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 여왕의 태양 (94/154)


#94 여왕의 태양
2022.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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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대연회를 앞둔 마지막 밤.

야근을 자처하며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앉아 있던 헤르한은 부관의 목소리에 피로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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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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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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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가지.”

헤르한이 지체 없이 발길을 향한 밀실 안에선 안경을 낀 백발의 장인이 물건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장인은 황제와 마찬가지로 고된, 그러면서도 마침내 해냈다는 뿌듯함과 자부심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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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습니다. 폐하.”

황제의 앞으로 온 장인이 허리를 굽혀 완성품을 건넸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헤르한이 요청한 대로의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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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군. 갑자기 손 봐줄 물건이 늘어서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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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 수 있어서 아주 영광스러운 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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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북쪽 숲에 작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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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장치만 해 두면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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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놈들을 따돌릴 준비가 끝났군.

헤르한이 그제야 겨우 긴장을 풀고 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자 그때를 놓치지 않고 제스가 정성스러운 잔소리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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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약속하셨죠? 자. 완성품까지 직접 확인하셨으니 이젠 진짜로 가서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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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연회장만 확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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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습니다. 마무리는 제가 할 테니까요. 폐하는 본 게임에서 활약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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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잠깐 눈 좀 붙이고 올까.”

눈 붙이려고 가는 거 맞나. 리엘라를 보러 가는 건 아니고?

제스의 예상대로였다.

침실로 돌아간 헤르한은 침대에 모로 누워서, 눈꺼풀을 닫는 대신 곤히 잠든 리엘라를 지켜보았다.

얼마 안 되는 쪽잠을 청하는 것보다 이 사랑스러운 여신을 경배하는 일이 자신에겐 더 큰 안식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계산이 맞아떨어졌다.

이 순간까지 내달리느라 지칠 대로 지쳤는데 리엘라의 옆에 몸을 눕히니 모든 긴장과 피로가 전부 풀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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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너무 정신없이 달려왔어. 리엘라. 그래도 날 이해해 줄 거지? 내가 좀 성질이 급하고, 욕심이 많은 남자더라도.’

헤르한은 잠든 리엘라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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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청혼 반지를 잃어버렸던 멍청한 남자더라도.’

헤르한이 제풀에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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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넌 변함없는 모습으로 날 받아줄 거지?’

그렇게 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

헤르한은 포근한 햇살을 이불처럼 덮고 누운 리엘라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춘 후 먼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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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따 봐. 나의 여신.’

바깥에선 꾸벅 졸다 말고 눈을 뜬 루가 후다닥 황제를 따라 나왔다.

헤르한은 뻐근한 목을 비틀면서 루에게 리엘라를 잘 준비시킬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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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 그런데, 폐하…….”

루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했지만, 결국엔 입을 열지 못했다.

헤르한은 이제부터 매듭을 지을 일에 바짝 긴장한 상태였고, 자신이 그렇게 긴장한 만큼 모든 준비가 완벽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헤르한이 루의 마음을 읽어 볼 생각을 하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만일 그때 조금 더 침착했다면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까.

결국, 불상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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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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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폐……. 폐하!”

루가 치맛단을 움켜쥐고서 대연회장을 가로질러 뛰어왔다.

연회장이 모든 세팅을 마치고 헤르한도 그의 부관들과 함께 마지막 동선을 점검하던 때였다.

막 이엘까지 불러서 ‘공작 어른’이라는 자가 언제 도착하는지, 그를 어떤 식으로 대할 것인지를 의논하던 중이었으니 일개 시녀가 뛰어들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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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리엘라 님이…….”

루가 울먹이는 소리에 논의 중이던 모두가 단번에 말을 멈추었다.

당연히 가장 크게 반응하는 건 헤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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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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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루에게 아시온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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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 지금까지 줄곧 내실에서 함께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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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 그랬는데. 히끅!”

얼마나 당황했는지 루는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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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도 입고 화장도 마치시고. 준비를 다 했거든요. 히끅! 그리고 소파에 앉아계셨는데 너무 긴장하신 것 같아서……. 그래서 차를. 히끅! 차를 가져다드리려고, 정말 잠깐 나갔다가 와 보니까…….”

헤르한은 멍했다.

꼭 며칠 전과 같은 상황이었다.

같은 장소. 같은 순간. 그때처럼 손님들의 마차가 도착하고 있고, 그때처럼 리엘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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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 당장 병사들을 전부 풀어서 주변을 수색해. 성문을 봉쇄하고. 그리고 이엘!”

힘겹게 정신을 차린 헤르한이 명령을 마침과 동시에 멱살을 잡은 이는 이엘이었다.

하지만 이엘 역시 헤르한처럼 동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굳이 속을 읽을 것까지도 없었다. 넋이 나가서 사방팔방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만 보아도, 이엘은 지금 리엘라의 실종과 전혀 상관없음이 명백했다.

헤르한은 이를 악물고 이엘을 팽개쳤다.

어쩌면 지금 속을 읽어봐야 할 것은 이엘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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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헤르한은 새끼사슴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는 루의 손목을 잡았다. 곧 아득해진 헤르한의 머릿속으로 루의 기억들이 밀려들어 왔다.

루의 말대로였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리엘라는 세상에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리엘라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가만히 앉아서 심호흡하는 모양도 참 버겁고 불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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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지? 몸이 아팠나?’

헤르한은 애가 닳는 마음에 더 이전의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다급하게 전날 밤의 기억까지 더듬은 헤르한은 마침내 리엘라를 궁지로 내몬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루에게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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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성문을 봉쇄하라고 했습니다. 방문객들의 마차도 수색할까요?”

아시온이 급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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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반드시 다시 찾을 겁니다. 시간상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

제스도 진지하게 말했다.

헤르한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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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수색은 필요 없어. 제스 말이 맞아. 멀리 가지 않았을 거다. 리엘라는 납치된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숨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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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숨어……요? 리엘라 양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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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헤르한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철렁 내려앉은 심장은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듯 속이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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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되었는데, 청혼하기도 전에 거절부터 당한 건가. 나.’

 

*

헤르한은 리엘라가 있을 만한 곳을 직접 헤집고 다녔다.

정원 앞을 지날 땐 막 황궁에 도착한 이들이 황제를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는 데도 본 체도 하지 못하고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서궁의 뜰. 중간 정원. 호수궁. 혹시 몰라 다시 내실까지.

전부 헛걸음을 한 헤르한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황실 도서관의 고(古) 문서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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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리엘라는 여길 자주 왔는데.’

아마도 후손들에 대한 정보 때문이었을 것이다.

황제가 엔릴의 후손이라는 걸 안 후. 그리고 본인이 안투의 후손이라는 것까지 안 후엔 더더욱.

리엘라는 ‘후손들’에 관해 언급된 거의 모든 책을 다 들여다보았다.

정돈되지 않은 기록이 대부분이고 전부 오래된 것들이라 읽기 쉽지 않았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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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그랬던 거겠지.’

결국 자신이 리엘라를 무리시키고 말았다는 생각에 헤르한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늘 리엘라가 있던 고(古) 문서실이 오늘따라 텅 비어 있어서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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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대체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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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오늘도 리엘라 님을 찾아오셨습니까?”

바깥 상황을 알 리 없는 사서가 공손하게 다가와 고개를 숙인 것은 그때였다.

헤르한은 그와 말을 섞을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대로 문서실을 떠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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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은 오늘은 일반 서고에 계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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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지금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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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늘은 고(古) 문서실이 아니라 이, 일반 서고에 계시…….”

헤르한은 전력을 다해 2층 일반 서고로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몇십 개나 되는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넘어서 그런 것인지, 리엘라를 되찾을 생각에 그런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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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

한 책장 앞. 바닥에 책을 잔뜩 펼쳐놓은 채로 그 틈에 옹송그리고 앉은 리엘라를 본 순간 헤르한은 맥이 풀려버렸다.

간신히 리엘라가 있는 곳까지 내달은 그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리엘라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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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헤르한의 품 안에서 리엘라의 음성은 어쩐지 힘이 없었다.

그래도, 그것조차 헤르한은 너무 감사해서 리엘라를 꽉 안은 손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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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혹시 연회가 벌써 시작했나요?”

헤르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말없이 사라졌던 거냐고.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냐고. 곧 터져 나올 듯한 걱정과 원망도 전부 속으로만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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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리엘라. 무사하니 됐어. 이제 가자. 리엘라.”

헤르한은 한참 쿵쾅거리는 가슴을 추스른 후에야 일어서서 리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리엘라가 꿈쩍 않고 버텼다.

고개도 가로저었다.

그때서야 헤르한은 리엘라를 다시 품에 안은 기쁨에 잠시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리엘라는 자신이 청혼하려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걸.

그걸 다 알고서, 스스로 여기에 도망쳐 와 있던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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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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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르겠어요. 폐하.”

힘없는 대답에 헤르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거절인가.

속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리엘라가 정 싫다면 강요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저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고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꺼이 감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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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훌륭한 황후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역시.

헤르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리엘라가 울먹이는 소리로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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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장 연회인데. 사람들이 몰려들 텐데. 제가 폐하에게 어울리는 짝으로 보여야 할 텐데.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예법을 배우긴 했지만 황가의 예법은 또 다르잖아요. 그래서 급하게 보는데, 너무 복잡하고, 봐도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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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헤르한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제야 리엘라의 주변, 사방에 어질러진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황실 예법. 사교계 예법. 연회 식순. 엘슈바이크 제국 유수의 귀족 계보도와 오늘 연회의 참석자들 명단.

헤르한의 숨이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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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황실에 누가 되면 안 되는데.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정치는 앞으로 차차 배우면 될 테지만, 당장 오늘 연회 자리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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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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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분명히 폐하에게 폐를 끼치는 게 될 텐데. 그러긴 정말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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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헤르한은 허리를 숙이며 리엘라의 고개를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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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쳤던 이유가 그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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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이요? 제가 뭘 도망쳐요?”

도망이란 말에 리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야 제대로 헤르한을 마주 보는 그 예쁜 눈에 서서히 낭패 어린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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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설마 연회가 벌써 시작해버린 거예요? 저 지각까지 해버린 거예요? 아,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은 거 아니었어요? 그 전에 인사법만이라도 빨리 복습하고 가려고 했는데……?”

결국 리엘라는 울음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다 망했다면서 너무나 서럽게 우는데, 그 울음이 이렇게 감사하게 들릴 건 뭔지.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못해 벅차기까지 할 건 대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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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리엘라.”

헤르한은 완전히 다리에 힘이 풀려 리엘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가슴팍에 주먹질하며 계속 엉엉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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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 준비할 시간은 주셔야 했잖아요. 폐하 때문에 전 역사상 제일 바보 같은 황후가 될 거라고요.”

헤르한은 힘없이 자신을 때리는 리엘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곤 다부지게 움켜쥔 리엘라의 흰 주먹을 조심스레 펼쳤다.

가느다랗고 예쁜 손가락.

그 하나하나를 매만지며 숨을 고르던 헤르한이 잠시 제 주머니에 고이 모셨던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그 안에서 붉은 빛으로 공간을 채우는 링을 꺼내었다.

그리고, 헤르한의 손으로 리엘라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많은 길을 돌고 돌아서 다시 제 주인을 찾아간, 여왕의 태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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