거지?”
리엘라는 다시 입술을 꾹 물고 헤르한을 원망하듯 보았다.
헤르한은 웃고 있었다. 미워할 수도 없게.
제스의 말이 맞았다. 앞으로 닥칠 난관들은 지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헤르한이 손을 내밀어주면, 그 손을 잡으면 그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까지 왔고, 그 모든 순간은 전부 정답이었다. 헤르한이 늘 그렇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해볼게요.”
리엘라는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야 헤르한은 두 눈을 감으며 긴 호흡을 내뱉었다.
“실수해도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래.”
“황후가 왜 이따위냐고 폭동이 일어나도 전 책임 못 질…….”
아직 울음기와 떨림이 가득 깃든 말을 헤르한의 뜨거운 호흡이 도중에 덮어버렸다.
조급한 마음에 미처 다 고르지 못한 숨결이 가쁘게 얽혀들었다.
헤르한의 입술은 평소보다 더 조급했다. 더 간절했고 더 정성스러웠다.
그러다가 잠시 떨어진 그는 자신에게 와 준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벅찬 눈빛으로 리엘라를 보았다.
올곧기만 한 그 눈빛이 리엘라는 감사하다 못해 부끄러워졌다.
“화장이……. 다 망가져서 어쩌죠. 머리도 공들인 건데…….”
그래서 괜히 헤르한의 시선을 피하며 되지도 않는 걱정에 우물쭈물했는데.
“괜찮아. 어떤 모습이더라도, 넌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황후가 될 테니까.”
헤르한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며 다시 입을 맞추어 왔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은 채였다.
*
“리엘라 님! 대체 어디에 계셨……. 흐이익!”
연회장에 딸린 대기실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루는 헤르한과 함께 나타난 리엘라를 보고 기겁했다.
“혹시 우신 거예요?”
“아니에요.”
“아니긴요! 흐흑. 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폐하의 계획을 말해버리는 바람에 리엘라 님을 겁먹게 만들어서……!”
“그런 게 아니…….”
“대체 얼마나 우신 거예요. 얼마나 엉엉 우셨기에 입술 화장까지 다 번진 거예요? 흐윽!”
“…….”
리엘라는 황급히 제 입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리엘라 대신 나서준 것은 헤르한이었다.
“그래. 루. 스스로 잘못한 것을 아주 잘 알고 있군. 벌을 받을 준비는 되어있겠지?”
엄한 꾸짖음에 루는 그렁그렁 눈물을 맺으면서도 겸허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폐하. 제가 책임지고 목숨으로…….”
“책임지고 리엘라를 다시 단장해주어라. 입장까진 10분이 남았어. 할 수 있나?”
“……네?”
루의 눈이 동그랗게 떠올랐다.
당황해서 사방을 훑는 눈동자 안에 들어온 건 깍지를 낀 채로 꼭 잡은 두 사람의 손. 그리고 그 틈으로 보이는, 리엘라의 손에 끼워진 반지였다.
“두, 두 분이 그럼…….”
루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죄책감에 눈물을 매달고 있던 눈도 놀라움과 기쁨에 점차 휘둥그레져갔다.
헤르한은 루가 또 소리를 지르며 날뛸세라 선수를 쳤다.
“10분.”
“네, 네! 하, 할 수 있습니다! 해내겠습니다!”
루는 언제 울먹였냐는 듯이 힘차게 외쳤다.
헤르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리엘라가 화장을 고치는 동안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고자 함이었는데, 그런 그를 리엘라가 재빠르게 따라 나왔다.
“왜? 불안해? 같이 있어 줘?”
“아뇨. 그게 아니라…….”
머뭇거리던 리엘라가 대답 대신 내민 것은 흰 손수건이었다.
“응?”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르한 앞에서, 리엘라는 검지를 들어 제 입술과 헤르한의 입술을 번갈아 가리키며 민망하게 웅얼거렸다.
“폐하……. 입술…….”
그러고선 얼굴이 빨개진 채 후다닥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는 리엘라의 모습에 헤르한은 정신이 아찔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나의 황후.
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