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안투, 바로 당신
(82/154)
82 안투, 바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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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안투, 바로 당신
2022.04.10.
연회장 입구에 선 아시온은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한 손님들을 맞이하며 안을 흘긋거렸다.
제스는 마지막으로 연회장 내부를 점검하고 있었다.
악사는 진작 도착해 악기를 조율 중이었고, 화려하게 조각된 얼음 장식도 제 위치에 놓였다.
‘이 정도면 다 된 것 같은데.’
리스트를 한 번 더 체크하고 겨우 한숨을 내쉰 제스와 홀 밖에 선 아시온의 시선이 부딪쳤다.
말없는 눈빛을 통해 둘은 동시에 같은 질문을 주고받았다.
‘폐하 쪽은 아직도 안 끝난 거야?’
먼저 몸이 달아서 움직인 쪽은 이번에도 역시 아시온이었다.
“아무리 일주일 만의 해후라지만 너무 안 나오시는 것 아니야? 곧 연회도 시작할 텐데.”
“네가 들어가 보든지.”
“뭐? 내가 어떻게?”
“그럼 나는 어떻게?”
민망함에 난감해진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연회장 뒷문을 향했다.
지금까지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건 보나 마나 둘이 꼭 붙어 있다는 것인데.
“난 벌써……. 여러 번 봤단 말이야…….”
“뭘.”
“……이것저것. 골고루.”
아시온이 처량한 얼굴로 매달렸다.
그러니까 이번엔 제발 네 차례로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제스는 차마 떨치지 못하고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앞장섰다.
“흐, 흐흠. 폐하.”
뒷문을 열고 몸을 반쪽만 안으로 밀어 넣은 제스는 일부러 시선을 문밖에 둔 채 인기척만 했다.
“폐하. 곧 연회가 시작됩니다. 그만 마무리를 하고 나오시지요.”
그런데 안쪽의 반응이 이상했다. ‘애틋한 밀회’라는 것엔 어울리지 않는 기척들이 가득했다. 사나운 호흡이나 가녀린 흐느낌. 심지어 미약하게 ‘살려주세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까지.
“폐하? 리엘라 양?”
조심스레 안으로 고개를 돌린 제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원 가운데가 난장판이었다. 처음엔 테이블만 넘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옆에 헤르한과 리엘라가 함께 엎어져 있었다.
“폐하! 리엘라 양!”
제스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자 바로 뒤에 있던 아시온도 정원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폐하! 이게 대체 무슨……!”
“리엘……! 어?”
제스가 헤르한을 일으키는 사이, 리엘라 쪽으로 간 아시온이 당황함에 찬 외마디 탄식을 뱉었다.
맨바닥을 뒹굴고 있는 게 리엘라가 아닌 엉뚱한 여자였던 것이다. 심지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여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입가에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뭡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
그때였다.
아시온이 부축해서 일으켜주자마자 여자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냅다 밖으로 뛰기 시작했다. 발을 절뚝이다가 퍽 자빠졌는데도 여자는 네발로 기어가면서까지 무작정 앞만 보고 도망쳤다.
아시온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곧장 여자를 쫓아가려고 했으나, 제스가 그런 아시온을 불러 세웠다.
“아시온! 저 여자는 그냥 내버려 둬!”
“하지만 아무래도 수상…….”
“그냥 둬! 폐하가 더 위급해!”
다급한 말에 돌아온 아시온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왜 이러시는 거야? 폐하가 왜…….”
“발작 같아.”
“뭐!?”
주군과 내내 같이 있던 여자가 리엘라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보다, 또 그런 여자가 섬뜩한 꼴로 도망쳤을 때보다 더, 아시온은 더 크게 경악했다.
“폐하를 맡아줘.”
아시온에게 주군을 넘긴 제스는 곧장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넘어진 테이블. 쏟아진 술. 깨져버린 유리잔.
황급하게 잔디밭 위를 훑는 제스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다가 바닥 어딘가의 유리 파편을 짚어 피를 철철 흘릴 지경에야 제스는 단서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헤르한에게로 돌아왔다.
“폐하. 폐하! 제 말이 들리십니까? 폐하?”
“……으. ……으윽.”
헤르한은 대답 대신 고통에 찬 신음만 내뱉었다. 이마엔 땀이 비 오듯 했고 얼굴은 핏기가 전부 가신 듯이 창백하기만 했다.
헤르한은 제스와 아시온도 알아보지 못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는 듯 초점이 없었다.
“왜? 왜 갑자기 발작이 온 거야?”
“몰라. 발작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있어 봐. 이, 일단 비상약이라도……!”
당장 약을 가지러 갈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제스는 곧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입을 턱 벌렸다. 저번 검진 이후로 비상약 여분을 만들어두는 것을 깜빡 잊은 것이었다.
“제스. 안 되겠어. 내가 여기 있을 테니 넌 나가서 빨리 가서 도움을 요청해!”
“네가 근위대장이고 내가 주치의인데 누굴 불러오라고!?”
“제스! 정신 차리고!”
혼이 빠져있던 제스는 아시온의 외침에야 당장 자신이 찾아내야 할 사람이 누군지 깨닫고 미친 듯이 호수궁으로 내달았다.
리엘라 블리니테.
주군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녀뿐.
‘제발……. 제발, 리엘라 양…….’
하지만 리엘라는 호수궁 안에 없었다.
“어머……. 리엘라 님이요? 아, 안 보이시는데…….”
“안 보이다니, 그게 무슨!”
“아침부터 침실에 안 계시기에 본궁에 가셨나 했죠. 오늘은 폐하께서 오시는 날이니까 일찍부터 마중을 나가셨나 하고…….”
그때 영 멀뚱거리기만 하는 시녀들 사이로 키가 작은 단발머리 소녀가 ‘후아암’ 하품을 하며 나왔다. 리엘라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시녀, 루였다.
제스는 당장 루의 어깨를 잡았다.
“리엘라 양이 언제부터 자리를 비웠습니까?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네? 어……. 그, 글쎄요. 궁에 안 계시나요? 전 어제 일찍 잠들어서……. 어젯밤부터 로리엘이 직접 모시겠다고 했는데……?”
로리엘.
그 이름에 제스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정원에서 도망친 여자가 로리엘 아니었던가?
‘잠깐. 그 시녀가 입고 있던 옷……. 그거 분명히 어제 내가 리엘라 양 입히라고 줬던 드레스 같은데…….’
제스의 머릿속은 백지장이 되었다.
‘제기랄.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끊임없는 소음과 진동에 리엘라는 구역질을 하듯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운 와중에 머리가 깨질 듯이 어지러웠다.
위로 보이는 천장이 낮았다. 지진이 난 것처럼 누운 자리가 울리는 것에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니, 웬 마차 안이었다.
‘마차……?’
한동안은 꿈속인가 싶을 정도로 현실이 와 닿지 않았다. 내가 마차를 타고 어딜 가는 중이었던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불현듯 정신이 들면서 등허리에 소름이 바짝 돋은 건 마차 전면에 난 창을 통해 말을 몰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뒤였다.
“이…… 이엘!”
리엘라의 부름은 마치 비명 같았다.
이엘은 리엘라가 깨어난 것을 알았으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차는 전속력이었다.
“이엘!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여기가 어디죠?”
제 손목이 묶인 채라는 걸 리엘라는 그제야 알아챘다.
자신이 평소에 입던 얇은 실내복 한 장 차림이라는 것도, 또 이엘과 자신 외에는 여기에 아무도 없다는 것도.
명백한 ‘납치’였다.
‘하지만 왜 나를? 내가 자기 정체를 알아서? 날 처리하려고?’
리엘라는 주먹을 꽉 쥐고서 앞을 향해 소리쳤다.
“이엘! 당장 멈춰요. 마차 세우라고요! 이엘!”
이엘은 당연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리엘라는 다급하게 주변을 살피다가 마차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콰쾅!
마차는 한창 빠르게 달리고 있었던지라, 열린 문짝이 무게와 속력을 이기지 못하고 덜컹거리다가 떨어져 나갔다.
이엘은 그때서야 말의 속도를 줄이면서도 끝까지 뒤를 돌진 않았다.
“이엘!”
“위험합니다. 얌전히 앉아 계십시오.”
“마차 멈춰요!”
“난동을 부려도 대사님을 구해줄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뛰어내리겠어요!”
이엘의 등이 약간 움찔하는 게 보였다. 리엘라는 기세를 몰아 더 크게 외쳤다.
“정말이에요!”
“대사님.”
“진짜 뛰어내릴 거예요!”
리엘라는 앉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마차가 심하게 덜컹거리는 데다가 문짝도 떨어져 나가 정말 자칫하면 추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엘라는 이엘이 마차를 세우리라고 확신했고, 예상은 적중했다.
“무슨 생각이십니까? 추락하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깊은 숲속 한복판에서 멈춘 마차.
마부석에서 내린 이엘은 곧장 리엘라를 마차 밖으로 끄집어내며 크게 외쳤지만, 리엘라는 굴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내가 마차에서 떨어져 죽지 않아도 이엘 경이 날 죽일 거 아니었나요?”
피하지 않고 빤히 응시하는 시선에 이엘은 한동안 입술을 깨물다가 겨우 대꾸했다.
“제가 대사님을 왜 죽입니까?”
“내가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후손’을 찾고 있다는 걸.”
이엘은 쓰게 웃었다.
역시 다 알고 있군.
그런데 그다음 이어진 리엘라의 말이 조금 이상했다.
“대체 폐하를 어떻게 할 작정이에요? 폐하가 엔릴의 후손이라는 걸 고발해서 황위에서 끌어내리기라도 하려고요?”
“……제가 폐하를 노리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 알고 있으니 모르는 척하지 말아요!”
그렇게 말하며 리엘라가 제 목덜미 안쪽에서 끄집어낸 건 이엘의 목걸이였다.
“이거. 엔릴의 후손을 판별해내는 도구였죠? 폐하 앞에서 색이 변하는 걸 똑똑히 확인했어요.”
아.
이엘은 그제야 깨달았다. 리엘라는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아직 온전한 진실에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맞습니다. 그건 ‘후손’에게 반응하는 마석입니다. 엔릴의 후손 앞에선 파랗게 변하죠.”
“역시 그렇…….”
“안투의 후손 앞에선 붉게 변하고요.”
“……!”
그 말에 리엘라는 이엘에게 덤비려던 것을 잊고 곧장 멍해졌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제가 찾던 것은 안투의 후손이었습니다.”
사실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 리엘라를 향해 이엘은 쐐기를 박았다.
“대사님. 바로 당신 말입니다.”
“폐하께서 아직도 말씀 안 하셨나 보군요. 지금쯤이면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장난치지 말아요.”
“이 자리에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당장 그 목걸이를 벗어서 멀리 던져보십시오. 원래대로 까맣게 변할 테니까.”
“거짓……말.”
‘원래대로, 까맣게.’
이엘의 말이 맞았다.
리엘라가 목걸이를 벗어 멀찍이 모래 무덤 위에 던지니, 불이 사그라지듯 붉은빛이 희미해졌다.
그러다가 다시 다가가 집어 들면 또 화르륵 타는 듯 붉은색으로 변했다.
‘원래 늘 이렇게 붉은 게 아니었단 말이야? 안투의 후손에게 반응하는 거라고?’
리엘라는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며칠이나 제 것처럼 목에 걸고 다녔던 이 목걸이가 어째선지 처음 보는 물건처럼 낯설어 보였다.
‘안투의 후손’이라는 말도 그랬다.
온갖 연구 서적을 통해서, 또 헤르한의 입을 통해서 들었던 말인데도, 리엘라는 그게 꼭 난생처음 듣는 말처럼 어렵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어떻게 안투의 후손이야?’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할 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안투의 후손은 모두 사라졌다면서.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이해가 안 돼요. 그런데 딱 하나는 분명히 알겠어요. 내가 정말 안투의 후손이고, 그래서 이엘 경이 처음부터 날 노렸던 거라면…….”
무표정한 얼굴로 조금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던 리엘라는 별안간 바닥에서 돌을 하나 주워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이엘이 당황한 사이, 리엘라가 던진 돌이 마차의 유리창을 깼다.
와장창.
리엘라는 바닥으로 떨어진 유리 파편 중 가장 크고 날카로운 것을 집어 들어 자신의 목에 갖다 댔다.
“내가 이러면 이엘 경이 몹시 곤란해지겠네요.”
“대사님!”
“맞죠? 나 지금 제대로 이엘 경 협박하고 있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