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축복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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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축복받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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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축복받은 사람
2022.04.24.
“비켜라. 루.”
아무리 루가 뒤늦게 애를 쓴다고 해도 황제의 명령을 어길 재간까지는 없었다.
루가 고개를 푹 숙이고 뒤로 물러나자, 리엘라가 그 타월을 대신 집어 제 몸을 가렸다.
리엘라는 탕 안에 몸을 담그고 있어서 루처럼 바깥으로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폐하. 아무리 폐하라지만 목욕 중인데 이렇게 들어오시면…….”
“…….”
“그, 금방 씻고 나갈게요. 하하. 밖에서 기다려주세요. 네?”
“…….”
“폐하…….”
괜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헤르한을 설득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헤르한은 눈썹에 바짝 힘을 주고 사나우리만치 경직된 표정을 풀지 못한 채, 탕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도망갈 곳 없는 리엘라가 물 안에서 뒤척이자, 움직임을 따라 탕 밖으로 넘친 물이 헤르한의 바짓단을 적셨다.
“리엘라. 그 수건 치워.”
“폐, 폐하. 루도 보고 있는데…….”
“어서 그거 내려놔.”
“정화를 천천히 하려면 맨살이 닿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아까…….”
“리엘라!”
루는 토마토 같은 얼굴이 되어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고, 리엘라는 허리까지 잠긴 탕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몸을 감싼 타월을 필사적으로 잡은 리엘라를 더 어쩌지도 못하고, 헤르한은 뜨겁게 타오르는 눈으로 타월 바깥으로 드러난 리엘라의 몸을 뜯어보았다.
상아를 깎아 만든 조각처럼 희고 매끄럽기만 해야 할 어깨와 팔뚝 군데군데가 푸른 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더 가까이 보여 봐.”
오랜만에 듣는 차가운 명령에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폐하. 옷이 젖습니다. 제가 정리하고 나갈 테니 밖에서 얘기…….”
다음 순간, 리엘라는 요란하게 찰랑거리는 물소리에 눈을 떴다.
헤르한이 옷을 입은 상태 그대로 탕 안에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폐하……!”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어? 언제 이렇게 됐어? 응?”
헤르한은 몹시도 괴로운 얼굴로 다그치며 다가오는데, 자신은 그런 그를 대하는 것이 마냥 부끄러워서 미칠 지경이라면 이상한 걸까.
“리엘라!”
그래서 리엘라는 그냥 무릎을 감싼 채 헤르한에게 안겨버렸다.
그의 집요한 시선에 낱낱이 파헤쳐지느니, 이렇게 몸을 포개서라도 시야에서 벗어나는 편이 차라리 말을 하기엔 더 수월했다.
“모르겠어요.”
“리엘…….”
“둘러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모르겠어요. 이엘의 마차 안에서 눈을 떴을 때 몸이 이미 이랬던 걸 보면 아마 호수궁에서 기절한 틈에 생긴 상처들 같아요.”
“그럼 그건 로리엘이.”
“……아마도요. 확실하진 않아요.”
확실하지 않기는.
헤르한은 암담한 마음에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정원에서 의식을 잃기 직전, 로리엘에게서 읽어낸 찰나의 기억이 있었다.
로리엘이 호수궁 욕실에서 까무룩 잠든 리엘라를 거칠게 끄집어내고, 팔 한쪽만을 잡아 바닥에 질질 끌어 옮기던 것.
아직 정신이 온전치 않아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진짜였던 모양이다.
“하아…….”
아니나 다를까, 로리엘이 움켜쥐고 잡아끌었던 손목이 유난히 푸르렀다.
헤르한은 손을 뻗어 리엘라의 고운 등을 쓸었다.
분노가 끝까지 뻗쳐 단단한 손이 물기에 젖은 살갗을 매끄럽게 훑어 내려갔다.
“아읏……!”
등 쪽, 바닥에 쓸려 빨갛게 피부가 일어난 상처에 헤르한의 손끝이 닿았을 때,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뜨끈한 신음을 흘렸다.
따갑고도 짜릿한 느낌에 리엘라는 헤르한의 팔뚝에 제 손끝을 꽂은 채로 움찔했고, 헤르한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비분에 끓는 숨을 뱉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칼부림을 내고 싶진 않았는데.”
헤르한이 말했다.
“당장 그 여자를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야.”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가슴에 뜨거운 이마만 쿵쿵 찧었다.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아니면, 이제 그만 저를 안아주세요.
어떤 뜻의 애원인 것인지는 리엘라도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때 헤르한이 리엘라의 젖은 머리카락을 만져주다가 또 한 번 움찔했다.
“로리엘이 네 목에 칼도 댔나?”
“아…….”
당황해서 올려다보니 헤르한은 정말 당장이라도 수감실로 뛰어가 로리엘의 사지를 끊어놓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리엘라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상처를 낸 사람도 찢어 죽이실 건가요?”
“그래.”
“……전데요.”
리엘라는 머쓱하게 대답했다가, 이내 민망하게 헤헤 웃었다.
헤르한은 붉은 혓바닥이 보이도록 입만 턱 벌릴 뿐, 황당함에 목이 막혀 뭐라 말을 잇지 못했다.
“농담하지 마.”
“……정말이에요.”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거였다면 그렇게 했으리라.
하지만 헤르한은 곧 이엘을 직접 조사할 테고 그러면 어차피 드러날 일이었다.
그럴 바엔 스스로 이실직고하는 편이 더 나았다.
“대체 왜……?”
“나 다시 안 보내주면 콱 죽어버리겠다고 이엘을 협박하느라고, 어떻게 하다 보니…….”
꽉 다문 헤르한의 잇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효과 좋았어요. 되게 잘 먹혀서, 덕분에 이렇게 돌아올 수…….”
난 이제 괜찮다고, 헤르한을 최대한 달랜다고 한 소리인데도 결국 그를 괴롭혀버린 모양이었다.
헤르한은 리엘라의 어깨에 무거운 이마를 기댔다.
두 몸이 가깝게 밀착하면서 또 한 번 욕조 안의 물이 찰박거렸다. 바깥으론 이미 많은 물이 흘러넘쳤다. 헤르한의 바지와 셔츠도 물을 흠뻑 먹어 몸의 형태가 완전히 드러나도록 달라붙어 있었다.
“죄책감에도 사람이 죽을 수 있나.”
“제가 폐하를 죽을 만큼 아프게 만들었나 봐요.”
“로리엘이나 이엘을 욕할 게 아니야. 널 궁지로 내몬 것은 나일지도 몰라.”
괴로운 속살거림이 리엘라의 목덜미에 뜨겁게 와 닿았다.
“이렇게 널 아프게만 하는 걸 보면 난 역시 저주받은 핏줄이 분명해.”
“폐하.”
리엘라는 한 손을 들어 그런 헤르한의 볼을 감쌌다.
헤르한이 겨우 다시 고개를 들어 마주 본 것은 너무나 따스한 눈빛, 그리고 미소 띤 리엘라의 발그레한 얼굴이었다.
“폐하의 눈엔 제가 지금 아파 보이나요?”
아니. 넋이 나갈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여.
그래서, 헤르한의 심장이 더 옥죄어 왔다.
“전 안투의 후손이라는 게 뭔지, 그래서 제가 뭘 할 수 있다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건 알아요.”
리엘라는 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실 거예요.”
고개를 가로젓는 헤르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리엘라는 이렇게도 예쁜 모습으로 자신이 축복받았다고 하는데도, 헤르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그래도 모르겠다. 리엘라.”
“폐하…….”
“너 하나 지키지 못할 거라면 내 힘이 다 무슨 소용이지? 내가 황제인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헤르한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그의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순간 리엘라의 심장도 덜컥 내려앉았다.
언젠가 헤르한을 한번 울려보겠노라고 짓궂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 순간이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아픈 마음으로 지켜보게 될 줄도 몰랐다.
“다 바로 잡겠어.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헤르한은 뜨거운 분노를 눈가에 그렁그렁 매단 채로, 이를 꽉 물면서 힘주어 말했다.
“다시는 그 누구도 네게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할 거다.”
*
헤르한은 다음날 로리엘을 직접 문초하기로 했다.
어제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긴 두려움에 시달리게 해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헤르한은 리엘라를 위협하는 누군가가 아직 어딘가에서 오롯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리엘라의 몸에 난 상처를 보니 더욱 그랬다.
‘감히 리엘라에게.’
헤르한은 이를 갈며, 그 여자를 하루라도 빨리 단두대에 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유는 또 있었다.
“찾았나?”
“아뇨. 본궁 실내 정원의 잔디를 전부 다 뒤엎었는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빈 케이스만 찾았어요.”
리엘라에게 청혼하기 위해 헤르한이 직접 북부 광산까지 가서 구해왔던 레드 다이아, ‘여왕의 태양’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그새 그 여자가 훔친 모양이로군.”
“체포 당시 신체 수색 때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체포되기 전까지 잠시 도망쳤던 틈이 있었으니 그때 숨겼겠지.”
“허어. 제정신일까요? 그 와중에 그걸 훔쳐서 도망칠 정신이 있었다니.”
아시온은 진저리를 쳤다. 로리엘이 추잡하게 네발로 기어가며 도망치던 꼴을 목격했던 건 바로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저도 같이 가요. 폐하.”
그때 옷을 갖추어 입은 리엘라가 응접실로 나왔다.
아시온은 곧장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반지 얘기는 입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같이 가게 해주세요. 이제 폐하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니. 여기 있어. 리엘라.”
헤르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리엘라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주기만 했다.
그는 독한 모습을 리엘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지독하게 적과 싸우는 것은 자신 하나면 족했다. 리엘라는 언제나 평화로운 곳에서, 그저 축복받은 존재로 있어 주길 바랐다.
맹랑한 시녀에게 독살 위협을 받은 후, 병상을 털고 일어난 황제가 공식적으로 처음 침소 밖으로 나오는 일이었다.
황제의 소식을 들은 황궁 대신들은 본궁 계단 앞에 일렬로 늘어서서 황제의 안녕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로비에는 황제의 문안 차 보내진 꽃과 선물들이 즐비했다. 가까운 황성 귀족들이 보낸 것만으로 궁내가 가득 찼고, 제국 전역과 각국 등지에서 보내온 마차는 이제야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쓸모도 없는 짓들을.”
“이 기회에 반대파가 전부 숙청당하고 세력이 재편될까 다들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
헤르한은 비소를 머금고선 그들 모두를 스쳐 지나와버렸다.
로리엘을 격리해놓은 차가운 병영의 수감실.
황제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병영 안은 전보다 더 깊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황제 독살 시도. 주둔 외교 대사이자 황제의 공공연한 정인의 납치까지.
전대미문의 일이 한 번에 닥친 데다 그를 조사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행차한 길이니 당연한 긴장이었다.
“격리실은 이쪽입니다.”
미로처럼 깊은 데다 경비가 삼엄한 복도의 끝.
어두침침한 방 안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마주한 건 머리가 헝클어진 제스였다.
“폐하. 오셨습니까.”
제스는 제 목을 우둑우둑 소리가 나도록 꺾으며 피로한 얼굴로 나왔다.
“진행 상황은?”
“여전합니다. 호수궁 시녀들에게 수면제를 먹였던 것이나 리엘라 양을 재워서 이엘에게 보낸 것까지는 다 인정하는데, 폐하에게 독약을 먹인 건 끝까지 부정하고 있습니다. 독약인 줄 몰랐답니다.”
“그러면?”
“사랑의 묘약인 줄 알았다는데요.”
헤르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랑의 묘약을 먹여서 폐하께 안길 작정이었답니다. 참나. 세상에 그딴 약이 어디 있다고?”
제스는 코웃음을 치며 가죽 장갑을 벗었다.
그의 가죽 장갑은 얼핏 보기에도 지저분했다. 타액과 토사물, 그리고 얼핏 보이는 피까지.
“전 레이디에게 주먹을 쓰는 그런 비열한 타입은 아니라서요.”
“그래.”
“그래도 폐하의 명령은 충실하게 이행했습니다.”
“알고 있어.”
바닥을 나뒹구는 온갖 정체 모를 약병들. 또 미친 것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채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로리엘의 모습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의식은 남겨두었습니다. 대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스가 벗은 장갑을 쓰레기통 안에 툭 던져 넣으며 말했다.
그때 그의 말대로, 넋이 나가 있던 로리엘이 헤르한을 용케 알아보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헤르한은 섬뜩한 얼굴로 그런 로리엘에게 다가갔다.
로리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저를 죽이러 온 자의 표정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헛소리를 할 만큼.
“폐하……. 폐하. 제 말을 들으러 와주신 거지요? 저를 구하러 와주신 거지요? 폐하. 저는……. 저는 폐하를 동경했습니다. 황실의 여인으로서, 이 땅의 태양이신 폐하를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제겐 그 죄밖에 없어요. 폐하도 아시지요? 네?”
헤르한은 로리엘에게 대답하는 대신 낮게 제스를 불렀다.
“제스.”
“예. 폐하.”
“혀를 잘랐어야지.”
로리엘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리건 말건, 헤르한은 제스를 향해 날 선 신경질을 뱉어냈다.
“지금 나더러 이 메스꺼운 목소리를 들으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