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 이엘의 선택 (80/154)


#80 이엘의 선택
20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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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바이스가 과연 제 발로 오겠습니까?”

리엘라는 부대장 필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성문 앞에 기사들을 세워놓은 지 벌써 두 시간. 그들 옆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면서 정작 리엘라도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이엘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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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체포령을 내려주십시오. 저희가 직접 잡아 오겠습니다.”

기사들은 이엘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이제 와서 자백을 요구한다고, 지금껏 숨어 있던 그가 스스로 나서줄 확률은 낮았으니까.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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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분만 더 기다려보죠.”

리엘라는 가느다란 미련을 붙잡고 기다렸다.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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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바이스가 성문 앞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의 말을 타고 도망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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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결국…….’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리엘라는 눈을 살포시 감고 숨을 골랐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옆에 대기하던 기사들에게 당장 이엘을 수색해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릴 참이었다.

바로 그때, 에릭이 급하게 말을 몰아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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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님. 현재 이엘 바이스의 가택 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에릭에겐 이엘의 뒤를 쫓는 대신 그의 집 근처에서 대기하며 동태를 살피라는 지시를 내린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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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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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바이스가 집을 비운 틈을 타 괴한들이 침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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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의 가족들은요? 아직 그 집 안에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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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암담한 상황에 리엘라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부대장 필은 리엘라에게 지시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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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까요? 이엘 바이스를 쫓을까요? 아니면 그자의 가택으로 갈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 리엘라는 한참 어지러운 고민 속에서 헤맸다.

그 어떤 답에도 확신이 들지 않아 혼란스러울 때, 리엘라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찾는 이는 바로 헤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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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전 어떻게 해야 하죠? 폐하라면 어떻게 하셨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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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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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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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미 떼기는. 설마 내가 언제부터 네 처절한 짝사랑을 눈치챘는지, 그런 얘기나 하자는 건 아니지? 피차 시간에 쫓기는 처지에.”

그레타의 입꼬리가 거만한 웃음으로 올라갔다.

이엘은 눈살에 힘을 주며 말을 아꼈다. 짝사랑이 어쩌고 하는 얘기만 운운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왕녀는 리엘라의 정체나 연맹의 존재에 대해선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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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이엘의 의문에 답하듯 그레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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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내가 지은 죄가 조금 많아야지? 이 업보를 풀지 않고 그냥 떠나자니 양심에 가책이 심해서, 가기 전에 좋은 일 좀 하려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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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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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랑의 큐피드를 해주겠다고. 내가.”

그레타는 계속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뜻을 알 수 없기에 더욱 섬뜩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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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황제가 돌아올 거야. 그때를 노려서 리엘라를 데리고 떠나.”

이어진 말에 이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없는 사이에 일을 벌이는 것도 힘들 마당에, 황제가 돌아올 때를 노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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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가 대사님을 얼마나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는지 모르시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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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누구보다 잘 알아. 다시 말하면, 황제의 보호 없이는 리엘라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도 잘 알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황제는 황궁으로 돌아오는 즉시 무너지게 될 거니까.”

이엘은 왕녀의 마지막 말에 순간 반박하려던 말들을 다 잊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황제가 무너지게 될 거라고? 황실에 암살자라도 숨겨놓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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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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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네 알 바가 아니고. 난 그냥 예정된 사실을 알려줄 뿐이니 넌 결정만 해. 설령 당신이 끝까지 리엘라를 어쩌지 못한다고 해도 난 크게 상관없어. 어차피 황제만 사라지면 리엘라는 이러나저러나 처참한 신세가 될 테니.”

그레타가 이엘에게 한발 가까이 다가섰다.

내내 미소 짓던 그레타는 어느새 눈썹 양 끝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한껏 가련한 척하나, 이엘의 눈에는 그저 가증스러워 보이기만 하는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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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거야? 우리 불쌍한 리엘라를 그냥 둘 거야? 황제 시체나 끌어안고 같이 죽으라고? 그보단 네가 데려가서 사랑해주는 편이 리엘라에게도 더 좋은 일이 아닐까?”

토닥토닥.

마치 진심으로 당신을 응원하기라도 한다는 듯이, 그레타는 이엘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다시 말을 타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이엘은 완전히 홀로 남겨지고서야 머리를 뒤로 젖히며 괴롭게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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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왕녀는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난 대체 무슨 선택을 해야…….’

골목의 낮은 건물 너머, 황궁이 있을 곳을 노려보며 이엘은 이를 악물었다.

착잡한 그의 앞에 놓인 선택지들은 하나같이 제 영혼을 좀먹는 것이었다.

왕녀의 제안대로 움직이든, 모든 것을 밝히고 자멸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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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시간이 더 걸리겠어. 일단 가족들을 먼저 대피시키고 다시 움직여야 해.’

이엘은 그늘진 골목길을 통해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런 그를 반긴 것은 처참하게 부서져 너덜거리는 현관문. 그리고 종잇장처럼 찢기고 망가진 집기들로

아수라장이 된 집안 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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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엘! 대체 어딜 갔었던 거야? 완전 난리가 났었다고!”

골목 바깥에서 덜덜 떨던 이웃이 다가온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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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놈들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소리를 지르고 이 골목을 다 때려 부수고!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한참 난동을 부리다가 어딘가로 가버렸는데……!”

이엘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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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가족들은요? 제 가족들은 못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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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네. 우리도 피해 있느라고……. 다시 와봤을 땐 아무도 없었어. 생각해보니 누가 끌려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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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한발 늦은 것을 알아챈 이엘은 살갗이 으스러지도록 맨주먹을 바닥에 내다 꽂았다.

난장판이 된 집안 바닥에는 가족들이 미처 다 챙기지도 못한 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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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맹 놈들. 기어이 내 가족들을……!’

악다문 입안에서 피 맛이 배어 나왔다.

가야 할 길을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 오만이었다.

쓸모없는 잿더미가 되어 바스러진 선택지들 아래 남아 있는 건 명백히 자신을 옭아맨 목줄뿐임을 이엘은 뒤늦게 깨달았다.

*

초저녁의 선선한 바람에 가슴 속까지 들썩거리는 듯했다.

로리엘은 필사적으로 설레는 기색을 감추고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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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일 새벽쯤이면 폐하께서 도착하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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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후에 있을 연회 전에 청혼을 서두르시려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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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드디어 내일!”

로리엘은 저도 모르게 뛸 듯이 기뻐하다가 애써 정숙함을 되찾았다.

다행히 제스는 그저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난데없는 이벤트니, 정기연회니 신경 쓸 것들이 너무 많아 시녀의 야단법석에 일일이 반응할 정신이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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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입궁하시는 것이니 어디에도 알리면 안 됩니다. 리엘라 양께도 아직은 내색하지 마세요. 폐하께서 내일 직접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으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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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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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다 준비해두었으니 가져가서 리엘라 양을 준비시켜 주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본궁 연회장 뒷문으로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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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 뒷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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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연회장 뒤쪽에 작은 실내 정원이 있습니다. 은밀하게 오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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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바로 나의 결전의 장소가 되겠구나. 후훗.’

로리엘은 눈을 반짝이며 제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호수궁으로 돌아오자 로리엘이 들고 온 상자 주변으로 호수궁 시녀들이 몰려들었다.

폐하께 직접 하달 받은 ‘비밀 임무’라는 말에 시녀 대부분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지만, 문제는 이번에도 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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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혹시 그거죠? ‘프러포즈 준비’?”

루가 속닥거리며 아는 체를 해오자 로리엘은 그런 루를 향해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루는 로리엘을 빼고 호수궁 시녀들 중 황제의 계획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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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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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 드디어 내일인가요? 어떡하죠? 너무 기대돼요! 리엘라 님의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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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루. 이 차 마시고 흥분 좀 가라앉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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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헷. 네. 매번 고맙습니다.”

로리엘은 자신이 건넨 차를 홀짝거리는 루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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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엘 양이 주시는 차는 항상 달콤해서 좋아요.”

차를 몇 모금 마신 루는 그새 노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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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에 맞아 다행이에요. 그 차는 제가 루에게만 특별히 주는 거,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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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 네.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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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리엘라 님은 어디 계세요? 아까 밖에 나가신 이후로 안 보이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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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따라오지 말라고 하셔서. 기사들과 용무가 있으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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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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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훈련을……. 하시는 건가……. 흐아암. 그런데 또 왜 이렇게 졸리죠?”

로리엘은 빙긋 웃으며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하는 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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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는 이렇게 하품할 때 제일 귀엽더라?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으니 일찍 자둬요. 오늘 밤에 리엘라 님은 제가 보살필게요.”

 

*

리엘라가 호수궁으로 돌아온 건 그날 늦은 밤이었다.

기사 에릭의 호위를 받아 침실까지 돌아온 리엘라는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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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 귀가가 늦으셨네요. 저녁 내내 무슨 일을 하셨기에 이렇게 먼지를 뒤집어쓰셨어요?”

리엘라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가 문 앞에서부터 따라붙은 건 로리엘이었다.

리엘라는 그런 로리엘 앞에서 말을 아꼈다. 오늘, 황제의 기사단을 움직여 벌인 작전에 대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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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물을 준비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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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게 해줘요.”

다행히 로리엘은 자세한 내막을 더 캐묻지 않았다.

리엘라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뻐근한 제 어깨를 주무르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은빛 상자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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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자는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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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별거 아니에요! 제가 개인적으로 주문한 물건인데 치워두는 걸 깜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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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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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 준비를 마쳤으니 이만 욕탕으로 드시지요? 피곤하신 것 같아서 특별히 피로 해소에 좋은 입욕제를 풀어두었답니다.”

리엘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종일 긴장한 채로 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무겁고 눈이 침침했다. 은빛 상자에 분명히 적힌 자신의 이름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뜨끈한 물로 가득한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나서는 정신이 더욱 몽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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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해결 못 한 문제가 산더미인데……. 폐하가 오시기 전에 이엘도 잡아야 하고……. 아까 그 괴한들의 정체도 빨리 밝혀야 하고…….’

고민이 짙어서 그런 것인지,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인지, 가뜩이나 고단한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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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안 되는데……. 잠깐만 쉬고 다시 나가서 수색대를 지휘해야…….’

꾸벅꾸벅, 리엘라의 고개가 위아래로 춤을 추었다.

입욕제의 진한 꽃향기가 리엘라의 정신을 단단히 감아 깊은 잠결로 빨아들였다.

리엘라는 그렇게 속수무책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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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

한참 뒤, 로리엘이 욕탕 안으로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다.

욕조 안에서 곤히 잠들어버린 리엘라의 모습에 로리엘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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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롭네. 하늘이 도우시나?’

로리엘은 낑낑거리며 리엘라를 욕조 밖으로 끄집어내, 몸을 닦고 옷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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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 제가 이렇게 씻기고 입혀드리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그동안 참 분수에 넘치는 호사를 누리셨어요. 그렇죠?”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리엘라의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런 리엘라의 젖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는 로리엘의 손길은 어쩐지 애틋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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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람은 각자 자기 자리라는 게 있잖아요. 이제 저는 제게 마땅한 것을 누릴 테니, 리엘라 님은 리엘라 님이 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세요.”

나긋하게 말을 마친 로리엘은 세상에서 제일 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 후로 얼마 뒤, 보초병들도 모두 퇴근한 새벽녘.

방문객이 있을 리 없는 시간에 누군가 리엘라의 침실 문을 세 번 노크했다. 로리엘은 아주 반갑게 튀어 나가서 곧장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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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제야 와요?”

로리엘의 물음에도 문밖에 선 실루엣은 좀처럼 안으로 들어서질 못했다.

경계선에 서고도 끝까지 망설이기만 하는 그를 보니 로리엘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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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더 망설일 시간이 필요해요? 곧 문지기 교대 시간도 끝날 텐데?”

설득을 빙자한 협박에 어둠 속에서 주저하던 이가 결국 앞으로 발을 뻗었다.

침실 안, 등불 하나가 밝히고 있는 미약한 빛의 영역 안으로 이엘이 창백한 얼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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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빨리 데리고 나가요. 나는 나대로 이제부터 또 할 일이 많거든요?”

로리엘은 그런 이엘에게 툭 말하며 뒤쪽의 ‘저거’를 향해 대충 턱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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