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감히 리엘라를 사랑했어
(88/154)
88 감히 리엘라를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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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감히 리엘라를 사랑했어
2022.05.01.
다음날, 로리엘을 문초한 후 몸을 회복하기가 무섭게 헤르한은 또다시 병영 수감실을 찾았다.
아직 로리엘 보다도 더 큰 산이 남아 있으니까.
“오늘은 더더욱 안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시온은 미안한 표정으로 병영까지 온 리엘라의 앞을 막고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리엘라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보다는 이걸 폐하께 전해주셨으면 해서요.”
“무엇입니까?”
“폐하께 드리면……. 이따가 알게 되실 거예요.”
아시온이 펼친 손에 리엘라가 건넨 은빛 체인이 사르락 감겼다. 체인 끝에 매달린 수정은 여전히 타는 듯한 붉은 색이었다.
이제 곧 자신이 멀어질수록 옅어질 그 빛을 물끄러미 보다가, 리엘라는 고개를 들었다.
“본궁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을게요.”
“예. 조사가 끝나는 즉시 사람을 보내 알려드리겠습니다.”
공손히 돌아서는 듯하던 리엘라는 고작 세 발 만에 다시 뛰어왔다.
다시 아시온의 앞으로 달려왔을 때 리엘라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절박해져 있었다.
“대장님. 저희 폐하를 잘…….”
걱정이 북받쳤는지 차마 말을 잘 잇지 못하는 리엘라를 향해 아시온이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폐하는 제가 잘 지키겠습니다.”
*
폐하는 잘 맡을 테니 걱정 마라, 그렇게 큰소리를 떵떵 쳤지만 사실 아시온은 자신이 없었다.
로리엘도 하마터면 죽일 뻔했던 주군이 과연 이엘 앞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준비는?”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수감실 안에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은 전부 치웠습니다.”
아시온은 그것으로도 부족해, 붙박이를 제외한 테이블과 의자도 모두 방 밖으로 빼내도록 지시했다.
제스는 아까부터 언짢은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였다. 아시온의 행동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 있나? 폐하께서 죽이시겠다면 그렇게 하시게 둬.”
“누가 저자가 예뻐서 이래?”
아시온은 심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전에 이엘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전 죽으면 안 됩니다.”
“뭐라고?”
“몸 어디 한 쪽을 잘라도 괜찮고 살을 불로 지져도 좋습니다. 대신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해주십시오.”
악을 쓰면서 제 혐의를 부인하던 로리엘과 달리 이엘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조사에도 협조적이었다.
이엘은 묻는 말에만 착실히 대답하며 자기변명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어느 순간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저런 부탁을 해오는 것이다.
으레 죄인들이 하는 목숨 구걸 치곤 어쩐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상한 부탁이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이제야 네 목숨이 아까운 줄 알겠어?”
“제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그러면. 남겨진 가족들 때문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인 가족 얘기에도 이엘은 그 순간에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중요한 다른 이유가 있나?’
오히려 동요하는 아시온 앞에 이엘이 낸 대답은 전혀 예상도 못 한 것이었다.
“제가 이대로 사라져버리면 대사님이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절 죽이시더라도, 당장은 안 됩니다.”
‘도대체 무슨 사정인지……. 전에는 자기한텐 폐하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번엔 폐하께 자기 기억을 보여드리겠다고 하질 않나…….’
수감실 안으로 헤르한이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로리엘을 문초한 후 하루가 지났는데도 헤르한은 여전히 격노에 굳은 상태였다. 어제 리엘라가 진정시킨 것이 아니었다면 다시 움직이지도 못했을 정도로.
아시온과 제스는 동시에 큰 숨을 들이켰다.
평화롭게 웃으면서 주군에게 덤비고 놀리기도 하던 날들이 꼭 농담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폐하. 오셨습니까. 이엘 바이스는 저 안에 있습니다.”
헤르한의 얼굴에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시온은 일부러 더 호들갑을 떨며 주군에게 다가갔다.
“전에 명령하셨던 대로 거동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제가 혼쭐을 내주었…….”
그러나 헤르한은 말을 듣지도 않고 아시온을 그냥 지나쳐 나아갔다.
곧장 격리실의 문을 연 그는 주저 없이 이엘의 목을 쥐고 들어 올려서 벽에 세게 밀어붙였다.
‘쿵-!’
이엘의 몸이 내다 꽂힌 벽에서 시커먼 먼지가 피어올랐다. 두꺼운 골조의 격리실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했다.
“폐하!”
창백해져서 달려드는 아시온을 제스가 막았다.
이엘을 죽이면 안 된다는 말은 이미 헤르한에게도 전했다. 그러니 주군을 믿자는 것이었다.
“네가 먼저 날 친히 불렀다고. 그건 내 손에 죽겠다는 뜻이겠지?”
헤르한의 목소리는 살을 엘 듯 싸늘했다.
이엘은 두껍게 부어오른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검붉은 피가 잔뜩 엉겨 붙은 입술은 평소보다 더 창백한 그의 피부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언젠가 폐하 손에 죽겠습니다.”
느리지만 결연한 대답에 헤르한은 비식거리며 맹수처럼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헤르한의 가슴 속에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뜨끈한 분노가 목구멍을 꽉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이 자를 죽이면 안 된다고. 그러면 리엘라가 위험해진다고.
헤르한은 믿지 않았다. 로리엘이 그랬듯, 이엘도 살기 위해 억지를 쓰며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너 역시 어서 너의 밑천을 드러내라고.
그러면 나는 그 즉시 네 목을 비틀어버릴 거라고.
헤르한은 그 다짐을 실행에 옮길 순간만을 노리며 이엘을 죽일 듯이 직시했다.
“연맹의 부활을 도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꽤 오래전부터 신전 몰래 후손들을 찾아다니면서 세력을 키우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엘이 드러낸 것은 그저 그런 밑천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여기 이 황실 안에 안투의 후손이 살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얼어붙었던 호수가 쩍쩍 갈라지듯, 크게 부릅뜬 헤르한의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내 악물려 있던 입도 절로 벌어졌다.
“너를 여기로 보낸 자들이 그들이라는 건가?”
서슬이 퍼런 헤르한의 눈동자와 이엘의 새까만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이엘은 온몸이 넝마가 되도록 헤졌으면서도 눈빛만은 강렬했다.
“안투의 후손을 찾아서 데려와라.”
“…….”
“그게 제가 받은 지령이었습니다.”
몇 발 뒤에서 대화를 듣는 제스와 아시온도 충격에 휩싸였다.
다른 건 다 자백하면서, 자신의 배후에 관해서만은 황제에게 직접 고하겠다며 이엘이 때를 기다렸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전쟁 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줄 알았던 연맹이 부활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그 연맹에서 황제와 리엘라를 턱 끝까지 쫓아왔다는 것도.
다른 조사관에게는 절대 할 수 없는 얘기였다.
이엘을 잡고 있던 헤르한이 스르륵 손을 놓은 것은 그때였다.
헤르한이 주먹을 풀자마자 이엘은 벽에 기댄 채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팔다리가 성치 않아서 그는 혼자서는 제대로 설 수도 없는 몸이었다.
이엘이 바닥에 주저앉으면서 피어오른 먼지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헤르한은 뒤를 돈 채로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이엘에게 다가섰다.
“리엘라가 안투의 후손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고했나?”
이엘이 뜨거운 신음을 토하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감히 황제를 향해 눈을 치뜨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이 괘씸하다 욕할 여유는 없었다.
헤르한은 그저 이엘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에 숨통을 꽉 메웠던 한숨을 깊게 토해냈다가, 다시 눈을 사납게 떴다.
“지금 그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지?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보고해. 그렇지 않으면……!”
몸을 숙여 다시 이엘의 턱을 틀어쥔 순간, 헤르한은 그대로 정지했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번쩍거렸다.
“……!”
눈앞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환해지면서 보이는 것은 푸른 호수궁의 집무실.
이엘의 기억이었다.
“직접 보십시오.”
이엘의 말에 헤르한은 다시 눈앞의 시야를 되찾았다.
“네겐 내 힘이 통하지 않는다더니.”
“결계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결계가 없습니다.”
“그 잘난 결계를 어쨌는데?”
“뺏겼습니다. 대사님에게.”
헤르한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이엘의 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이 더 강하게 들어갔다.
감히 그 입에 리엘라를 담다니.
헤르한의 손가락이 그대로 살갗을 뚫고 성대를 짓이길 듯한데도 이엘은 한 번씩 헐떡이며 경련을 할 뿐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헤르한은 이엘의 모든 기억을 읽었다.
이엘 바이스의 부친은 연맹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작전을 하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었다.
연맹은 가장을 잃은 그의 가족을 후원했고, 이엘을 수재로 키워냈다. 목적은 당연히 부친이 못다 이룬 과제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이엘이 황궁에 들어온 뒤로 그들의 협박은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가족을 위협하면서까지 후손을 데려올 것을 종용했지만 이엘은 리엘라의 정체를 알았으면서도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리엘라를 고발하지 않았다.
‘대체 왜?’
헤르한이 의문을 품은 그때.
이엘의 기억이 처음에 잠깐 보았던 호수궁 집무실에서부터 다시 이어졌다.
“자. 이엘 경이 가르쳐준 대로 썼어요. 공문서 같은 건 처음이라 너무 어려워서……. 그래도 이번엔 제대로 한 것 같아요. 어때요? 이번엔 통과예요?”
이엘의 기억 속, 리엘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빛이 화사하게 드는 집무실. 상아색 책상에 앉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이엘을 바라보다가 미소 짓는 그녀는 꼭 햇살 같았다.
“저는 좋았어요. 이엘 경이 엄격한 스승이라서.”
밤. 지친 마음을 어르는 다정한 모습.
“다행이에요! 이엘 경이 누명을 쓰고 벌을 받게 될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눈꼬리를 늘어트리고 마음을 졸이는 모습.
“이엘 경. 위험한 일 하고 다니는 거 아니죠? 그러지 말아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가까이 다가서서 엄하게 꾸짖는 모습까지.
이엘의 마음속을 가득 메운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리엘라였다.
“돌아가야겠어요. 폐하에겐 내가 필요한 거잖아요. 폐하는 나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날 폐하의 곁으로 돌려놔요. 당장 폐하에게 보내줘요.”
결국 제 목 아래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들이댄 채로 절박하게 우는 리엘라를 지켜보면서, 헤르한은 이엘의 모든 감정까지 제 것처럼 고스란히 읽었다.
리엘라 앞에서 그가 느꼈던 무수한 혼란. 망설임. 절망.
그 복잡한 실타래의 맨 끝, 도저히 거둘 수가 없어서 가슴 깊이 꾹 삼켜버린 어떤 감정까지.
헤르한의 가슴속에서 이엘이 품은 마음만큼이나 강렬한 분노가 치솟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이성이 전부 날아가고, 헤르한에게 남은 생각은 그저 감히 제 것을 눈독 들인 자에 대한 경멸과 노여움뿐이었다.
‘네가 감히.’
헤르한은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불끈 쥔 주먹을 그대로 이엘의 안면에 내리꽂았다.
빠악-!
“폐하!”
뼈가 뭉개지는 소리가 났다. 이엘의 턱이 나간 것인지 헤르한의 주먹이 으스러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엘은 한참이나 뒤로 날아갔고, 체중을 전부 실어 주먹을 친 헤르한도 앞으로 넘어졌다.
헤르한은 엎어지기가 무섭게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초점이 먼 채로 다시 이엘에게 달려들려는 그를, 아시온과 제스가 양쪽에서 붙잡았다.
“폐하! 진정하십시오. 폐하!”
“어떻게 된 겁니까? 이엘이 거짓말을 했습니까? 연맹에 리엘라 양의 정체를 알린 겁니까? 예?”
아니.
이 자식이 감히 리엘라를 사랑했어.
입에 담기도 가증스럽고 괘씸한 그의 진심에, 헤르한은 피가 나도록 이를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