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폐하는 내가 지켜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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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폐하는 내가 지켜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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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폐하는 내가 지켜야겠다고
2022.03.24.
열심히 타오르던 촛불이 밑동을 드러낼 때까지 침대 위 두 사람의 몸짓은 그치지 않았다.
파스스.
이윽고 미약한 빛마저 사그라지고 진득한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헤르한은 눈을 감고도 본능적으로 리엘라의 몸을 찾아냈다.
어디가 둥글고 단단한 어깨뼈인지, 어디가 말캉한 입술인지.
어디쯤 손을 뻗어야 리엘라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깍지를 낄 수 있는지도 알았고, 또 어디쯤을 베어 물어야 가장 달콤한 속살을 맛볼 수 있는지도 그는 잘 알았다.
“하아. 폐하…….”
헤르한이 자신을 빠듯하게 채워올 때면 리엘라는 더 애끓는 마음이 되어서 그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사방이 캄캄한 와중에도 헤르한의 눈빛이 보인다는 건, 또 그가 힘주어 깨물고 있는 입술이나 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가 보인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었다.
“힘들어?”
그렇다고 대답해도 멈추지 않을 거면서.
리엘라는 헤르한의 등을 감은 손에 더 힘을 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릿한 느낌이 발끝까지 뻗쳤다. 뇌는 녹는 것만 같았다.
그런 때에 리엘라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애절한 신음 외엔 단 하나뿐이었다.
“……더요.”
더 깊이 안아주세요. 이대로 부서져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셀 수도 없는 절정을 맞이한 이후로도 둘은 한동안 서로를 안은 채로 뒤척였다.
헤르한이 잠을 물리면서까지 버티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직 리엘라가 잠들지 않았으니까.
“설마 아직도 부족한 건 아닐 테고.”
나른한 말에 리엘라는 피식 웃었다.
헤르한의 말이 맞았다.
더 깊이 안아달라던 애원이 그의 오기를 자극한 탓인지, 리엘라는 평소보다도 더 격렬했던 그의 몸짓을 받아내느라 이미 소리 내서 웃는 것이 힘들 정도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은 이유 모를 불안 때문이었다.
“폐하…….”
“응. 너만 괜찮다면.”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의 부름을 또 안아달라는 신호로 알아들었는지 다시 고개를 숙여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리엘라는 그를 뿌리치려 팔을 들 힘도 없어, 아직 열이 식지 않은 이마로 헤르한의 가슴을 누르며 말했다.
“엔릴의 후손들 말이에요.”
“응?”
“엔릴의 후손들은 왜 숨어 지내는 거죠? 왜 신전에 쫓기는 거예요? 다들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들이잖아요.”
이불이 흘러내려 맨몸이 다 드러나는데도 헤르한은 몸을 반쯤 일으켜 의아함이 가득한 눈빛을 쏘아냈다.
“진심이야? 진심으로, 이 시점에 그 얘길 해달라고?”
“네. 물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게 아니라…….”
너무 뜬금없는데, 그 뜬금없는 호기심이 이렇게 애타게 보일 건 또 뭔가.
“내 능력도 참 쓸모가 없군. 네 그 올망졸망한 눈동자 안에 대체 무슨 생각이 어떤 흐름으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헤르한은 피식 웃곤 슬쩍 일으켰던 상체를 숙여 리엘라의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런 뒤 리엘라를 품 안에 꼭 끌어안고, 마치 동화를 읽어주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에 ‘세계연맹’이란 집단이 있었어. 전 세계의 능력자들을 관리한다는 명목 하에 독점하고 통제했던 곳이지. 자연히 엄청난 권력이 연맹으로 몰렸고, 그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지. 그게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전쟁으로까지 번졌고.”
“전쟁이 있었단 얘기는 책에서 봤어요.”
“각 진영마다 자신들이 확보한 능력자를 내세워 싸웠어. 그런데 능력자들끼리의 싸움은 도무지 끝이 나질 않으니까, 타깃은 자연스럽게 능력자를 통제할 수 있는 ‘안투의 후손’으로 옮겨간 거야.”
“아…….”
“서로 앞다투어 안투의 후손을 차지하려 했고. 빼앗길 바엔 차라리 죽여 버렸고.”
안투의 후손은 그렇게 궤멸한 거구나. 능력자들을 앞세운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서.
리엘라는 섬뜩한 이야기에 몸을 떨었다.
기분 탓인지, 그때 헤르한이 자신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안투의 후손이 모조리 사라지고 나니 능력자들이 쇠락하면서 전쟁이 끝난 거야. 누구의 승리도 아니었고, 모두의 패배로 끝난 치욕스러운 역사지.”
“남은 자들은 어떻게 됐나요?”
“연맹은 해체됐고, 살아남은 후손들은 모두 ‘전범’이 되었어. 중립자의 위치인 신전이 그들의 관리와 신병을 도맡게 된 거고.”
“엔릴의 후손이 세상의 지탄을 받는 건 그래서였군요.”
리엘라가 속눈썹을 내리깔며 작게 웅얼거렸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한참 빤히 보다가 물었다.
“파비안이 걱정되어서 그러나? 신전에서 혹사라도 당하고 있을까 봐?”
그 말에 리엘라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부릅뜬 채로 헤르한을 흘겨보았다.
이젠 당신도 분명 알 텐데. 지금 이 순간에 내가 걱정하는 것은 파비안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걸.
“그래요. 맞아요. 파비안이 너무너무 걱정되어서 그래요. 그래서 도무지 잠도 안 오는……!”
덤비듯이 미운 말을 쏟아내는 리엘라의 입술을 헤르한이 뜨거운 입술로 덮어버렸다.
부드럽게 눌러오는 힘에 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캉한 속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젠 내 것인지 네 것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타액으로 서로의 마른 목을 적시다가, 헤르한은 겨우 입을 떼고 말했다.
“하아……. 폐하……”
“난 널 두고 어디로도 가지 않을 테니까 아무 걱정 마. 리엘라.”
*
어슴푸레한 새벽.
리엘라는 겨우 청했던 잠을 놓치고 다시 눈을 떴다. 헤르한은 바로 옆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새벽에 몰래 깨어서 잠든 상대방을 하염없이 바라봐주는 건 언제나 헤르한의 몫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반대였다.
‘폐하……. 헤르한…….’
동터오는 새벽빛처럼 은은한 붉은 눈동자가 조각상 같은 헤르한의 곳곳을 어루만졌다.
헤르한의 눈썹, 콧날, 입술과 턱 끝. 탄탄한 어깨와 잠든 와중에도 리엘라의 손가락을 움켜쥐고 놓치 않는 남자다운 손까지.
‘폐하는 늘 무슨 생각을 하셨었나요? 잠든 절 보면서.’
리엘라는 호흡에 오르내리는 그의 탄탄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면 느껴지는 건 아주 규칙적이고도 맹렬하게 뛰는 그의 심장.
자신의 옆에서, 마치 태초에 하나였던 존재인 것처럼 가까운 곳에서, 뜨겁게 살아 있는 그의 생명.
‘전 제가 더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씩씩하고 더 강해져서, 폐하를 내가 꼭 지켜야겠다는……. 그런 주제넘은 생각을 해요. 참 웃기죠.’
리엘라는 예쁘게 다물려 있는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아주 살포시 포갰다.
*
로리엘은 아주 이른 아침에 황궁으로 돌아왔다.
당연히 부지런히 일이나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화에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아서 일찍이 ‘자신의 전장’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러다간 정말 그 영감탱이에게 시집이나 가게 생겼는데!’
자신이 그런 굴욕적인 혼사를 치르는 동안, 리엘라는 황제의 구애를 받아 황후의 관을 쓸 것을 생각하면 정말 배알이 뒤틀렸다.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약 먹고 죽어버리고 말지.’
이를 꽉 물며 황궁 성문을 통과한 로리엘은 동쪽 호수궁으로 향하다 말고 몸을 틀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하나 남은 카드가 있지 않나?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이른 시간에.”
“왕녀 저하를 뵙습니다. 호수궁 일이 바빠 미처 신경 써드리지 못한 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요.”
그렇게 로리엘이 마지막 보루로 향한 곳은 서궁, 그레타 왕녀의 거처였다.
그런데 왕녀의 행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독기로 반짝이던 눈은 어디 가고 흐리멍덩해진 눈빛에,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안색도 어둡고 얼굴이 수척했다.
‘약혼자가 도망갔다던 소문이 진짜였나……?’
“로리엘 양이 신경 쓸 일 없으니 나가봐요.”
“아, 아닙니다. 짐 정리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곧 왕국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로리엘은 떨떠름한 표정의 그레타에게 고개를 숙이며 거처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왕녀의 약혼자가 있어야 할 방 안쪽이 텅 비어 있었다. 그새 다 가져다 버렸는지, 사내가 쓸 만한 물건도 주변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신이나 나나 소박맞은 꼴은 똑같네요.’
로리엘은 픽 비웃음이 치밀려는 것을 꾹 참고 슬쩍 본론을 꺼내 들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가시네요. 오신 김에 조금 더 머무르시다가 황실의 국혼도 함께 축하하고 가시면 좋을 텐데.”
“황실의 국혼이요?”
“예. 요즘 폐하께서 예물을 알아보고 계세요. 결국 리엘라 님을 황후로 책봉하실 계획이신가 봐요.”
회심의 일격을 던진 것이었는데 의외로 왕녀는 멀쩡했다.
그저, ‘그래, 어련히도 그럴 테지.’ 하며 쓴웃음을 한번 머금는 게 전부였다.
“과연 얼마나 잘 살지, 멀리서 지켜봐야겠네요.”
“네? 그게 다예요?”
로리엘은 저도 모르게 실망한 기색을 비쳤다가 곧장 표정을 고쳤다.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호호. 전 걱정이 참 많이 되어서요. 반대파들이 분명 강경하게 들고 나설 텐데…….”
“폐하가 알아서 하시겠죠.”
“리, 리엘라 님의 남자관계도 그렇고……!”
“남자관계요?”
“네. 이런 말까진 좀 뭐한데. 실은 리엘라 님이 이엘 보좌관과 좀 복잡한 사이세요. 그 문제로 폐하와 여러 번 다투기도 하셨고요.”
로리엘은 거기까지 말하고 눈알을 굴리며 그레타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사실 그레타는 그런 로리엘의 머리 꼭대기 위에 있었다.
‘그래서 뭐. 나더러 대신 리엘라를 끌어내려달라고?’
그레타는 로리엘에게서 돌아선 채로 힘없이 쿡 웃었다.
‘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구나. 뭘 휘두르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무기라도 제대로 된 걸 골라와야지. 고작 그런 추문 정도로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런 게 가능했으면 그레타 자신이 직접 했을 것이다.
실제로 시도하기도 했었다. 수도 없이 파비안을 들먹이면서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해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건 리엘라를 향한 황제의 더 강한 집착, 그리고 자신을 향한 반격이었다.
‘그 결과로 난 파비안을 잃었어.’
그레타는 이제 다 질렸다.
리엘라와 황제에 대한 미움이 삭아서가 아니라, 자기 힘이 다 삭아버려서. 더 덤빌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황제 폐하가 계획하시는 혼사에는 문제가 많…….”
“로리엘 양. 폐하 얘긴 내게 더 하지 말아요. 나는 엄밀히 타국의 왕족인데 내 앞에서 폐하를 욕보이는 건가요?”
“아, 아, 아니요!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어찌 폐하를 욕보이겠어요? 폐하는 국본이시고 대륙의 유일한 태양이신데…….”
그런 자신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되지도 않는 싸움을 부추기는 로리엘이 그레타는 짜증이 났다. 그래서 로리엘을 쫓아내려는 순간, 한껏 억울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서야 깨달았다.
‘아하. 너, 헤르한을 탐내는구나? 그래서 그렇게 리엘라를 못 쫓아내 안달이었어?’
황제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데다가 껍데기도 제법 근사한 남자니까.
여자라면. 특히 몰락한 집안을 살려보겠다고 황실에 들어온 철없는 귀족 아가씨라면, 분명 욕심을 부릴 법한 남자였다.
그레타는 쓰게 웃었다.
‘이게 이런 식으로 풀리나.’
하긴.
자신의 인생은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졌는데, 황제나 리엘라의 인생이라고 같이 무너지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로리엘 양. 오늘 얘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해줄 테니 온 김에 나를 좀 도와줘요. 보다시피 난 곧 떠날 거고, 방 정리를 해야 하는데 처분할 물건들이 좀 있거든요.”
“아, 네……. 뭐……. 그럼 저쪽의 쓰레기 청소를…….”
“아뇨. 그건 말고요. 이 물건 좀 처분해줄래요? 위험한 물건인데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레타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꺼낸 작은 상자 하나를 로리엘에게 건넸다.
밀매상에게서 덤으로 구해둘 때만 해도 이런 식으로 쓰이게 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물건.
“이게 뭔가요, 왕녀님?”
“좀 민망한데. ‘사랑의 묘약’이에요.”
“네? 사랑의 묘약이요?”
로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약이 정말 존재하는 거였단 말이야?
“이걸 마신 사내는 곧장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반한대요. 이성을 잃고 짐승처럼 달려들게 된다나요? 내 신혼 생활에 쓰라고 약혼 선물로 받은 건데, 지금 내 약혼자는 멀리서 요양 중이라 무용지물이 됐네요.”
“아…….”
“의국에 전달하면 안전하게 처리해 줄 텐데 내가 거기까지 갈 시간이 없네요. 로리엘 양이 대신 전해주겠어요?”
“네, 네! 물론이죠. 왕녀님.”
덥석 상자를 받아든 로리엘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레타는 알았다. 로리엘이 이 약을 의국에 전달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란 걸.
그레타는 그제야 비로소 가식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를 머금었다. 파비안이 떠난 후로 처음 웃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