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네가 나의 주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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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네가 나의 주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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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네가 나의 주인이야
2022.05.05.
“안 되겠어. 리엘라 양을 불러올게.”
헤르한이 눈을 번쩍 뜬 것은 아시온이 리엘라의 이름을 말했을 때였다.
머릿속이 하얘진 채로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제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팔을 붙들고 있었고, 아시온은 막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중이었다.
이엘은 헤르한의 발밑에 곤죽이 된 상태로 엎어져 있었다.
헤르한은 숨을 들이켜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아시온. 그대로 있어.”
이성이 돌아온 주군의 목소리에 문을 박차고 나가던 아시온이 몸을 멈추었다.
제스도 겨우 몸의 긴장을 풀고 헤르한의 팔을 놓았다.
“리엘라를 부르지 마라.”
앞으로 이엘 바이스 앞에 리엘라를 내보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니까.
“폐하. 진정제를…….”
“필요 없다.”
“하지만…….”
“괜찮아. 발작이 아니니까.”
그저 순수한 분노에 잠시 눈이 멀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여쭈어도 됩니까?”
조심스러운 제스의 물음에도 헤르한은 그저 입을 꾹 닫았다.
헤르한의 능력은 그저 기억을 읽는 것뿐 아니라 마치 그 대상이 된 것처럼 그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느끼는 것이었다.
이 힘이 때때로 버거운 것은 그래서였다.
지금도 그랬다. 다른 사내가 리엘라를 가슴 깊이 묻는 마음 따위. 헤르한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후손을 노리러 온 도둑놈이기만 했으면 좋았잖아.’
네 마음이 그냥 같잖은 욕심이었다면.
로리엘이 리엘라를 시기하고 날 차지하려 했던 것처럼 그저 그런 천박한 탐욕, 정도였다면. 그러면 참 편했을 텐데.
헤르한은 싸늘한 눈으로 미동도 하지 않는 이엘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스. 이엘 바이스를 살펴라.”
제스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고 이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이엘의 코 밑에 손을 갖다 대보는 것이었다.
“숨은 붙어 있습니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지긋지긋하다고 몸서리쳐야 할지.
헤르한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계속 이엘을 응시했다.
“턱이 나갔고 의식도 없습니다. 당장 약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만.”
진찰을 마친 제스는 제 주군 만큼이나 싸늘한 눈빛으로 일어섰다.
“얼음물에 담가서 깨울까요? 아니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방법도 있습니다.”
“아니.”
이엘이 연맹에 리엘라를 고발하지는 않았지만 연맹은 이미 리엘라를 강하게 의심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엘은 리엘라의 보좌관이고, 리엘라를 납치하려다가 체포된 것이니까.
당장 이엘이 죽으면 리엘라가 위험해진다는 건 그 말이었다.
황실이 이엘을 처형하면, 그건 연맹에 리엘라가 바로 이엘이 찾던 안투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치료해. 목숨만 붙어 있도록.”
그리고 네 마음은 평생 어디에도 꺼내지 말고 괴로워하길. 계속 그렇게 썩어 문드러지도록.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다.”
“본궁까지 모시겠습니다.”
“됐어.”
아시온을 뿌리치자마자 이번엔 또 제스가 주군에게 따라붙었다.
“괜찮다니까.”
“글쎄요. 그대로 리엘라 양에게 돌아가시려고요?”
제스가 가방을 가져와 연고와 붕대를 꺼냈다.
헤르한은 그제야 제 오른손 또한 살갗이 터지고 뼈마디가 으스러져 있음을 깨달았다.
*
“괜찮아요. 곧 오실 거예요. 아시온 대장님께서 조사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사람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루가 달래주는 말에도 리엘라의 초조함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내실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어? 폐하께서……?”
안으로 들어선 것은 소식을 전하러 온 병사가 아니라 헤르한.
애틋함과 반가움에 벌떡 일어나며 미소 지었던 리엘라가 서서히 입꼬리를 내렸다.
헤르한이 엉망이었다. 차림새도 깔끔하고 머리도 단정했지만 그의 마음이, 눈빛이, 너덜너덜했다.
“전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불러주세요.”
루가 무릎을 굽혀 인사하고 물러나는데도 헤르한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리엘라는 단번에 헤르한에게 달려갔다.
“폐하. 오셨어요?”
헤르한은 리엘라의 음성에야 초점을 되찾았다.
“고생하셨어요. 힘들진 않으세요?”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이엘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인지. 이엘을 조종하던 자들은 누구였는지. 그자들이 어떻게, 어디까지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도 리엘라는 그런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저 헤르한을 살필 뿐이었다.
“폐하. 손이 왜 이래요? 왜 붕대를 감고 계세요? 아까는 괜찮았는데. 방금 다치신 거예요?”
리엘라는 헤르한의 상처를 발견하고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김없이 참 사랑스러워서, 헤르한은 저도 모르게 다른 한 손으로 리엘라의 볼을 감쌌다가 그대로 정지했다.
문득 한 장면이 떠올라서였다.
아까 보았던 이엘의 기억 속, 손을 다친 이엘에게 약을 발라주면서 그를 걱정하던 리엘라의 모습.
“…….”
탁!
소리가 나도록 헤르한은 리엘라에게 잡힌 제 손을 빼냈다.
리엘라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면서도 헤르한의 가슴 속에서 치미는 부아는 가라앉질 않았다.
“내 손이 이럴 정도면 이엘은 어떻겠어.”
헤르한은 괜한 원망에 사납게 말했다.
“이엘 경을……. 직접 때리신 거예요?”
“그래. 그러면 안 되는 거였나? 아시온에게 내가 이엘을 해치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며?”
“대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던가요?”
‘아니. 아시온의 기억을 읽었지.’
그건 최근에 생긴 강박이었다.
그레타를, 로리엘을, 이엘을 곁에 두고도 방심해서 리엘라를 곤경에 빠트렸던 것이 트라우마로 남기라도 한 것인지.
헤르한은 손에 닿는 모든 이들의 기억을 전부 읽었다. 깊은 구석 어디든, 리엘라와 조금이라도 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면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광증이었다.
“폐하. 전 이엘 경을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알고 있었다. 아시온의 기억을 통해 보았으니까. 리엘라는 이엘이 아니라, 이엘 때문에 괴로워할 자신을 걱정한 것임을.
그런데도 어쩐지 곱게 말이 나가지 않았다.
지금처럼 똑같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이엘을 걱정하고 보듬어준, 그래서 결국 이엘이 사랑에 빠지도록 만든 리엘라가 원망스러워서.
‘네 잘못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분명히 아는데.’
자신이 이다지도 무논리적이고 모순적인 인간이었던가.
헤르한은 괴로운 마음에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쉬고 싶다.”
헤르한이 말하니 리엘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씻고 침실로 가서…….”
“오늘은 혼자 쉬고 싶어.”
헤르한은 리엘라에게서 등을 돌렸다.
차마 상처받은 리엘라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뒤돌았는데, 뒤를 돌아도 그녀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네. 알겠어요. 폐하.”
애써 태연한 척 밝은 대답이었지만 목소리 끝이 잘게 떨렸다.
북받치는 감정을 꾹 억눌러 참은 듯이.
“전 오늘 서재 옆 침실에서 잘게요. 걱정 말고 푹 쉬세요.”
*
당연히 헤르한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잠은커녕 생각을 진정시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로리엘에 대한 처분도 고민되고 이엘과 연맹을 대적해야 하는 문제도 골치 아팠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리엘라에 대한 걱정과 후회였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리엘라를 원망하나.’
리엘라가 이엘에게 조금 웃어주었다고 해서?
마지막에 리엘라는 이엘 앞에서 울부짖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건 당신이 아니라 황제라면서, 자신을 황제의 품에 다시 되돌려 놓으라고 그를 윽박질렀다.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면서까지 버티던 그 모습.
그 간절함과 진심, 모든 것을 다 아는데.
‘내가 또 얼간이처럼 굴었어.’
헤르한은 억지로 눕혔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당장 리엘라에게로 향하려 문을 박차고 나간 그는 한 발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리엘…….”
옆방에서 자겠다던 리엘라가, 의자 하나를 헤르한의 침실 문 바로 앞에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옹송그리고 있었다.
두 무릎을 끌어안고 머리만 벽에 겨우 기댄 채 잠든 모습에 헤르한의 맥이 탁 풀렸다.
헤르한은 주저앉듯이, 두 무릎을 꿇고 리엘라의 앞에 앉았다.
헤르한은 그 상태로 한참 동안 말없이 리엘라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꼭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속죄하는 어린 죄인처럼. 몇 번이나 울컥 치미는 후회와 죄책감과 또 감사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덜름한 치맛단 아래로 리엘라의 새하얀 발등이 보였다.
헤르한은 그 순백의 살결 위에 입을 맞추었다.
리엘라가 움찔거리며 눈을 뜬 건 그때였다.
“폐하? 왜 거기서 그러고…….”
“…….”
“제가 필요하면 깨우시지.”
“그래서 여기서 그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었어?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바로 와주려고?”
리엘라는 헤르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한은 허탈할 정도로 미안한 마음에 그냥 웃어버렸다.
오늘 눈을 뜬 후로 처음 뱉는 웃음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으면 해. 다 들을게.”
“그럼 일단 일어나서…….”
“아니. 이러고 들을게.”
헤르한은 리엘라의 앞에 무릎 꿇은 자세를 고수했다.
“이러고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릎을 꿇으시면 어떡해요. 황제 폐하시잖아요.”
“맞아. 네 고마움도 모르고 성질이나 부리는, 아주 못돼먹고 철없는 황제지.”
그래도 리엘라는 한동안 표정을 풀지 않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손. 얼마나 다치신 건데요.”
“조금 까지고 멍들었어. 부러지거나 한 건 아냐.”
“치료는 제대로 하신 거죠?”
“그래. 돌팔이 제스가.”
“조사는 다 하셨어요?”
“다 했지.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다 알아버려서 좀 짜증이 났어.”
“그렇다고 저를 혼자 두시면 어떡해요.”
“…….”
“그렇다고 저보고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안 그러기로 했잖아요.”
리엘라의 나긋한 원망에 헤르한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폐하는, 자기는 나보고 떠나지도 말고 미워도 옆에서 미워하라고 그랬으면서. 왜 나한테는 그래요. 그러는 게 어디 있어요. 황제면 다예요?”
리엘라의 코끝이 붉어졌다. 예쁜 눈시울에도 반짝이는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헤르한은 깨달았다. 제일 괴로운 건 바로 이것이었음을.
다른 사내가 리엘라를 탐낸다든가, 리엘라가 그들에게 웃어준다든가, 하는 것보다.
리엘라가 마음 아파 우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 헤르한은 또 자기를 궁지로 몰았다.
“미안해. 정말로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저 혼자 두지 마세요. 이젠 폐하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그냥 제가 못 버티겠어요.”
“…….”
“이젠 폐하 없이 혼자 못 자겠단 말이에요.”
헤르한은 그 말에 대답하듯 리엘라의 발등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더 몸을 숙여서 매끄러운 종아리에도 살포시 입술을 얹었다.
“알겠어. 앞으로 네가 하는 말은 다 들을 거야. 리엘라.”
헤르한이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펴고 선 그는 상체를 더욱 굽혀서 리엘라의 손등에, 어깨에, 그리고 가슴 언저리에 입을 맞추었다.
리엘라의 목덜미엔 상처가 막 아물어 새살이 뭉쳐 있었다.
헤르한은 그 위에도 입을 맞추며 호흡을 불어넣었다.
뜨거운 숨결에 리엘라의 잇새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헤르한은 리엘라의 목덜미에서 떨어져 나와 파르르 떨리는 그 입술을 부드럽게 베어 물었다. 처음 서로를 탐색하듯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헤르한은 도톰한 살결을 한참 머금고 부드럽게 쓸었다.
살짝 벌어진 리엘라의 입술 틈에선 달콤한 숨이 새어 나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 들어간 숨결이 서로 뒤섞이며 깊이 얽혔다.
“네가 나의 주인이야.”
인정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자신이 리엘라를 가진 것이 아니라, 리엘라가 제 주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