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네가 날 어둠 속에서 꺼내준 것 (84/154)


#84 네가 날 어둠 속에서 꺼내준 것
2022.04.17.


헤르한은 의식이 흐려졌던 게 언제부터였는지를 떠올렸다.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정원에서 시녀가 건넨 샴페인을 마신 직후부터였다.

들이쉬는 숨을 따라 속이 더워지기에 술기운이 오르는 것인가 했는데 이내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시녀가 도무지 믿지 못할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고, 헤르한은 그때 시녀의 기억을 읽었다.

머리가 깨질 듯해서 헤르한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단편적인 장면들뿐이었다.

욕조에 축 늘어진 리엘라를 그 시녀가 짐짝처럼 거칠게 끄집어내는 것.

리엘라의 방에서, 리엘라의 거울을 보며, 리엘라의 옷을 입고서 탐욕스럽게 웃는 것.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누군가에게 리엘라를 팔아치우듯 떠넘긴 것.

헤르한은 본능에서 끓어오른 노여움에 시녀의 턱을 틀어쥐었고, 당장 그대로 그녀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웠다.

정신이 까무룩 흐려져 버린 건 아마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았다.

그 뒤로는 끊임없는 고통과의 사투뿐이었다.

증상은 예전의 발작과 비슷하면서도 신체적인 고통이 몇 배로 강하게 뒤따랐다.

누군가 온몸의 근육을 비틀어 짜는 것 같기도. 불구덩이 속에 내던져진 듯 뜨겁기도.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운 그때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지고 모든 고통이 사라졌다.

전에도 경험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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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그때부터였나. 나는 그때부터 이 목소리를 사랑했나. 아니면 그 이전부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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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다녀왔어요.”

 
어두컴컴한 세상이 단번에 찬란한 양지가 되었다.

예전에 당신의 곁에 있어 주겠노라 말했던 목소리는 이제, 자신이 제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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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신.’

한때 그녀의 존재를 의심했던 헤르한은 이제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드니, 그의 여신이 태양처럼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은 우는데, 입은 사랑스럽게 미소 지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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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제가 보이세요?”

잘 보여.

헤르한은 소리 내지 않아도 자신의 대답이 전해지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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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제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헤르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엘라는 제법 앙큼한 고백들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게 내심 얼마나 서운했는지.

그래도 헤르한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자신이 그랬듯이, 리엘라에겐 그녀에게 맞는 순간과 계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오늘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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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폐하.”

나긋하게 고백하는 말을 따라 리엘라의 눈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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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폐하를 사랑해요. 어쩌면 폐하가 저를 사랑해주시는 것보다 더 많이.”

아마 그건 아닐 텐데. 그보다 더 클 수는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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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언제나 폐하 곁에 있을 거예요. 폐하와 한 시도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지긋지긋하게 곁에 붙어 있을 거예요.”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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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

그건 또 들어도 좋은 소리고.

행복에 겨워 웃는 헤르한의 얼굴이 지쳐 보였는지, 리엘라가 따뜻한 손으로 볼을 감싸 쥐었다.

헤르한은 그 부드러운 손길에 기대어 고개를 들었다.

리엘라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입을 맞추어 왔다.

뭉근히 맞댄 입술과 입술로 애틋한 감정이 깃든 호흡이 오갔다.

헤르한은 열사의 늪을 헤매다가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리엘라가 내어주는 생명을 받아 마셨다.

*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는 주군의 모습에 제스는 벽을 보고 돌아서서 홀로 숨을 쉬었다.

아시온도 치켜들었던 검을 축 늘인 채 둘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두 연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간절하고 절박한 데가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평소 황제를 둘러싼 염문에 관심을 두던 이들이나 로리엘의 폭로를 반신반의하며 눈을 흥미롭게 치뜨던 이들도 모두 입을 다물고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젊은 황제와 그의 정인에게서 거두어진 시선들은 이제 반대로 로리엘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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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쟨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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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블리니테가 야반도주했다며?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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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황제 폐하께서 저런 시녀를 허투루 건드리셨을까?’

의혹에 찬 눈길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당황스럽기는 로리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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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 여자가 어떻게 여길 다시 온 거냐고? 혼자 탈출이라도 한 거야?’

경박하게 눈을 굴리며 사방을 훑던 로리엘의 시야에 들어온 건 연회장 입구 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이엘이었다.

아직 입을 맞추고 있는 황제와 리엘라를 아득하게 보던 그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로리엘에게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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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당신처럼 멍청한 남자는 세상에서 처음 봐! 판을 다 깔아줬는데도 저 여자 하나 어쩌지 못하고 다시 왔단 말이야?’

로리엘은 이를 악물고 이엘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저 지치고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때 연회장 가운데서 ‘꺅’ 하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로리엘은 무심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그만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리엘라가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시온의 검을 대신 빼앗아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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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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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요!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절 베기라도 하실 거예요?”

로리엘은 소리를 빽 지르곤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 덤벼도 리엘라는 늘 제 앞에서 고상하게 굴기만 했다.

그게 더 괘씸하고 짜증이 나서 차라리 속 시원하게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리엘라가 이렇게 칼까지 뽑아 들고 올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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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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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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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범이었던 주제에 폐하도 유혹하고 보좌관이랑 야반도주도 했다는 내가, 그깟 사람 베는 거 하나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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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요, 베어보세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거죠. 그동안 어울리지도 않는 귀족 흉내 내느라 고생하셨죠? 리엘라 님은, 아니, 당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칼질이나 하던 천박한 주제니, 어디 한 번 끝까지 천박하게 굴어보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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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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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쌩-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리엘라가 뻗은 검 끝이 로리엘의 턱 아래에 닿을락 말락 했다. 마치 자로 잰 듯 절묘한 거리였다. 자칫하면 그대로 살을 찌를 수도 있었을 법한.

리엘라가 정말 검을 휘두를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로리엘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리엘라는 검을 거두지 않은 채로 로리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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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기 주제에서 벗어난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로리엘은 꼭 사슬에 매인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리엘라의 냉담한 시선을 오롯이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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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엘. 네가 왜 내 옷을 입고 있지?”

순간 로리엘의 뒷골을 타고 뜨끈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군중 앞에서 발가벗겨진 것만 같이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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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뭐요……. 이게 다 당신 거라는 증거 있어?”

당황한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더니 리엘라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얕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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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게 갖고 싶으면 가져. 너 줄게.”

그게 로리엘은 더 치욕스러웠다.

차라리 깔깔 웃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지.

그때 로리엘을 노려보던 리엘라가 차분한 목소리로 근위대장을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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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 대장님. 이만 검을 돌려드릴게요. 아무래도 이 죄인에게 즉결처분은 너무 후한 처사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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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지금 내가 옷 좀 빼앗았다고 죄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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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엘이 폐하께 독을 먹였어요. 내게도 수면제를 써서 납치에 일조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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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 이 여자가 어떻게 알았지?

로리엘은 눈을 부릅떴다.

여태껏 숨을 죽인 채 상황을 관전하던 사람들에게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그드니스 백작은 유령처럼 창백하게 질린 채 뒷걸음질 쳤고, 백작 부인은 이미 기절해서 시종이 업고 나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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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에요, 나는……. 폐하께 독을 먹인 게 아니라…….”

이젠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기사들이 로리엘의 양팔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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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는 억울해요. 폐하께 독을 먹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맹세코 저는 그게 맹독인지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저, 정말이에요! 폐하, 폐하!”

로리엘의 절규는 점차 흐려져 갔다.

리엘라는 로리엘의 처참한 뒷모습을 조금 보다가 아시온에게 작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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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인지는 내 보좌관이 자세히 알고 있으니 제스 경과 함께 가서 문초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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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같이 야반도주했던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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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바람났던 보좌관.”

피로함이 깃든 만큼이나 다정함이 녹아 있는 농담이 오간 후, 리엘라는 다시 아시온을 똑바로 보며 차분하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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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경은 연회장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순순히 내 명에 따르기로 약속했으니, 자수도 할 거고, 조사에 협조도 잘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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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제가 잘 신경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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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너무 사고를 크게 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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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양이 친 사고가 아닌데요. 오히려 리엘라 양이 다 수습해주셨죠.”

아시온은 리엘라에게서 건네받은 검을 바닥에 세우고는 그대로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기사의 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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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또 폐하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헤르한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그다음 날 늦은 저녁이나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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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헤르한은 눈을 뜨자마자 리엘라의 이름을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침실엔 노을빛이 한가득 들고 있었다. 헤르한은 평소에 아련하고도 나른한 그 빛을 좋아했으나, 오늘 저 붉은 빛은 그저 리엘라가 곁에 없어 불안한 마음만 더 부추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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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어디에 있어? 리엘라?”

헤르한은 곧장 침대 밖으로 나왔다.

첫발을 뗐을 땐 살짝 비틀거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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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응접실 전체가 조용했다.

꼭 사람이 없는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것처럼.

순간 어지럼증이 몰려들어 헤르한은 잠시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머리가 아팠다.

온갖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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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출장에 다녀와서 리엘라를 만났던가? 청혼을 했던가? 아예 만나지 못했던가? 연회장의 기억은 뭐지?’

헤르한은 다급한 마음에 응접실 탁상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날짜를 짚어가며 천천히 기억을 되살리던 그는 무겁게 탄식하며 제 이마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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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깨어나셨습니까? 제스 경을 호출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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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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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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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궁으로.”

재킷 하나를 대충 걸친 채 다짜고짜 밖으로 나가려는 헤르한을 저지한 건 내실 문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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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궁은 무슨 일로 가십니까?”

그의 물음에 헤르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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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리엘라를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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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리엘라 님은 이제 호수궁에 안 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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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헤르한은 그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서 한동안 멍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기만 했다.

리엘라가 호수궁에 없어?

혹시 리엘라가 떠난 것까지만 현실이고, 돌아온 것은 자신의 망상이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철렁했다.

이엘 바이스가 끝내 리엘라를 납치해간 것이다. 당장 온 제국의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그를 가만두지 않겠다,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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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바로 그때 내실 안쪽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번에 걸음을 옮긴 곳에는, 젖은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린 리엘라가 발그레한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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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나셨어요? 괜찮으세요? 절 알아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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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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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알아보시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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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시는 폐하를 조금 보다가 잠깐 씻고 왔는데 그사이에 깨어나셨…….”

리엘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뜸 다가온 헤르한이 간절하게 입을 맞춰왔다.

방금 목욕을 마치고 나온 리엘라의 몸엔 향긋한 습기가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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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지? 네가 사라진 줄 알았어. 로리엘은 어떻게 되었지? 이엘 바이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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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경 말씀이, 아직 해독이 완벽하게 되지 않아서 기억이 조금 혼동될 수 있대요. 하지만 폐하의 건강엔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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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어디도 가지 않는 거지?”

헤르한은 평소보다 조급했다.

리엘라는 그런 그의 마음이 이해되면서도 귀엽고 애틋한 마음에 픽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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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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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날 어둠 속에서 꺼내준 것.”

헤르한은 리엘라를 끌어안은 채로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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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게 지긋지긋하게 옆에 붙어 있을 거라고 약속한 것. 또 네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말했던 것.”

리엘라는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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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 경이 돌팔이였나 봐요. 폐하, 완벽히 다 기억하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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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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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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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네가 와서 날 구한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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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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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사랑한다고 고백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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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리엘라가 계속 그렇다고 대답하는데도 헤르한은 아직도 이 모든 게 믿기지 않았다.

그저 그렇다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일이라, 아마 한동안은 계속 이렇게 바보 같은 선문답을 이어갈지 모를 일이었다.

헤르한은 다시 리엘라에게 입을 맞추려다가 말고 잠깐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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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네가 호수궁에 없단 얘기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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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내내 씩씩하게 대답하던 리엘라는 이 대답만은 쑥스러운지 헤르한의 가슴에 이마를 파묻은 채로 웅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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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같이 있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앞으로는 폐하와 같은 침실을 쓸까 하고……. 물론 폐하가 허락하시면……. 그런데 사실 짐은 벌써 다 옮겨오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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