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난잡한 꼴이군. 그대 소원처럼.
(81/154)
81 난잡한 꼴이군. 그대 소원처럼.
(81/154)
#81 난잡한 꼴이군. 그대 소원처럼.
2022.04.07.
‘저거.’
방 한구석, 얇은 이불에 둘둘 쌓인 몸체를 향해 이엘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게 리엘라임을 알아본 이엘의 입이 얕은 탄식으로 벌어졌다. 그의 붉은 입술은 곧 악물렸다.
로리엘은 험악해진 이엘의 표정에 잠깐 주춤했다가 이내 뻔뻔하게 눈을 부릅떴다.
“뭐, 침대에 고이 눕혀놓기라도 했어야 해요? 나 혼자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만도 힘들었거든요?”
이엘은 로리엘을 더 노려보다가 그냥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이 어떻게 로리엘을 탓할 수 있겠는가. 리엘라를 빼앗으러 온 주제에.
저나 로리엘이나, 그레타 왕녀가 짜 놓은 너저분한 판 위에서 움직이는 말이라는 건 매한가지였다.
이엘은 그저 바닥에 누운 리엘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고맙죠?”
그때 이엘의 근처로 온 로리엘이 말했다.
“제 덕에 손 안 대고 코 풀게 됐잖아요.”
이엘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대신 리엘라가 숨은 잘 쉬는지를 확인하고, 이불로 리엘라의 몸을 더 잘 여며주기만 했다.
로리엘은 그런 살뜰한 보살핌이 우습다는 듯이 코웃음을 픽 뱉었다.
“고상한 척하기는. 대단한 순정 나셨네.”
“당신은 앞으로 어쩔 작정입니까?”
“뭐가요?”
“내가 대사님을 데리고 떠난다고 능사는 아닐 텐데요. 황제 폐하를 어떻게 혼자 감당하려는 겁니까?”
“풉. 전 뒤에 숨어서 입맛만 다시는 보좌관님이랑 달라요. 저는 제 몸으로 당당히 부딪쳐서 폐하의 곁을 차지하고 말 거예요.”
‘황제의 곁을 차지할 거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왕녀가 예고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듯한 말에 이엘이 고개를 비틀자 로리엘이 비소를 머금었다.
“제가 못 해낼 거라 생각하시는 거죠?”
“그런 문제가 아니라…….”
“걱정 마세요. 확실하게 성공할 거니까. 제겐 이게 있거든요.”
그러고서 로리엘이 자랑하듯 꺼내 든 것은 새끼손가락만 한 작은 유리병.
그 안에서 춤추는 분홍빛 약물을 알아보고 이엘이 눈을 크게 뜨자 로리엘은 조금 주춤해서 변명을 덧붙였다.
“뭐, 처음만 약 기운을 좀 빌리겠다는 거예요. 폐하도 막상 날 안으시면 저 볼품없는 몸보다 내 몸이 훨씬 더 좋다는 걸 아실……. 이, 이봐요!”
이엘이 로리엘의 손에서 약을 낚아챘다.
로리엘은 곧장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덤벼들었고, 이엘은 그 틈에 약병에 새겨진 표식을 똑똑히 확인했다.
“이봐요! 그쪽도 ‘사랑의 묘약’이 탐나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내 거니까 꿈 깨요!”
‘대체 무슨 소릴? 그건 사랑의 묘약이 아니라 맹독인데. 특히 능력자에겐 더 치명적인…….’
아무것도 모르고 약을 다시 빼앗아간 채 씩씩거리는 로리엘을 보며 이엘은 드디어 그레타 왕녀의 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왕녀에게 속은 거로군. 바보같이.’
그 와중에도 로리엘은 약병을 품 안 깊숙이 집어넣고는 보란 듯이 애지중지했다. 당신에게는 이 귀중한 것을 한 방울도 내어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엘은 그런 로리엘을 싸늘하게 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어갔다.
당장 말 한마디면 이 어리석은 시녀와 황제를 모두 구할 수도 있겠지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다시는 볼 일 없기를 바라요. 두 분 모두.”
이엘은 리엘라만을 안아 들고 그냥 돌아서 버렸다.
이엘과 리엘라가 떠난 후.
드디어 호수궁 침실을 완벽하게 독차지하게 된 로리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리엘라의 옷장을 파헤쳤다.
평소 탐났던 리엘라의 옷이나 액세서리들을 전부 제 것처럼 가지고 놀던 로리엘이 마지막으로 손을 뻗은 것은 은빛 상자였다.
“세상에……. 너무 아름답잖아! 오스테 산 실크인가? 이 비즈는 다 뭐야? 와…….”
상자 안에서 드레스를 꺼내 올리는 로리엘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로리엘은 당장 거울 앞으로 가 제 몸에 옷을 대보며 기쁘게 웃었다.
의상에 어울리는 구두와 목걸이까지 다 갖추고 이제 남은 것은 딱 하나.
‘이제 여왕의 태양만 이 손가락에 딱 끼면 되겠어.’
거울 속, 완벽하게 아름다운 제 모습에 로리엘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후후. 황후가 따로 없네.’
*
다음날, 로리엘은 날이 채 다 밝기도 전에 빠르게 호수궁을 나섰다.
이른 시간인데도 본궁 연회장은 벌써 준비로 부산스러웠다.
오후에 예정된 것은 헤르한이 황제로 즉위한 후 처음으로 열리는 정기연회. 일 년 만에 친황제파 귀족들이 회합하는 그 자리에서, 헤르한은 리엘라를 자신의 피앙세로 공표할 계획이라고 했다.
‘청혼하자마자 바로 발표까지 하고. 그렇게까지 급하게 서두를 거 있나? 그 여자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아! 아니네. 그러고 보니 정말 도망갔지?’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광대들의 연극도 이 정도로 재미있진 않았는데.
로리엘은 자꾸 ‘큭큭’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서 연회장 뒷문으로 향했다.
“폐하의 명으로 왔습니다.”
하도 당당한 태도에 뒷문을 지키고 서 있던 병사가 얼결에 옆으로 물러났다.
로리엘은 몸에 치렁치렁하게 두른 로브를 더욱 단단히 여미며 발을 뻗었다.
실내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달콤하고도 시원한 풀내음이 기분 좋게 감돌았다.
유리로 마감된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고, 잘 조경된 꽃과 나무들도 참 아름다웠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럼 완벽한 와중에 가장 찬란한 부분은 단연 가운데 서 있는 황제 헤르한이었다.
“왔나?”
꽃나무에 기대어 있다가 그늘 밖으로 나오는 황제의 모습에 로리엘은 숨이 멎는 듯했다.
황제는 평소에도 멋졌지만 오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눈, 다정하고 화사한 미소까지.
‘저런 남자가 조금만 있으면 내게 애타게 매달리게 된다는 거지?’
들끓는 흥분에 로리엘의 눈앞이 아찔했다. 벌써 황제의 품에 안기기라도 한 양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런 로리엘을 향해 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오던 헤르한이 몇 걸음 만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이 실망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들어선 이가 리엘라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안 것이었다.
“영애.”
“예.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습…….”
“리엘라는?”
다짜고짜 리엘라를 찾는 태도에 로리엘의 입가가 살짝 경련했다.
“리엘라 님은 아직 시간이 더 걸릴 듯합니다. 그 전에 제가 폐하를 도울 일은 없을지 걱정이 되어 와보았습니다.”
“이쪽 준비는 됐어. 리엘라는 언제쯤 오지?”
“아마 곧……. 반지는 무사히 구하셨나요?”
“그래. 덕분에 순조로웠다. 그런데 혹시 리엘라가 눈치를 챈 것은 아니지?”
어떤 화제를 꺼내 보아도 말끝마다 리엘라를 찾는 황제.
로리엘은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런 황제의 옆쪽에 세팅된 테이블 위를 살폈다. 꽃다발과 반지가 들어 있는 작은 벨벳 상자. 그리고 두 잔의 샴페인.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어요. 폐하께서 출장 가신 틈에 리엘라 님의 행동이 좀…….”
“리엘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특별한 보고는 받지 못했는데?”
헤르한의 얼굴이 긴장으로 일그러졌다.
“말씀드리기가 송구하오나…….”
로리엘은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눈을 치뜨며 헤르한의 애를 태웠다.
얘기할락 말락 뜸을 들일 때마다 헤르한의 입술이 덩달아 움찔거리는 것이 묘하게 색스러워 보였다.
‘이제 저 고귀한 입술로 날 짐승처럼 탐하실까?’
로리엘은 안달 난 속내를 꾹 감추고서 테이블 위의 샴페인 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소매 안에 감춰두었던 약을 재빠르게 황제의 잔 안에 흘려 넣었다.
“폐하. 제 말씀을 듣기 전에 일단 목을 좀 축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헤르한은 망설였다. 그 샴페인은 리엘라와 함께 건배하고자 준비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심상치 않은 로리엘의 표정이 자꾸만 헤르한의 긴장을 부추겼다.
술이야, 다시 따라두면 될 테지.
헤르한은 로리엘이 건넨 샴페인을 한입에 다 털어 넣었다.
그렇게 타는 목을 달래고 빈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로리엘이 뒤에서 헤르한의 등을 대뜸 안아왔다.
“영애!”
헤르한은 깜짝 놀라 로리엘을 뿌리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리엘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것인지 걱정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어떤 예상에도 다 빗겨나간 것이었다.
제 손으로 스윽 로브를 벗는 로리엘. 그 검은 베일 아래 드러난 은빛 드레스.
그건 리엘라에게 입고 오도록 지시한 드레스였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제야 헤르한의 목소리에 노기가 깃들기 시작했다. 푸른 보석처럼 반짝거리던 그의 눈에 가득 들어찬 것은 살기가 등등한 의구심이었다.
로리엘은 당황했다. 지금쯤이면 황제는 말을 걸 정신도 없이 자신을 덮쳐올 줄 알았는데.
‘약효가 나타나려면 시간이……. 시간이 좀 걸리는 건가?’
로리엘의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폐하, 그게, 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황제의 눈빛이 섬뜩했다.
로리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놈의 약발은 대체 언제 나타나는 걸까?
“다 리엘라 님이……. 리엘라 님이 시키신 일이에요.”
“뭐라고?”
“사실 리엘라 님은 간밤에 떠나셨어요. 더 이상 폐하의 옆에 있고 싶지 않다면서……. 이 옷과 보석도 전부 제게 주고 가셨습니다. 저보고 대신 폐하의 곁을 지키라고…….”
로리엘은 최대한 말을 느리게 했다. 일부러 훌쩍거리고 중간중간 울음 섞인 심호흡도 해가며 시간을 있는 대로 끌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런데도 황제는 무감했다. 로리엘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아주 지루한 농담을 대하듯 냉소적인 얼굴로 출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혼이고 뭐고, 당장 리엘라를 직접 찾아오겠다는 듯이.
“저, 정말입니다! 폐하! 믿기지 않으시거든 당장 궁을 샅샅이 뒤져보세요. 리엘라 님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로리엘은 황제에게 달려들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러는 내내 마음속으로는 애타게 주문을 외웠다. 약효는. 약효는 대체 언제!
“이엘 경과……! 이엘 보좌관과 함께 떠나셨어요!”
그제야 헤르한의 발이 우뚝 멈추었다.
로리엘은 당장 네발로 기듯 땅을 짚고 일어나 황제 앞에 섰다.
‘아, 드디어!’
헤르한의 눈이 멍했다.
이엘 보좌관 얘기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드디어 미약의 효과가 도는 것인지.
“폐하…….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진정하세요……. 네? 폐하. 저를 보세요.”
로리엘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 순간 황제가 크게 움찔했다.
로리엘의 심장도 덩달아 철렁 내려앉았지만, 다행히 황제는 제 손길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숙여 자신을 아주 강렬하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통했어. 약이 통했다고……!’
로리엘은 황제의 맹렬한 눈빛에 담긴 사념이 자신을 향해 솟구치는 정욕이라는 걸 확신했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짜릿했다.
어떻게 해? 당장 여기서 안겨? 잔디밭 위는 조금 난잡하지 않나? 아닌가? 난잡할수록 좋은 건가?
로리엘은 한술 더 떠 다른 손으로 황제의 볼을 만지고 이내 턱까지 쓰다듬었다.
맨살에 손길이 닿음과 동시에 황제의 동공이 흥분으로 또 한 번 잘게 떨렸다.
로리엘은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폐하의 옆엔 제가 있을게요. 전 리엘라 님과는 달라요. 전 영원히 폐하의 사람이니 부디 저를 품어 주…….”
그때였다.
다시 초점을 되찾은 헤르한이 눈을 번뜩이기가 무섭게 거친 손길로 로리엘을 뜯어냈다.
“폐, 폐하!”
짐짝처럼 팽개쳐진 로리엘은 중심을 잡으려고 아무 데나 짚었다가 옆의 테이블과 함께 와장창 넘어졌다.
로리엘의 머리 위로 샴페인이 쏟아졌고, 바닥에 떨어진 음식이 짓이겨진 채 팔다리에 지저분하게 들러붙었다.
정신이 얼얼한 그녀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리엘은 엄습하는 두려움에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난잡한 꼴이군. 그대 소원처럼.”
황제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로리엘의 심장을 관통했다.
헤르한은 천천히 허리를 숙이더니, 돌처럼 굳어버린 로리엘의 턱을 강하게 쥐고 들었다.
“어떻게 더 난잡하게 죽여줄지는 천천히 고민해보지. 그 전에 리엘라를 어디에 팔았는지 말해.”
“폐, 폐하. 아이, 으어, 저으…….”
“어서. 더 못 참고 이대로……. 죽여 버리기 전에.”
리엘라가 어디로 갔는지 말을 하라면서, 정작 으스러트릴 듯 로리엘의 턱을 쥔 손에는 더 강한 힘이 들어갔다.
로리엘은 치욕과 고통에 버둥거리면서도 벌어진 턱 아래로 침을 질질 흘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