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헤르한의 비밀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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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헤르한의 비밀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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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헤르한의 비밀 통로
2022.03.20.
‘달칵’
조금 더 힘을 주어 밀어보니 옷장 안쪽 벽이 문처럼 뒤로 젖히며 열렸다.
그 뒤로 드러난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통로였다.
‘통로? 이게 무슨…….’
리엘라는 생각하다가 입을 턱 벌렸다.
“폐하. 그런데 대체 어떻게 제 침실에 갑자기 나타나시는 거예요? 한두 번도 아니고?”
“내 능력이지.”
“능력? ……엔릴의 후손의 능력?”
“그래.”
“그럼 폐하는 상대의 마음도 읽으시고, 순간이동도 하시는 거예요? 능력이 두 개나 된다고요?”
“그렇다니까.”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어느 연구 논문을 찾아봐도 엔릴의 후손이 두 가지 능력을 갖는다는 말은 없었는데.
리엘라는 믿지 않았지만 헤르한은 끝까지 시치미만 뗐었다.
‘그런데 그 비밀이 이거였단 말이지. 치사하게. 자기만 혼자 써먹으려고?’
리엘라는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통로는 제법 길었지만 헤르한이 늘 관리하는지 기름이 가득 채워진 등잔이 안을 밝히고 있어서 무섭지 않았다.
중간에 몇 번 꺾이는 구간이 있는 것을 빼고는 갈림길 없이 하나로만 이어진 통로라 헤맬 것도 없었다.
‘생각할수록 진짜 웃겨.’
통로는 좁고 낮았다.
자신이 반듯하게 섰을 때 정수리가 살짝 닿을 정도이니, 황제는 분명 허리를 잔뜩 숙이고 이 길을 지나야 했겠지.
그렇게 어정쩡한 자세로 몰래몰래 제 방에 드나들었을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까 절로 웃음이 삐져나왔다.
‘아. 여기가 출구인가?’
헤르한이 황당해서 웃다가, 또 헤르한이 웃기고 사랑스러워서 웃다가. 그렇게 피식거리다 보니 어느새 출구에 도착했다.
리엘라의 예상대로 출구는 호수궁처럼 황제의 침실 옷장과 이어져 있었다.
리엘라는 기분 좋은 체취가 가득한 블라우스 몇 벌을 옆으로 걷어내고 조심스레 밖으로 발을 뻗었다. 침실 안은 어두웠다.
‘침실엔 아무도 없고. 폐하는 어디 계시지?’
인기척은 바로 침실 바깥, 응접실 쪽에서 들려왔다.
리엘라는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문가에 다가갔다.
갑자기 튀어 나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할 계획은 없었다. 그저 바깥에 있을 헤르한의 모습만 확인해 볼 요량으로 문을 살짝 열었는데.
“……어?”
그 순간 리엘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헤르한. 그리고 그런 헤르한의 앞에 상체를 숙인 채로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는 로리엘이었다.
“……폐하.”
“리, 리엘라!?”
리엘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내 흐뭇한 미소를 걸고 있던 입꼬리도 아래로 축 늘인 채 굳었다.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생각은 절대 없었다. 리엘라는 자신이 황제를 불렀다는 것도 몰랐다.
“밤샘 회의를 하신다더니……. 거기서 로리엘과 뭐 하시는…….”
기분 탓일까?
그 순간 로리엘이 자신을 빤히 보며 일부러 헤르한의 팔뚝을 스윽 만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
리엘라는 뒷걸음질 쳤다.
당황한 황제가 어쩔 줄 몰라 버둥거리다가 자신을 쫓아오건 말건, 다시 옷장 안으로 휙 들어가서 열심히 지나왔던 통로를 다시 역주행했다.
숨이 찰 정도로 뛰는 내내 리엘라의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앞뒤가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이해된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뛰던 리엘라가 예고 없이 우뚝 멈춘 건 한창 비좁은 통로 한가운데에서였다.
‘……이렇게 도망만 치기 싫어. 내가 왜 도망쳐?’
울면서 뒷걸음질이나 치는 건 이제 그만하기로 했었다. 지긋지긋했던 나날들을 떨쳐버렸을 때.
리엘라는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도망칠 때보다 훨씬 더 전투적인 걸음으로 다시 황제의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리엘라는 자신을 뒤쫓아 온 헤르한과 맞부딪쳤다.
“리, 리엘라! 내 말 좀 들…….”
“해명하세요. 폐하.”
“…….”
“해명해주세요. 안 그러면 저 오해할 것 같아요. 그런데 폐하랑 또 오해하면서 싸우기는 싫으니까!”
리엘라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헤르한이 그런 리엘라를 꽉 끌어안아 품에 가둔 탓에.
“도망칠 땐 세상에서 제일 빠르네. 또 놓치는 줄 알고 혼났잖아.”
*
“아, 네……. 로리엘 양 가문의 상단에서 오신 분들이시라고요…….”
“예. 폐하께 상품에 대해 설명해 드리고 있었습니다.”
리엘라는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자리에, 당당하게 턱을 괴고 앉은 헤르한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알았기에 그쪽으로는 절대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보나마나 자신을 놀릴 기회를 기다리면서 우쭐거리는 얼굴일 테니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내실까지 오셔서 상품 설명회를 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어요…….”
어떻게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차라리 대차게 문을 활짝 열었다면 나았을 것을, 문틈으로 헤르한과 로리엘만을 보고 도망친 것이 원흉이었다.
문에 가려 보이지 않던 뒤쪽 공간엔 족히 열 명은 되는 상단 직원들이 있었다. 로리엘의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단에서 출장 온 사람들이었고, 헤르한의 앞에 있던 로리엘도 그저 헤르한에게 카탈로그를 보여주려던 참이었다는 것이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대사님이 침실 안에서 주무시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좀 더 목소리를 낮추었을 것을. 송구합니다.”
직원 대표의 사과엔 어쩐지 리엘라를 히죽거리며 훑는 눈길도 포함되어 있었다.
‘졸지에 일하는 폐하의 침대에서 자다 일어나서 칭얼거린 꼴이 되어버린 건가.’
리엘라는 달아오른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쯤에서 상황을 마무리한 건 헤르한이었다. 그는 시종들을 불러 응접실 테이블 위의 카탈로그를 모두 치우도록 하고 직원들도 이만 내보냈다.
“로리엘 양.”
리엘라는 일부러 시녀 로리엘을 배웅하며 말했다.
“다음부터 폐하를 대할 때는 적당히 거리를 두도록 해요.”
그러자 로리엘의 입가가 묘한 비웃음으로 픽 일그러졌다.
“네. 그러도록 할게요. 리엘라 님이 그새 폐하의 침실에 가 계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런데 저희가 폐하와 나누는 얘기는 정말로 못 들으신 건가요? 다 알고 모르는 척하시는 거 아니고요?”
“……네?”
리엘라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로리엘의 말도 말이지만, 그녀의 싸늘한 표정과 말투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설었다.
“아아, 제 말은.”
로리엘이 눈을 살포시 감고 숨을 들이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평소처럼 우아한 미소를 상냥하게 머금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리엘라 님이 폐하와 사이가 너무 좋으셔서 보기 좋다고요.”
“아……. 네…….”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폐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후후.”
로리엘은 분명 싱긋 웃고 돌아서는데도, 리엘라는 멀어지는 로리엘의 뒷모습에서 날카롭게 돋아난 냉기를 느꼈다.
“리엘라. 이젠 우리 둘뿐인데.”
그때 헤르한이 멍하니 서 있는 리엘라의 허리를 뒤에서 감아 안아왔다.
리엘라는 포근한 온기에 마음을 놓으면서도, 동시에 야속한 마음이 들어 그를 떨쳐냈다.
“……몰라요. 폐하. 미워요.”
“뭐? 왜? 해명은 충분히 한 것 아니었어? 말했다시피 시녀와 단둘이 있던 게 아니라…….”
“알아요. 아는데 그래도 이상하게 폐하가 미워요.”
헤르한이 미운 건가. 아니면 이렇게 쪼잔하게 헤르한을 미워하는 자신이 미운 건가.
“미워하지 마.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얘기해 줘. 리엘라.”
“아뇨. 폐하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게 아니라…….”
리엘라는 바로 눈꼬리를 늘이고 저자세로 나오는 헤르한을 향해 입술을 꾹 물었다.
“맞아요. 잘못한 거 있어요. 왜 로리엘이 팔을 만지는데도 그냥 두셨어요?”
“로리엘이 내 팔을 만졌다고?”
“네. 아까요. 제가 분명히 봤어요.”
“글쎄. 난 네가 방에서 나온 것에 놀라기만 해서. 로리엘도 놀라서 실수한 것 아닐까?”
리엘라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힘을 주었다.
지금 로리엘의 편을 드는 건가?
“그래도 뿌리치셨어야죠! 로리엘은 폐하의 시녀도 아닌데 그렇게 행동하게 두는 건, 그러니까, 폐하의 위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고, 또……!”
리엘라는 열성적으로 항의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또 이 남자의 수에 넘어갔구나.
아니나 다를까 헤르한은 고개를 살짝 틀고 눈꼬리를 잔뜩 휜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때문에 제가 좀스러운 사람이 되어가요.”
결국 리엘라가 한 풀 꺾고 힘없이 읊조린 말에, 헤르한은 웃음을 터트리며 리엘라를 끌어당겼다.
“난 ‘좀스러운 리엘라 블리니테’도 좋아. ‘이해심 많은 리엘라 블리니테’보다 훨씬 귀엽고 예쁜데.”
헤르한은 리엘라를 가까이 끌어안고 흰 목덜미에 제 코를 파묻었다.
곧 촉촉하고 뜨거운 입술이 리엘라의 귀밑부터 가슴 언저리의 속살까지를 이리저리 오가며 도장 찍듯 훑었다.
나른한 목소리로 한 고백처럼, 헤르한의 입맞춤은 장난기가 잔뜩 깃들어 있었다.
등허리를 어루만지는 손길도, 살갗을 지분거리는 입맞춤도, 전부 평소보다 가볍고 간지러워서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로리엘의 표정이 떠오르는 건 대체 뭐람.
보란 듯이 황제의 몸을 건들면서 자신을 도발하는 것만 같던 그 눈빛이 리엘라의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제 폐하의 마음을 알겠어요. 왜 그렇게 파비안을 신경 쓰셨는지.”
그 말에 정신없이 입맞춤을 퍼붓던 헤르한이 그 자세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다.
리엘라는 헤르한의 왼쪽 팔뚝을 어루만졌다. 아까 로리엘이 건드렸던 바로 그 부분.
“폐하는…….”
“…….”
“저만 알고 싶은데.”
“…….”
헤르한이 고개를 들었다.
내내 짓궂은 태도로 리엘라를 놀리던 그는, 어느새 저 자신의 욕정에 지배당해 여유를 잃고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제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죠?”
리엘라가 손을 얹은 부분, 헤르한의 팔뚝이 바짝 깃든 힘으로 더 단단히 불끈해졌다.
헤르한은 리엘라를 다짜고짜 휙 안아 들었다. 침대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다급했다.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린다니. 제대로 욕심을 부리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헤르한은 리엘라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
본가로 돌아오자마자, 로리엘의 주변엔 식솔들이 파리 떼처럼 우글우글 들러붙었다. 제일 야단법석인 건 그녀의 아버지, 이그드니스 백작이었다.
“어때? 거래는 잘 성사되었느냐? 응?”
“아, 아버지. 그게…….”
로리엘은 주먹을 쥔 채로 한 자리에 서서 부들부들 떨었다.
“밤에……, 리엘라 님 모르게 은밀히 들라는 말씀이시지요?”
황제의 제안에 로리엘은 혼절할 듯이 기뻐했었다.
그럼 그렇지, 황제씩이나 되는 남자가 한 여자만 품을 리는 없지, 이제야 나를 알아보는 건가, 하면서 당장 본가로 돌아온 로리엘은 사내의 정욕을 자극한다는 향수까지 일부러 구해서 뒤집어썼다.
그런데 알고 보니 황제가 호출한 것은 그녀 혼자가 아니라 가문의 상단 전체였던 것이다.
게다가 개인적인 용도로 보석을 구매하려 한다는 황제는 안목도 너무나 까다로웠다.
“이게 저희 상단에서 취급하는 보석 중 가장 비싼 것인데…….”
“레틸 산 사파이어? 그것은 너무 흔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호박석 반지는 어떠십니까? 폐하께 참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내가 쓰려는 것이 아니다.”
로리엘은 눈을 일부러 더 순수하게 치뜨고, 말을 아끼는 황제를 자극했다.
“폐하. 어떤 용도로 쓰실 것인지 알려주시면 좀 더 적합한 물건을 추천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선물할 용도이다. 반지로 세공할 생각이야. 아주 중요한…… 선물이니 기왕이면 다이아몬드가 좋지 않을까 싶은데. 영애의 생각은 어떻지?”
그런데다가 황제가 내내 흘긋거린 것은 프러포즈 링의 디자인을 모아둔 카탈로그.
‘지금 리엘라에게 청혼하겠다고? 진심이야? 어떻게 그런 여자를 황후로 올릴 생각을 하시는 거지, 폐하는?’
어떻게든 황제의 마음을 사보겠다는 로리엘의 꿈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상단의 물건이 황제의 눈에 영 차지 않았는지, 거래도 성사되지 않았다.
“뭐라고? 한심하긴! 대체 넌 제대로 하는 일이 무어란 말이냐? 반반한 얼굴 좀 믿고 황실에 들여보내 줬건만 황제 눈에 들긴커녕! 물건 하나도 못 팔아먹을 거라면 그깟 시녀 일도 당장 때려치워라!”
상황을 다 전해 들은 이그드니스 백작은 로리엘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혼담이 들어왔으니 얌전히 결혼이나 하여라.”
로리엘은 백작이 세금 고지서 팽개치듯 내던진 청혼장을 열어보고 이를 악물었다.
“아버지. 저더러 반트 자작가에 시집가란 말씀이세요? 이런 늙고 못생긴 남자하고 결혼하라고요?”
누구는 잘난 황제가 직접 귀한 다이아까지 구해서 바쳐가며 청혼을 한다는데, 나는 이빨 빠진 원숭이 같은 남자에게 팔리듯 시집이나 가라고?
로리엘은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