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 폐하의 처형대 (87/154)


#87 폐하의 처형대
2022.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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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폐하. 지금 처리하겠습니다.”

제스가 제 가방 안에서 의료용 메스를 꺼내 들었다. 날카롭게 번뜩이는 칼날이 눈에 들어오자 로리엘은 기겁하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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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악! 아…… 안 돼. 안 돼요. 제발. 살려주세요. 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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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가만히 있어요. 그렇게 움직이다가 다른 데까지 잘려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로리엘이 눈물을 펑펑 쏟으며 볼썽사납게 발버둥을 쳤다.

덜컥덜컥. 쿵. 끼이익.

로리엘이 묶인 의자 다리가 바닥을 박차고 질질 끄는 소리가 거슬려서 헤르한은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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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제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로리엘에게 한 가지만 묻지.”

그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린 신호에 제스는 한발 뒤로 물러나 메스를 내려놓았다.

로리엘은 머리끝까지 뻗친 두려움만큼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무엇을 묻든 전부 순순히 대답하리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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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엘. ‘여왕의 태양’을 어디에 숨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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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예상했던 독약의 출처나 뒷배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질문.

미리 답변과 알리바이를 준비하지 못한 만큼 로리엘의 머리는 멍해졌다.

가뜩이나 제스가 퍼부은 약물들로 인해 생각의 수준이 천치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린 로리엘이었다.

그런 로리엘이 그나마 떠올릴 수 있는 건, 그저 자기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내야 한다는 절박함뿐이었다.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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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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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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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릅니다, 제가 훔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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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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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에요. 저는 몰라요! 저는 보석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폐하!”

헤르한은 질린다는 듯이 물러났다.

다 알고 있으니 순순히 자백하라는 협박을 할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여자에게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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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더 길들여놨어야 했는데. 잠시 밖에서 쉬십시오. 정리한 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제스는 자신의 가방 안에서 새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빠드득,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아까 내려놓았던 메스를 다시 쥐었다.

로리엘은 덜덜 떨며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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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정말 혀를 자르려고? 그, 그러지 말아요, 난 묻는 말에 잘 대답했는데 왜……! 폐하……. 폐하!”

그러는 동안 헤르한은 미련 없이 시리게 물러나고 있었다.

로리엘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붙들고 윽박지르기라도 하지,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다짜고짜!

더는 뭔가를 계산할 겨를도 없었다.

로리엘은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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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왕녀가 시킨 짓이에요!”

잠시 침묵이 일었다.

제스는 메스를 든 채로 그 자리에 멈추었고, 내내 팔짱을 끼고서 문을 지키던 아시온도 경악한 표정으로 동요했다.

모두가 숨을 크게 들이켠 채로 굳어버린 가운데, 오로지 헤르한만이 걸음을 돌이켜 로리엘 앞에 와서 섰다.

다각. 다각.

로리엘에겐 다가오는 구둣발 소리 하나하나가 자신이 선 살얼음판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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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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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왕녀가……. 그레타 왕녀가…….”

로리엘은 바들바들 떨면서 직감했다.

이제 자신이 살길은 이것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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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왕녀가 다 시킨 짓이에요. 처……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리엘라 님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리라고 시킨 것도 왕녀였고 이엘 보좌관을 부추기라고 시킨 것도 왕녀였어요! 그, 그래요. 그 여잔 처음부터 리엘라 님에게 악감정을 품고 제게 접근했습니다. 제게 독약을 준 것도 왕녀예요. 저에게 그걸 폐하께 먹이라고 했습니다!”

로리엘은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계속 자기 항변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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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무것도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전 그저 리엘라 님을 존경하는 시녀였을 뿐입니다. 다 왕녀가 시킨 거예요. 다 그레타 왕녀가…….”

먹혔나.

먹힌 것 같다.

그런 생각에 안심하면서 로리엘은 더 펑펑 울었다. 눈물은 많이 나올수록 좋았다.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황제는 로리엘의 코앞이었다.

까딱하면 그녀의 머리통을 깨부수기라도 할 듯이 험악한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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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에 거짓이 있을 경우 어떻게 될지 알고 있겠지?”

로리엘은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참수겠지.

하지만 황제가 그걸 알아낼 길은 없다. 왕녀와는 늘 단둘이서 은밀히 만났고, 증거는 전부 다 처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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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그레타 왕녀가 저에게 독약을 주었어요. 이엘 보좌관을 꾀어내어 리엘라 님을 납치하게 만든 것도 왕녀의 짓이에요.”

그때였다.

로리엘의 앞에 선 황제가 서서히 손을 뻗더니 로리엘의 손목을 잡았다.

로리엘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크게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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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손을……. 폐하가 내 손을 잡아주셨어……. 폐하가 드디어 나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한층 더 거센 울음이 로리엘의 목구멍을 타고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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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끅!”

이제 살았다, 난 이제 살았다.

마침내 제 목숨을 구한 로리엘이 환희에 몸을 떨며 흐느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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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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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 예, 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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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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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리엘의 손목을 쥔 황제가 그 자세 그대로 시퍼런 눈을 부릅뜨고 로리엘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로리엘의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로리엘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황제는, 이 남자는, 이제 모든 진실을 다 안다는 것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몰라도, 로리엘은 이미 제 영혼이 통째로 이 남자에게 꿰뚫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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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 폐하. 아닙니다. 저는, 그러니까 저는…….”

이제 로리엘은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영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려서, 황제에게 틀어 잡힌 손이라도 빼내려고 발버둥 칠 뿐이었다.

으드득. 힘줄이 거세게 불거진 헤르한의 주먹 안에서 로리엘의 손목이 비틀렸다.

영혼을 놓아버린 것은 헤르한도 마찬가지였다.

로리엘의 기억 속에서 그녀의 모든 만행을 지켜본 헤르한은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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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윽, 컥……, 헉, 커억!”

로리엘의 손목을 으스러뜨린 손이 이제는 그녀의 목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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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억! 전 정말 독약의 정체를 몰……. 약을 준 건 와……. 왕……. 끄억!”

그 와중에도 치졸한 변명을 이어가던 로리엘은 이제 얼굴이 푸르러져서 꼴깍꼴깍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대로 허무하게 로리엘의 숨이 끊어져 버리려는 때, 아시온과 제스가 헤르한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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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폐하의 손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제가 대신하겠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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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정말 왕녀가 연루되어 있다면 아직 이 여자를 죽이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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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한은 듣지 못했다.

초점 없는 동공을 사납게 흔들며 이성을 잃은 헤르한을, 아시온이 겨우 끌어냈다.

그런 주군을 제스가 따라 나갔다.

바닥으로 축 늘어져 버린 로리엘을 챙기는 사람은 없었다.

*

로리엘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다시 의자에 꽉 묶인 채였다.

조사관들은 주변을 정리한답시고 몇 번 밀실 안을 오갈 뿐 로리엘에게 별다른 말을 묻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느냐, 약은 어디서 났느냐, 네 배후가 누구냐, 지겹게 캐묻던 것들이 이젠 모두 관심 밖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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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봐요…….”

모래 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소리로 겨우 건넨 물음엔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짧은 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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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정해지면 알려줄게.”

로리엘은 눈을 멍하니 들었다가 이내 그 말뜻을 깨달았다.

날짜. 제 처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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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론 못 죽어.’

로리엘은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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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친 왕녀 때문에 다 이렇게 된 거야. 절대 나 혼자는 안 죽어.’

 

*

수감실에서 꽤 멀리 떨어진 병영의 회의실로 자리를 옮기고서도 헤르한은 한동안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제 기력을 다 소진할 만큼, 분노에 자신을 스스로 태워버리는 헤르한을 보면서, 아시온과 제스는 그들의 주군이 사실 얼마나 거칠고 위험한 사내였는지를 다시금 되새겼다.

로리엘의 기억에서 읽어낸 진상을 들어야 했기에 제스는 어쩔 수 없이 헤르한에게 진정제를 먹였다.

헤르한은 그 뒤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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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정말 왕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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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통째로 말아먹을 각오라도 한 건지 뭔지…….”

그러자 헤르한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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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통째로 뒤집어엎어야겠어. 왕국으로 군대를 보내.”

진정제 기운에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지만 헤르한의 두 눈은 여전히 살기로 형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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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설마 전쟁까지 생각하시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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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아시다시피 명분이 부족합니다. 왕녀가 로리엘에게 암살을 직접 사주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왕녀는 ‘사랑의 묘약을 대신 처분해 달라’라는 부탁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는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습니다.”

아시온과 제스가 절박하게 매달렸지만, 지금의 헤르한은 이성으로는 설득되지 않는 상태였다.

명분이나 혐의가 어떻다든지, 국제법이나 외교가 어떻다든지 하는 식의 반론도 없었다.

헤르한은 그저 자신의 열을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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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 다시 명령한다. 왕국으로 군대를 보내. 또 제국 전역에 수배령을 내리고 국경을 봉쇄해. 왕녀가 제국에 남아 있다면 내가 붙잡아 벨 것이고, 왕국으로 도망갔다면 전쟁을 벌여서라도 그 멱을 따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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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다시 생각해 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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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출정하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나가겠어.”

다시 헤르한에게 매달리려는 아시온을 제스가 팔을 뻗어 만류했다.

지금 굳이 말로 주군에게 덤빌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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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폐하께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아니면…….’

아시온의 눈짓을 주고받은 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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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법령서와 인장을 가져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 헤르한은 앉은 채로 엎어져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었다.

낡은 원목 테이블의 쿰쿰한 냄새를 맡으면서 헤르한은 끝없는 무력감으로 빨려 들어갔다.

로리엘은 흙탕물이었다. 그 흙탕물 안에 얼마만큼의 진실과 얼마만큼의 거짓이 섞여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리엘라를 해할 생각뿐이었고, 그것을 행동으로도 옮겼다. 죽어 마땅했다.

그레타 왕녀도 마찬가지였다. 리엘라는 몇 번이나 그녀를 용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까지 리엘라에게 올가미를 던졌다. 역시,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죽여야 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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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로리엘의 얼굴을 수도 없이 마주했으면서 미리 그녀의 탐욕을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은?

왕녀를 처리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는데도, 그녀가 유유히 제 성문 밖을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둔 자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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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죽어 마땅한 건 나인가.’

그때 회의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한은 테이블에 엎드린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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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 처형대를 하나 더 준비해라. 아무래도 나부터 제일 먼저 나가 죽어야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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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 혼자 내버려 두시더니, 이젠 혼자 죽으시려고요. 폐하. 미워요.”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헤르한은 깜짝 놀라서 곧장 상체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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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요. 폐하 처형대.”

뒤를 돌아볼 새는 없었다. 헤르한의 등 뒤에 선 리엘라가 허리를 숙여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기대온 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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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 속을 갑갑하게 꽉 틀어막은 벽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안투의 힘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리엘라가 대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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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요. 제가 필요할 거라고 했죠.”

리엘라의 목소리가 짐짓 거만했는데도 헤르한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며 깊게 심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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