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다녀왔어요
(83/154)
83 다녀왔어요
(83/154)
#83 다녀왔어요
2022.04.14.
“그러지 마십시오. 그거 내려놓으세요. 대사님.”
“맞네. 제대로 협박 되는 거. 이엘 경이 그렇게 떠는 걸 보니까 내가 정말 안투의 후손이 맞긴 하는가 봐요.”
자조적인 말에 이엘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이엘을 보면서 리엘라 역시 입술을 꾹 물었다.
아직까지도 다 장난 같기만 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인질 삼아 스스로 유리 조각을 목 아래 대고 있는 이 순간까지도.
“그래서가 아닙니다. 손에 피가 흐르잖습니까? 어서 내려놓으세요!”
“날 납치까지 했으면서 이깟 상처를 걱정하다니요.”
이엘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자길 노렸다고, 다 의도적인 접근이었다고 하면서, 그 눈은 대체 뭔데.
“말해줘요. 날 여기까지 데려왔고, 그 후엔? 날 어떻게 할 작정이었나요? 날 누구에게 넘길 건데요?”
이엘이 다시 빤히 고개를 들었다.
공허한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리엘라는 답을 들을 필요도 없는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자신이 안투의 후손이라면 아마도 현재로서는 유일한 존재일 것. 당연히 숱하게 많은 이들이 자신을 노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날 찾는 이가 누구든지,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난 안 갈래요. 난 내 자리로 돌아갈래요.”
“대사님의 자리……. 어딜 말씀하시는 겁니까? 폐하의 곁을 말하는 겁니까? 폐하 또한 당신의 힘에 기생하려는 이들 중 하나일 뿐인데?”
“맞아요. 그러네요. 그러면 더욱 돌아가야겠어요. 폐하에겐 내가 필요한 거잖아요. 폐하는 나 없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엘의 의미심장한 공격에도 정작 리엘라는 태연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고 확고해졌다.
‘내가 어떤 존재든, 안투의 후손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난 폐하의 옆에만 있으면 되는 거야.’
이엘은 그런 리엘라를 빤히 보다가 외면하며 말했다.
“이미 늦었을 겁니다.”
“네? 무슨……?”
“그쪽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지금쯤 폐하는 손쓸 수 없는 상황일 겁니다.”
“뭐라고요? 당신, 기어이……!”
리엘라는 자신의 목에 유리 조각을 댄 상태 그대로 눈을 부릅뜨고 멈추어버렸다.
이엘은 서서히 다가와 그런 리엘라에게 손을 뻗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선명하게 줄이 간 핏자국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안타까웠다.
그게 참 우스워서, 리엘라는 이엘을 밀치고는 들고 있던 유리 조각을 바닥에 내던졌다.
“내 목숨은 귀해요. 내가 없으면 폐하도 위험해지니까, 내 목숨을 담보로 당신을 더 협박하지는 않겠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다른 것으로 이엘 경을 협박할 거예요.”
주먹을 꾹 움켜쥐니 유리 조각에 베인 부분이 쓰라렸다.
꽉 쥔 손 틈으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래도 리엘라는 힘을 주고 결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엘 경. 가족들과 같이 계속 협박받고 있었죠?”
“……!”
“그 가족……. 지금 내가 데리고 있어요.”
“예? 뭐라고……?”
이엘의 눈이 커졌다. 새까만 그의 동공은 꼭 바람에 나부끼는 가지처럼 거칠게 동요했다.
하지만 리엘라는 마음이 약해질 틈이 없었다.
“당신을 돕고 싶었어요. 당신과 당신 가족들을 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젠 아니에요. 내가 구해야 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폐하야. 그러니 날 폐하의 곁으로 돌려놔요! 당장 폐하에게 보내줘요! 그러지 않으면……. 만일 당신 때문에 내가 폐하를 구하지 못하게 되면……!”
리엘라는 울컥 치솟는 울음을 꾹 누르고 이엘을 노려보았다.
“당신 가족의 목숨은 없어.”
진심이었다.
지금 자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헤르한의 품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리엘라는 더한 악인이라도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황궁 연회장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황궁 악사가 고풍스러운 곡을 연주하고 시종들이 부지런히 오가며 접객을 시작했는데도 한동안 산만한 분위기가 가라앉질 않았다.
1년 만에 열린 공식 연회가 모두에게 어색한 탓도 있었고, 무장한 기사들이 연회장 주변을 오가는 것이 이상한 탓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연회의 주최자인 황제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폐하의 출장이 길어지신 것 아닐까요?”
“그랬으면 어련히 연락을 주셨겠지요. 연회는 예정대로 열렸잖아요?”
“즉위하신 후 첫 연회라 드디어 폐하를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때 수런거리는 이들 사이로 반백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아주 중요한 출장이었던지라 마무리가 길어지시나 봅니다.”
“어머나, 이그드니스 백작.”
귀부인 중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하니 백작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폐하의 일정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가 봐요?”
“물론입니다. 이번 출장을 주관한 것이 바로 저희 집안인 것을요.”
“오, 정말이십니까? 이그드니스 백작께서 폐하와 그리 긴밀한 사이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제 딸아이 덕택이지요. 황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폐하께서 제 딸아이를 제법 가까이 두시고 예뻐라 하신답니다.”
“아. 그러셨군요!”
“예. 전에는 저희 일가가 야심한 시각에 폐하의 내실에까지 초청을 받았었는데…….”
이그드니스 백작의 목소리는 아주 컸다.
게다가 새 황제와 ‘과시할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이나마 가진 것은 그들뿐이었던지라, 자연스럽게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느새 이그드니스 백작과 그의 부인은 연회장 한가운데서 가장 주목받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폐하께서 로리엘 양을 썩 마음에 들어 하셨나 봅니다.”
“물론이고 말고요! 오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도 직접 폐하의 초대를 받아서 온 거랍니다.”
이그드니스 백작 부인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새삼스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로리엘 얘는 왜 보이질 않는담? 여기서 만나기로 해놓고선.”
오늘 연회에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꼭 잘 차려입고 황궁으로 오라고 큰소리를 떵떵 쳤던 건 바로 로리엘이었다.
“어, 어머니. 아버지……!”
로리엘이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낸 건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로리엘은 검은 담요 같은 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로리엘! 어디에 있다가 이제 온 거니? 그 이상한 건 왜 뒤집어쓰고 있는 거고?”
“이건……. 이, 일단은 빨리 밖으로 나오세요. 여기에 계시면 안 돼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떠나자고? 연회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야.”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로 벌벌 떠는 로리엘에 비해, 그녀의 어머니는 목청이 우렁찼다.
“여러분! 여기 로리엘이 왔네요. 여태 폐하와 같이 있다가 온 모양이에요. 호호.”
“어, 어머니!”
로리엘은 미칠 지경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연회장에 있을 가족들을 구하겠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되돌아온 자기 심정을 알기는 하는지.
“로리엘! 그 치렁치렁한 것 좀 치우고 얼굴을 보여라! 사람들에게 인사를 해야지.”
“아, 안 돼요! 아버지! 저 건들지 마세요! 제발 좀 조용히 떠나자고요! 네?”
로리엘이 다급한 심정에 부모를 잡아끄는 사이, 그의 부친은 인상을 쓰며 로리엘이 뒤집어쓴 베일을 끄집어내렸다.
황궁 연회장 한가운데, 황성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의 시선이 모두 한 군데로 향했다.
바로, 물에 빠진 생쥐처럼 거지꼴을 하고 있는 로리엘에게로.
“어, 어머나…….”
찬물을 끼얹은 듯 좌중이 일시에 싸늘해졌다. 그 틈틈이 경악에 찬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화려한 곳에, 가장 참담한 꼴로 선 로리엘은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를 자랑스러운 보물처럼 내놓았던 부모는 얼굴이 푸르렀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로리엘은 그렇게 몇 초간을 멍하니 있고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이,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로리엘은 급하게 아버지의 손에서 베일을 다시 낚아챘지만, 그땐 이미 연회장 주변에서 그녀를 찾던 기사들에게 모습을 보인 뒤였다.
*
“아……. 안 돼. 이 약도 완벽히 듣지 않아.”
제스가 끔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동안 헤르한의 가슴은 여전히 거칠게 오르내렸다. 그의 입술은 바짝 말라서 핏기 하나 없이 푸르렀다.
그때 기사 하나가 아시온에게로 뛰어왔다.
“대장님. 말씀하신 시녀를 찾았습니다.”
“정말이야!?”
“예. 지금 바깥 연회장에 있습니다. 기사들이 포위한 상태입니다.”
아시온이 이를 갈며 벌떡 일어났다.
당장 로리엘을 죽이기라도 할 듯이 나서는 그를 붙잡은 건 제스였다.
“일단은 폐하를 먼저 옮기자. 당장 내 연구실로 모시고 가야겠어.”
아시온은 쉽게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문밖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응급처치는 다 해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대로 주군을 계속 맨바닥에 눕혀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회장에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였지만, 그조차 주군의 목숨을 구하는 것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모두 폐하를 엄호해.”
제스와 아시온이 양옆에서 헤르한을 부축하고, 그런 그들을 기사들이 둥글게 에워쌌다.
그들이 연회장으로 나왔을 때 그곳은 체포를 피해 몸부림치는 로리엘로 아수라장이었다.
“이, 이거 놔요!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나는 오히려 황제에게 겁탈당할 뻔한 피해자라니까요? 정말이에요!”
그런 로리엘의 눈에 마침 이동 중인 황제 일행이 보였다.
로리엘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더 크게 소리쳤다.
“폐하! 저, 저기 폐하가 있어요! 여러분, 다들 보이시죠? 폐하 지금 제정신 아니신 거?”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황실 기사들이야 명령대로 로리엘을 결박한다지만 문제는 연회장에 가득한 손님들이 로리엘의 얼토당토않은 변명에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죠? 리엘라 블리니테! 암살범이었던 주제에 양심도 없이 여기까지 따라와 폐하의 옆에 들러붙은 그 여자. 폐하를 유혹해서 그동안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더니 기어이 뒤로는 바람이 나서 도망을 쳤지 뭐예요?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 여자가 자기 보좌관과 어젯밤에 야반도주하는 걸! 폐하께선 그 사실을 아시고 이성을 잃으신 거라고요! 그래서 그 여자의 시녀였던 저를 홧김에……!”
충격적인 얘기에 좌중이 반신반의하며 웅성거렸다.
아시온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이를 꽉 물면서 기어이 검을 빼 들었다.
“제스. 나 말리지 마라.”
“응.”
제스는 아시온을 보내며 대신 주군을 부축했다.
근위대장이 진검을 뽑아 든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로리엘도 그 소리를 듣고서야 아무 말이나 뱉던 것을 멈추고 경악했다.
그때였다.
호화로운 연회장이 끔찍한 난장판이 되어버린 때.
연회장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가운데로 입장했다.
제스도, 검을 든 아시온도, 기사들에게 붙잡힌 채 거짓 눈물을 흘려대던 로리엘도, 모두 ‘때늦은 손님’의 정체를 알아채고 눈을 크게 떴다.
이 순간마저 고개를 들지 못하고 거칠게 호흡하는 것은 헤르한뿐이었다.
저벅저벅.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황제를 향해 일직선으로 걷는 이를 따라 모두가 길을 비켰다.
리엘라의 얼굴을 알고 비키는 사람도 있었고, 옆에서 누군가 귓속말을 해주어 비키는 사람도 있었고,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절박한 그녀의 얼굴을 본 것만으로 마음이 동해 비키는 사람도 있었다.
리엘라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잰걸음으로 걷다가, 마지막에는 아예 치맛자락을 쥐고 숨이 차도록 뛰었다.
키가 큰 기사들에게 빙 둘러싸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리엘라는 헤르한이 거기에 있으리라 확신했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랬다.
일부러 찾지 않아도 그냥 심장이 뛰는 방향에 항상 헤르한이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보다 더 앞선 본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연결되어 있었던. 이렇게, 서로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운명.
“폐하.”
리엘라의 울먹임은 아주 작았는데도 커다란 홀을 가득 메웠다.
제스는 그제야 안심하며 헤르한을 의자에 앉혔고, 기사들은 아무런 명령 없이도 황제에게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저 다녀왔어요.”
세상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리엘라는 땀에 젖은 헤르한의 머리를 가슴 깊이 끌어안고 감사와 안도로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