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왜 너희가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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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왜 너희가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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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왜 너희가 난리?
2022.04.21.
헤르한은 리엘라를 안은 채로 딱딱하게 굳어서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리엘라는 조용히 답을 기다리다가 결국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폐하? ……싫으세요?”
조마조마함이 가득 깃든 눈망울이 헤르한을 향해 반짝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 헤르한은 무심결에 그 눈망울을 마주 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몸을 크게 떨었다.
“불편하시면 서재 옆 침실을 쓸게요. 그래도 당분간은 내실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제가 가까이 있어야 폐하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 다 나으실 때까지는…….”
멍하던 헤르한이 화들짝 정신을 차린 건 그때였다.
“내가 다 나으면 다시 호수궁으로 돌아가려고?”
기대로 부풀었던 그가 실망감에 언성을 높였다.
묻기보단 따지는 것에 가까운 그 목소리에, 리엘라는 오히려 안심하며 픽 웃었다.
“한 번 오면 오는 거지, 다시 가는 게 어디 있지?”
“폐하의 회복을 위해 가까이 머무는 거니까요.”
“미안하군. 난 당분간은 낫지 않을 예정이다.”
그런 예정도 다 있나.
리엘라는 황당함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제스 경이 늦어도 사흘이면 회복하실 거라고 했어요.”
“네가 그랬잖아. 제스는 돌팔이라고. 그자 말은 믿을 것 없어. 내 생각엔 내가 다 나으려면 한참은 걸릴 것 같다. 그러니 한동안은 계속 같이 있어 줘야겠어.”
“한동안, 얼마나요?”
“글쎄.”
한 달이라고 대답할까, 일 년이라고 대답할까. 아니면 그냥 평생 낫지 않을 거라고 해버릴까.
고민하며 리엘라의 눈치를 보던 헤르한은 그냥 대답 대신 꾀병을 부리며 말을 돌리기를 택했다.
“아아. 머리가 깨질 것 같군.”
사실 리엘라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두통은 말끔하게 가셨으면서, 헤르한은 괜히 미간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예상대로 리엘라는 곧장 몸을 가까이 붙여오며 이리저리 헤르한을 살폈다.
“폐하? 어떡해요? 괜찮으세요?”
부드러운 손길이 이마도 짚어주고, 볼도 쓰다듬어주는 것에 헤르한은 스멀스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끌어내렸다.
언제나 자신이 리엘라를 당겨서 안을 줄만 알았지, 이런 식으로 리엘라가 먼저 안겨 오게 한 적은 없었다.
‘이런 게 가능할 줄 알았으면 안투의 후손이란 얘기를 진작 해줄 걸 그랬나.’
그때였다.
헤르한이 자신의 계략에 만족하며 리엘라의 보살핌을 만끽하는 그 순간, 리엘라가 눈을 질끈 감으며 얼굴을 찡그리더니 크게 휘청거렸다.
헤르한은 깜짝 놀라서 곧장 리엘라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자신을 단단히 지탱해주는 몸짓에 리엘라는 더 힘이 풀려서 아예 헤르한의 품 안으로 고꾸라졌다.
“죄, 죄송해요, 폐하……. 갑자기 조금 어지럽…….”
“괜찮아. 괜찮으니 아무 말도 하지 마. 리엘라.”
헤르한은 두 팔로 리엘라를 번쩍 안아 올렸다.
싱글벙글 웃음을 참던 그의 얼굴은 그새 걱정과 죄책감으로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
조금 뒤 제스가 내실 안으로 들어섰다.
“제스. 난 괜찮으니, 리엘라를…….”
“예. 압니다.”
굳이 명령을 들을 것도 없이 제스는 침실 안으로 들어서는 즉시 리엘라에게로 직행했다.
언제나 주군에게 쓸 약과 건강 기록으로 가득했던 왕진 가방은 어느새 리엘라의 몸 상태를 살피기 위한 도구와 연구 자료로 채워져 있었다.
“리엘라 양. 두 시간 전보다 피로도 수치가 올랐군요. 점점 진정되어가는 중이었는데, 아무래도 폐하께서 의식을 찾으시면서 수치가 일시적으로 폭증한 듯합니다. 제가 오늘 드린 약은 드셨습니까?”
“네. 먹긴 했는데……. 속이 좀 울렁거리네요. 어제는 괜찮았거든요.”
“그렇군요. 오늘 약에 몇 가지 성분을 더 추가했는데 그중에 리엘라 양의 몸에 맞지 않는 성분이 있나 봅니다. 제가 다시 체크를 해보겠습니다.”
헤르한은 한참 제 자리에 서서 제스의 설명을 기다렸지만, 제스는 리엘라의 옆에 더 바짝 붙어 그녀의 증상을 묻기에 여념이 없었다.
헤르한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자신이 제스의 관심에서 완벽히 소외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제스?”
“아. 예. 폐하.”
제스는 세 번의 부름 만에야 고개를 들었다.
그마저도 대충 고개만 들었을 뿐, 시선은 여전히 리엘라 쪽이었다.
“그동안 리엘라를 살뜰히 보살핀 모양이군.”
“예. 두세 시간 간격으로 살폈습니다. 약도 연구 중이고요. 밤엔 리엘라 양의 담당 당직관도 따로 두었습니다.”
이걸 기특하다고 칭찬이라도 해야 하나.
리엘라와는 늘 아웅다웅하던 그가 직접 나서서 리엘라를 챙기는 모습이 헤르한의 눈에는 웃긴 동시에 낯설었다.
“그래서 리엘라의 상태는?”
“아. 예. 괜찮기는 한데…….”
그때야 제스는 헤르한과 눈을 마주쳤다.
“폐하. 당분간 리엘라 양과 거리를 좀 유지해 주시겠습니까?”
“뭐?”
“정화는 일정한 수준에서 천천히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너무 가까이 붙어계시면 리엘라 양의 몸에 무리가 생깁니다.”
헤르한은 얼떨떨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니까 제스의 말은, 자신이 리엘라에게 해가 되니 주의하란 것 아닌가.
리엘라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신경 써주는 것은 고맙다만 그런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닌 제스가 한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리엘라 양의 몸이 상하면 결과적으로는 폐하께 실이 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쯤 내실 문을 박차고 아시온이 뛰어 들어왔다.
“폐하. 깨어나셨단 얘기 들었습니다.”
“그래. 아시온. 너라도 날 보러 와줘서 고맙…….”
“그런데 리엘라 양이 쓰러졌다고요! 리엘라 양은 괜찮습니까?”
“…….”
헤르한의 말문이 막히든 말든, 아시온 역시 침대에 누운 리엘라에게로 직행했다.
“전 괜찮아요. 아시온 대장님.”
“후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얼마나 십 년 감수했는지. 이그드니스 일가를 문초 중이었는데 그대로 두고 달려왔습니다.”
아시온과 제스. 두 사람은 모두 평소보다 리엘라와 정답고 애틋해 보였다.
헤르한은 물론 그 이유를 뻔히 알았다.
리엘라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해 자신을 구한 데다가 대신 앓아눕기까지 했으니 감사하고 대견한 것이겠지. 지금 자신의 마음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헤르한은 그게 영 탐탁치만은 않았다.
‘리엘라를 아끼는 건 내가 할 일인데, 왜 너희가 난리?’
하다 하다 못해 이젠 제 부관들까지 질투하게 된 건지 뭔지.
“이럴 거면 너희 보직을 아예 변경해줘? 리엘라의 주치의와 리엘라의 근위대장으로.”
“예?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혹시 서운하셨습니까?”
“다 폐하를 위해서 이러는 건데 뭐가 서운하십니까?”
그때 티격태격하는 세 사람을 향해 리엘라가 입을 열었다.
“세 분이 다투실 때가 아니지 않나요?”
언짢은 얼굴로 팔짱을 낀 헤르한도, 웃음을 참는 아시온과 심드렁한 제스도, 모두 리엘라를 쳐다보았다.
“다들 그냥 은근슬쩍 넘어가시려는 것 같은데요.”
리엘라는 단호한 표정으로 침대에서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전 아직 여러분들이 저에 대해 다 알고서도 숨기고 지내오신 것에 대해서, 아무런 사과나 해명도 듣지 못했거든요. 덕분에 저는 제가 안투의 후손이라는 걸 이엘에게 들어야 했고요.”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리엘라를 뺀 모두가 죄인인 상황에 제일 먼저 탈주를 시도한 건 제스였다.
“야무지게 말을 잘하시는 것을 보니 몸 상태는 괜찮으신 듯. 저는 신약을 다시 연구하러 가야 해서, 이만.”
“아. 저도 다시 조사하러 가봐야겠습니다. 로리엘 쪽이 계속 결백을 주장해서 만만치가 않아요.”
그렇게 두 부관은 뻔뻔하게 도망쳐버리고, 남은 것은 다시 헤르한과 리엘라뿐이었다.
“폐하도 도망가시려고요?”
“제스가 방금, 가능한 너와 거리를 유지하라고 했으니…….”
“그래요. 가세요.”
리엘라는 헤르한을 흘겨보다가 그냥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러자 그대로 문밖으로 도망쳐버리나 싶었던 헤르한이 침대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렇게 침대 맡에서 한참 망설이던 그는,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침대 위로 올라와 옆으로 누운 리엘라를 등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거리를 유지하신다면서요?”
“이불로 감쌌잖아. 맨살만 안 닿으면 괜찮겠지. 왜? 또 어지럽나? 조금 떨어질까?”
리엘라는 허무하게 픽 웃어버리는 것으로 괜찮다는 대답을 대신했다.
헤르한의 목소리는 무겁고 나른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생각보다 빠르게 회복했다지만 그는 아직 독을 다 풀지 못한 환자이니까.
“……나 때문에 네가 아파서 어쩌지, 리엘라.”
그런데도 그런 와중에 본인보다 자신을 더 걱정해주는 그가 좋아서.
리엘라는 헤르한에게 사과를 듣고 말겠다는 다짐도 그냥 허공에 흩어버리고 달콤한 체취 속에 제정신을 파묻어버렸다.
*
먼저 잠든 것은 리엘라였고, 헤르한은 조용히 일어나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주군 앞에 불려온 제스와 아시온은 아까의 일이 걸렸는지 묘하게 패기가 없었다.
“폐하. 아까 일은…….”
“잘했어. 둘 다.”
헤르한은 싱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심이다. 너희가 옳게 처신했어. 앞으로도 리엘라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도록 해. 당분간 내실에서 함께 지낼 테니 이쪽에 시녀들도 더 붙이고.”
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주군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아직은 움직이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폐하.”
“상황만 간략히 듣고 다시 돌아가 쉴 생각이다. 일이 어떻게 된 거지? 리엘라가 이엘 바이스에게 진실을 들었나?”
그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와서 굳이 부관들을 앉혀놓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 주군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 아시온은 헤르한을 만류하는 대신 그가 궁금해하는 상황을 모두 전했다.
로리엘 이그드니스가 벌인 짓들, 그리고 이엘 바이스가 벌인 짓들.
대체 로리엘이 그런 맹독을 어떻게 손에 넣어 황제를 음해한 것인지 수상했지만, 역시 헤르한의 관심은 이엘 쪽에 더 쏠렸다.
“그자가 제 발로 돌아올 결정을 했다고?”
“엄밀히는 제 발로 돌아온 건 아닙니다. 리엘라 양이 사전작업을 해두었더라고요.”
“사전작업?”
“2 기사단을 움직여 협박받던 이엘 바이스의 가족들을 구출해 포섭해 둔 모양입니다. 지금 병영 동관 관사에서 비밀리에 보호 중입니다.”
헤르한은 이를 갈았다.
두 사람 모두 당장 단두대에 올려도 시원치 않건만.
‘로리엘의 뒤에도, 이엘의 뒤에도 본체는 따로 있다는 건가.’
책상 위로 주먹을 꽉 쥔 헤르한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내가 직접 둘을 모두 살펴야겠어.”
“당장은 힘을 쓰시면 안 됩니다. 조금 더 회복하셔야 합니다.”
헤르한은 제스의 만류를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빠르게 매듭을 지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그런 배려를 누릴 자격도 없는 이들이니까.
“나는 마지막에 나서지. 그전까지는 조사를 너희에게 일임하겠다.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악랄하게 괴롭혀.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제 전공입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스와 아시온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헤르한은 그쯤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빠르게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리엘라는 그새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인기척이 느껴진 곳은 욕탕 쪽이었다.
아까 씻어놓고 그새 다시 목욕하러 간 것인가 했는데, 문틈으로 루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죄송해요. 리엘라 님. 다 제 탓이에요. 리엘라 님이 그런 일을 당하시는 줄도 모르고 저는……. 저는 정말 시녀로서 실격이에요.”
“로리엘이 자백했대요. 그동안 루에게 꾸준히 수면제를 먹였다고. 루도 피해자예요. 그러니 그렇게 울지 말아요.”
“하지만……. 하지만 제가 어떻게 울지 않을 수가 있어요. 저 때문에 리엘라 님 몸이 이렇게 되었잖아요……. 이렇게 곱고 예쁜 몸에……. 흑.”
“그만 뚝. 이건 루 탓도 아닌걸요.”
찰박찰박한 물소리. 그리고 루가 흐느껴 우는 소리.
무엇보다 ‘리엘라의 몸이 이렇게 되었다’는 자책 어린 말.
헤르한은 참지 못하고 욕탕 문을 열었다가 뿌연 수증기 속에 드러난 맨몸의 리엘라를 보고 이를 꽉 물었다.
황제가 들어온 것을 알아챈 루는 기겁하며 타월로 리엘라의 몸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