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신이 내어준 마지막…… 행운? 2022.05.08.
아시온은 다음날 이른 아침 황제의 내실을 찾았다.
“폐하. 지시하신 물건을 찾아왔습니다. 폐하 말씀대로 호수궁 정원 안쪽을 뒤져보니 있었…….”
“폐하께서 지시하신 물건이요?”
“허억!”
평소처럼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갔던 아시온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침실을 나오며 대답한 것은 주군이 아닌 리엘라.
‘으악. 또 깜빡했네! 두 분이 한 침실을 쓴다는 걸.’
아시온의 목덜미로 진땀이 흘렀다. 자연스럽게 황제의 침실에서 나오는 리엘라를 마주하는 것이 민망한 탓도 있었지만, 들켜선 안 될 것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탓이 더 컸다. 아시온은 당장 주군에게 대령하려던 물건을 재빠르게 뒤춤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폐하가 밤새워 뒤척이셨어요. 늦게야 겨우 잠드셔서 아직 일어나시기가 힘든가 봐요.”
“그, 그렇군요…….”
“찾아왔다는 물건은 뭔가요? 폐하가 깨시면 제가 전해드릴게요.”
“아닙니다! 됐습니다!”
아시온은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금세 리엘라의 눈치를 보며 쪼그라들었다.
“그, 급한 게 아니니 괜찮습니다. 제가 나중에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아침 일찍 달려와 놓고 이제 와서 급한 게 아니라고요? 흠?”
리엘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반짝이는 적안이 오늘따라 짓궂은 모양으로 아시온의 허리춤을 흘깃거렸다.
“이리 주세요.”
“아, 아, 안 됩니다.”
“폐하랑 저는 이제 비밀 같은 거 없게 하기로 했거든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주세요!”
“그, 그래도 안 됩니다. 이건……!”
“아시온 대장님.”
“그렇게 무섭게 부르셔도……!”
아예 팔까지 뻗으며 달려드는 리엘라 앞에 아시온은 먼지처럼 무력했다. 리엘라는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주군도 불면 날아갈세라 손등 위에 앉은 꽃잎처럼 조심스레 대하는 리엘라에게, 자신이 어찌 감히 손을 대겠는가.
‘아. 이러다가 빼앗겨서 들키면 정말……!’
“아시온!”
그때 상황을 눈치챈 헤르한이 급하게 로브를 걸치며 바깥으로 나왔다. 영락없이 리엘라에게 붙잡혀 울 지경이던 아시온에겐 한 줄기 빛과도 같은 등장이었다.
“그래. 로리엘의 약병을 가져왔다고?”
방금 잠에서 깼으면서도 헤르한의 눈은 다급함에 초롱초롱했다. 헤르한이 발휘한 기지에 아시온의 눈도 번쩍 뜨였다.
“예, 예! 맞습니다. 약병. 예. 그걸 가져왔습니다!”
“로리엘의 약병이요?”
“그래. 로리엘이 내게 독을 먹인 후 그 약병을 숨겨뒀어. 아시온에게 그것을 찾아오라고 지시했다. 로리엘의 죄를 입증할 아주 중요한 증거품이지.”
헤르한의 말을 증명하듯, 아시온이 뒷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 건넸다. 리엘라는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밀수품’의 정체에 멋쩍은 표정으로 물러났다.
“아……. 그랬군요. 그렇다고 말씀을 해주시지. 저는 또 두 분이 저 몰래 무슨 일을 꾸미시나 하고.”
리엘라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느라고 헤르한과 아시온이 동시에 뜨끔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곤란하게 해서 죄송해요. 아시온 대장님.”
“아, 아닙니다.”
아시온은 죄책감에 난감하게 웃었다. 그럴 만도 했다. 로리엘이 호수궁 정원에 숨겨놓았던 것. 그리하여 아시온이 되찾아온 것은 약병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아시온은 지금도 자신의 뒷주머니를 볼록하게 채우고 있는 것을 감추려고 엉거주춤하게 엉덩이를 뺐다. * 그날 오후, 황실 관료들과 귀족 대표들의 만장일치로 황제의 독살을 시도한 로리엘 이그드니스에 대한 처분이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이그드니스 가문의 귀족 작위 박탈. 이그드니스 가문의 가산 몰수. 가문 소유의 상단 일체도 황실 산하로 인수.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죄인 로리엘 이그드니스는 황성 광장에서 공개처형 하기로 결정되었다. 단두대가 세워지는 것은 이틀 뒤였다. 일련의 처분이 집행되기 직전. 로리엘을 포기한 그녀의 가족들은 숨겨두었던 돈다발을 들고 도주를 시도하다가 붙잡혀 끌려왔다.
“폐, 폐하! 억울합니다. 저희는 죄가 없습니다! 그 미련한 것이 그런 엄청난 짓을 벌일 거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희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부디 선처해주십시오. 평생 황가를 위해 일한 우리 이그드니스의 이름을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황제 앞에 무릎 꿇은 백작 부부가 울부짖었다. 딸의 목숨이 아니라, 제 가문의 회생을 구걸하면서. 헤르한은 그런 그들 앞에 냉담하게 나아갔다.
“딸의 허영과 탐욕을 키운 것은 그대이지 않은가.”
“폐하……. 아닙니다. 아닙…….”
“선대에 그대가 황실 공보관을 지내면서 뇌물을 받아온 것을 알고 있다. 그대가 그렇게 구걸하는 가문의 위신을 생각해 퇴직시키는 수준에서 한 번 용서해주었지. 딸이 그런 가문을 살려보겠다고 아등바등하기에 좀 더 너그럽게 봐준 것도 있었어.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처음부터 봐주면 안 되는 거였어.”
“폐하……. 흐흐흑…….”
“썩은 싹은 발견했을 때 바로 쳐냈어야 하는 건데.”
그레타를 만났을 때. 또 이엘을 만났을 때. 바로 그들을 쳐냈다면 리엘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로리엘 이그드니스의 부모와 형제자매를 포함한 일가족 전부를 천민으로 강등해서 북부 노역장으로 보내라.”
헤르한은 싸늘한 명령만을 내던지고 돌아섰다. * 리엘라는 헤르한과 벤치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앉은 채로 선선해진 바람을 맞았다. 청명한 하늘. 적당한 햇살과 향긋한 공기. 누구의 방해도 없는 고요한 정원의 한 가운데. 짐짓 ‘평화’에 가까워 보이는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
“이러면 다 끝나는 걸까요?”
헤르한의 너른 등에 리엘라가 동그란 뒤통수를 기대며 물었다. 헤르한은 대답 없이 그저 리엘라의 손을 쥐었다. 둘은 동시에 높디높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로리엘을 처형하면 다 끝나는 걸까요?”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야. 죄를 지었으니 벌을 주는 것뿐이지. 왜? 혹시 마음이 약해졌나?”
헤르한의 물음에 리엘라는 실없이 작은 웃음을 뱉었다.
“그럴 리가요. 로리엘이 폐하를 유혹하려 했다는 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이번엔 헤르한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러면 왕녀는요?”
“…….”
“로리엘은 폐하를 유혹하려 했지만, 왕녀는 폐하를 해치려고 했잖아요. 왕녀도 제대로 벌을 받아야 해요.”
“그래. 맞아.”
그렇다는 대답만 한 후에 헤르한은 줄곧 하던 고민을 이어갔다. 그레타 왕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단서가 부족했다. 마음 같아선 정말 전쟁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언제나 그놈의 ‘명분’이 문제였다.
“어쩌면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다른 방법이 있나?”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어요. 조금은 모험일 수도 있는데…….”
리엘라가 헤르한을 응시했다.
조금 떨던 붉은 눈동자는, 이내 결심을 굳힌 듯 제법 다부진 빛으로 반짝였다.
“폐하. 로리엘을 제 계획대로 한번 맡겨주세요.”
* 처형이 내일이었다. 로리엘은 오늘에서야 처형을 하루 앞둔 죄인에겐 꽤 많은 동정이 베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예컨대 제 앞에 놓인 식판 위 풍성한 ‘마지막 만찬’이라든가. 마지막 하루쯤은 햇살이 잘 드는 방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준다든가.
‘저게 아마 내 처형대…….’
하지만 창문이 있는 수감실로 이감된 것은 오히려 잔인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병영 공터에, 자신의 처형대가 차곡차곡 형태를 갖추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으니까. 이제 마지막 칼날만 끼워지면 저 처형대는 내일쯤 황성 광장의 단상 위로 옮겨질 것이었다.
‘결국 만민이 날 우러러보게 되기는 했네.’
로리엘은 이를 꽉 악물었다. 창 안으로 드는 햇살이 늘 보던 것과 똑같이 반짝여서인가. 죽기 전날인데도 불구하고 로리엘은 도무지 이 ‘목숨’이라는 게 포기가 되질 않았다.
“내일 새벽 일찍 교역단이 먼저 출발한다니까 처형대는 그 뒤에 옮기자고.”
문틈으로 병사들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정말 리오타 왕국으로 교역단이 가는 거야? 이 시국에?”
“그래. 저 시녀의 주장 빼고는 리오타의 왕녀가 그랬다는 증거가 없으니 황실도 어쩔 도리가 없지. 교역은 예정되어 있던 거니 물릴 수도 없고 말이야.”
“쯧쯧. 결국은 저 시녀가 죄다 뒤집어쓰게 됐구만.”
“내일이 처형이니 뭐. 애초에 왕녀가 직접 나서서 자백하는 게 아니고서야 누가 그 말을 믿겠어?”
로리엘은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밖으로 최대한 목을 빼고 보니 과연 병영 담벼락 너머 저 안쪽에 행군을 준비 중인 수십 대의 마차가 얼핏 보였다.
‘저게 리오타 왕국으로 가는 교역 마차……!’
그날 밤. 모두가 잠든 듯 조용할 때, 로리엘은 슬그머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낮에 창밖을 볼 때 창틀의 경칩이 녹슬어 느슨해진 것을 보았었다. 그 부분을 잡고 몇 번 힘을 주어 덜컥이니 과연 창틀이 빠졌다.
‘……정말 됐어!’
로리엘은 쇳소리가 날세라 조마조마한 가슴을 부여잡았다. 창틀을 빼낸 뒤 밖을 내다보니 바로 아래에 짚더미가 쌓여있었다. 로리엘은 심호흡한 뒤에 2층 창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인적이 없이 그림자가 짙은 길만을 가로질러 로리엘이 미친 듯이 뛰어간 곳은 곧 리오타로 출발할 마차들이 대기 중인 뜰이었다. 몸에 쇠사슬을 감은 채로 바들바들 떨며 마차들을 뒤지던 로리엘은 마침 맨 끝쪽 마차의 짐칸 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로리엘을 태운 마차 행렬은 그렇게, 예정되어 있던 대로, 다음날 이른 새벽 리오타 왕국을 향해 출발했다.
“진짜로 갔군요.”
“정말. 진짜로 갔네요.”
제스와 아시온이 차례로 말했다. 리엘라는 어깨를 으쓱했고,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제 옆구리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황궁 뜰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망루 위. 로리엘의 허접한 탈출극을 전부 지켜본 네 사람의 그림자가 동터오는 새벽빛에 길게 늘어졌다.
“정말 저 시녀가 리엘라 양의 생각대로 움직일 줄은 몰랐습니다. 참 웃깁니다. 자기가 왕녀를 찾아가서 뭘 어쩔 수 있다고?”
“애원하든 협박을 하든, 물고 늘어지겠죠. 어쨌든 고분고분 혼자 죽으려 하진 않을 거예요.”
리엘라는 제스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시온. 병사들에겐 잘 일러두었지?”
“예. 폐하. 모른 척 잘 감시하다가 두 사람이 만나는 때에 결정적인 증거를 잡으라고요. 혹시 그 전에 일이 틀어지거든 그땐 로리엘을 즉결처분하라 했습니다.”
리엘라는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빤히 보았다. 로리엘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아직 잡고 늘어질 구석이 있다는데 그걸 그냥 놓칠 여자는 아니었다.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 외에 복잡한 계산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왜 자신이 처형 하루 전날 창문이 있는 방으로 이감된 것인지, 왜 그 2층 방 창문 아래에 뛰어내리기 좋게 푹신한 짚더미가 깔려 있었는지도 알아채지 못했겠지. 마차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 내내 흔한 경비병 하나 없었던 것도. 하필 수십 개의 마차 중 딱 한 개의 마차 짐칸이 열려 있었던 것도. 로리엘은 전부 신이 자신에게 내어준 마지막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국까지 무사히 도착하려면 행운이 더 필요할 거야.”
그때, 리엘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헤르한이 말을 덧붙였다.
“행운이 더 필요하다고요? 어떤 행운이요?”
리엘라의 물음에 대답을 대신한 건 아시온이었다.
“저 마차 안에서 잘 버티고 살아남을 행운일걸요. 아마?”
“…….”
“그 시녀. 부디 비위가 좋은 편이어야 할 텐데?”
리엘라는 입을 쩍 벌렸다.
“폐하. 로리엘이 탄 짐칸 안에 무얼 넣어두신 건가요?”
“상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리엘라.”
헤르한은 리엘라에게 한번 빙긋 웃어주고는 리엘라가 ‘짐칸을 채운 것의 정체’에 정신이 팔린 사이 고갯짓으로 아시온을 슬쩍 불러냈다.
“아시온. 지금 줘.”
“예?”
“반지 말이다. 내내 네가 갖고 다녔지?”
“아. 예!”
“나도 정신이 없었군. 앞으로도 리엘라와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차라리 지금 받아두는 게 낫겠어.”
“예. 알겠습니다. 반지는 여기 있…….”
“…….”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