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절절하게 구애하는 입장 (75/154)


#75 절절하게 구애하는 입장
2022.03.17.


본궁 내실에서 나와 복도를 틀자마자 리엘라는 숨을 고르며 양옆을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품 안에서 감추어 두었던 목걸이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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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색이 변했어. 파랗게.’

이엘의 목걸이, 그 끝에 달린 타원형의 보석. 루비인 줄로만 알았던 그 빨간 보석 일부가 또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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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해. 폐하의 곁에 갈 때만 이렇게 변해.’

리엘라가 종일 헤르한의 곁을 들락날락한 이유는 바로 그걸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간격을 두고 황제의 근처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보고, 혹시나 해서 일부러 황궁 전체를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도 만나보았다.

실험의 결과는 명백했다. 이 보석은 헤르한에게만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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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원리로?’

리엘라는 빨강과 파랑이 뒤섞인 오묘한 빛의 보석을 빤히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중요한 건 보석의 색이 변하는 원리 따위가 아님을. 더 본질적인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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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이 왜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거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리엘라의 머릿속으로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수도 없이 황제와 대립각을 세우던 이엘의 모습.

그림자 상인을 잡으러 갔을 때 그가 저들의 뒤를 밟아 쫓아왔던 것이나, 바로 며칠 전 상처투성이인 모습으로 나타나 이유를 알 수 없이 괴로워하던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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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당신……. 대체 뭘 어쩌려는 생각이야?’

리엘라는 어느새 보랏빛이 된 보석을 꾹 움켜쥐었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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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

정말 리엘라가 자신이 결혼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멍한 헤르한을 두고 제스는 오히려 태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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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혼인이 혼자 진행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말 나온 김에 오늘 승부를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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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를 보란 말은…….”

자리에서 일어난 제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런 제스가 헤르한의 손바닥을 직접 펼쳐서까지 쥐여 준 것은 그가 작성했다는 계약서 초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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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리엘라 양이 사인만 하게 만드시면-.”

꾸깃.

헤르한은 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정사정없이 한 손으로 계약서를 꾸겨서 뒤로 버렸다.

제스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곧바로 자신의 서류철 안에서 또 다른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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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같은 건 됐다 쳐도, 어쨌든 말씀은 꺼내 보셔야죠. 폐하. 이건 누구보다도 당사자와 의논해야 할 문제 아닙니까?”

헤르한이 세 장째 사본을 구겨서 버렸을 때쯤 아시온이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리엘라를 어떻게 황후로 올릴 것인지 생각하기 전에 리엘라의 의중을 묻는 것이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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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이 좋아 의중을 묻는 거지, 그건 프러포즈를 하라는 건데.’

헤르한의 뒷골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제스는 그런 주군의 속내를 기민하게 눈치채고 눈을 샐그러지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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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무서우신 건 아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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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니.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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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양에게 거절이라도 당하실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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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거절? 리엘라에게? 내가?”

그 말에 헤르한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폭소했다.

오늘 집무실에 들어선 이후로. 아니, 지금까지 제스와 지낸 모든 시간을 통틀어서, 가장 크고 우렁찬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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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리엘라에게 거절을 당한다니. 그런 당치도 않은 말을? 넌 우리 사이가 얼마나 깊고 공고한지 모르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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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모릅니다. 관심도 없고요. 제가 아는 건 아무리 사랑이 깊어도 혼인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 정도뿐입니다.”

지지 않고 제스가 받아친 말에 헤르한의 웃음이 뚝 그쳤다. 득의양양하던 얼굴도 다시 잿빛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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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폐하께서 자신이 있으시다니 저희로선 다행입니다. 그래도 준비하실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작위든, 억만금이든. 아예 지방의 성채 하나를 증여하셔도 좋고.”

작위. 억만금. 성채.

구체적인 제안에도 다소 멀뚱거리는 주군의 표정에 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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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빈손으로 가실 참은 아니셨죠? 폐하. 짐승들도 암컷을 꼬실 때는 비장의 미끼를 던져서 유혹하는 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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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더러 선물로 리엘라를 꼬시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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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지요. 절절하게 구애를 하시는 입장이시니까.”

그쯤에서 헤르한이 벌떡 일어났다.

잔뜩 오기가 돋은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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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절절하게 구애하는 입장이 아니다. 우린 대등하게 사랑하는 사이지. 리엘라를 꼬실 미끼 같은 건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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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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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다니까.”

헤르한은 제스의 도발에 한껏 넘어가 콧김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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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여주지. 당장 가서 리엘라에게 혼인 승낙을 받아오겠어. 아무런 꼬임수도 없이, 아주 담백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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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긴 무슨. 아무래도 망한 것 같군.’

어느 때보다도 더 풍성하게 차려진 만찬장 테이블 앞에서 헤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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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입맛이 없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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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리엘라는 열심히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헤르한을 따라 웃었다.

오랜만의 정찬이라 평소보다 차림에 더 신경을 쓴 상태였다.

그래도 호화로운 저녁 식탁에 마주 앉은 것은 늘 그렇듯이 헤르한과 자신, 오로지 둘뿐.

특별히 긴장해야 할 이유는 없는데도 헤르한은 오늘따라 불편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리엘라는 포크 끝으로 바삭한 빵의 끄트머리를 톡톡 건들다가 조용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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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때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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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살짝 물은 것인데도 황제가 뛸 듯이 놀라는 것을 보니, 정말 제 짐작이 맞아떨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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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늘 폐하께 회의 중 너무 성가시게 굴었죠? 그래서 바쁘신데 억지로 시간을 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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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절대 아니야.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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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혹시 정무 보시는 중에 해결이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리엘라는 포크를 내려놓고 대신 그 손을 헤르한의 손등 위에 얹었다.

헤르한의 커다란 손에 비하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손이었지만, 헤르한의 마음을 데워줄 만큼은 온기가 넘치는 보드라운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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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제게도 말씀해주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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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하던 헤르한은 리엘라의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더 넋을 놓고 말았다.

그 순간 헤르한의 눈에는 이미 리엘라가 반짝이는 왕관을 쓴 황후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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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가 황후가 되면 매일 이런 나날이 이어지는 거겠지?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함께 나라를 경영하고. 나와 모든 일상을 같이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까 이건 정말 큰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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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나 부리면서 덤빌 일이 절대 아니었잖아.’

리엘라에게 온전히 제 사람이 되어달라고, 나아가 제국 만민의 어머니가 되어달라고 청하는 일이었다.

여인으로서 사랑만 하기에도 이렇게 크고 대단한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중요한 말을 빈손으로 달랑 와서 할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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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갑자기 어디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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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중요한 일을 놓친 게 떠올라서. 리엘라. 부디 잠깐만. 아주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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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그건 힘들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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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잠깐만, 아무것도 먹지 말고 그대로 기다려줘. 바로 올 테니까.”

그렇게 만찬장을 뛰쳐나온 헤르한은 곧바로 본궁의 집사장을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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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당장 꽃다발을 하나 구해올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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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을……. 지금 바로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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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당장 정원의 꽃이라도 꺾어오든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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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원예장을 불러오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 시간은 걸릴 겁니다.”

헤르한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한숨을 뱉었다.

역시 무리였다. 급한 마음에 일단 뛰쳐나오긴 했다만, 애초에 리엘라에게 정원의 꽃을 꺾어다 준다니 가당키나 한가. 눈발을 뚫고 설원을 파헤쳐서 캐낸 보물을 바친대도 부족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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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얼 준비해야……. 다시 가서 제스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그때 심란한 마음에 만찬장 안을 슬쩍 엿보던 헤르한의 눈에 어떤 장면이 들어왔다.

그의 당부대로 차분하게 그를 기다리나 싶던 리엘라가, 품 안에서 꺼낸 보석 목걸이 하나를 뚫어져라보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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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봤던 그 목걸이? 몹시 아끼는 건가 보군.’

그때야 헤르한은 자신이 리엘라에게 제대로 된 보석 하나 선물해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황실 의전 차원에서 호수궁으로 보낸 것 외에 자신이 직접 선물해준 것은 황성 상점가에서 골랐던 머리핀 하나뿐.

마침 복도 끝에, 저들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는 서궁 시녀들이 보였다.

헤르한은 그들 곁으로 다가가 한 명을 콕 집어 아는 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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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드니스 영애. 리엘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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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폐하를 뵙습니다.”

로리엘을 비롯한 시녀들이 전부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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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괜찮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사적인 질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로리엘을 지목해 건넨 말.

다른 시녀들이 자리를 피해 물러나고, 둘만 남은 복도에서 로리엘은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터져버릴 듯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느라고 그런 것이었지만, 헤르한에게 그런 사정은 알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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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 보석 좋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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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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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애는 잘 알 것 같은데. 이그드니스 백작가의 상단이 보석을 전문으로 취급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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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긴 합니다만……. 어쩐 일이신지?”

기대감을 잔뜩 품은 얼굴로 수줍게 고개를 들던 로리엘은, 이어진 황제의 말에 그만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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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얘기는 오늘 밤에 하지. 이따 사람을 보낼 테니 내실로 들도록 해. 아 참. 리엘라에겐 비밀로 하고 와줬으면 한다.”

 

*

그날 밤, 리엘라는 자신의 호수궁 침실에서 홀로 뒤척였다.

황제는 중요한 잔업이 있다며 본궁에서 밤을 새울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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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회의에, 중요한 잔업에. 아까 저녁을 드시다가 갑자기 뛰쳐나가셨던 것도 그렇고…….’

무슨 일이 있는 걸까? 혹시 이엘에 관한 일을 황제도 눈치챈 것일까?

리엘라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다시 이엘의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제 손바닥 안에서 또다시 붉은 기운만 등등한 보석. 종일 보고 또 보면서 여러 가능성을 고심해 봐도 어쩐지 결론은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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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이 폐하를 노리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리엘라는 정치판의 권모술수 같은 건 잘 몰랐지만, 황제처럼 중요한 위치에 앉은 자가 언제나 많은 위협에 시달린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심지어 헤르한은 더 특별한 사람이 아닌가.

그는 엔릴의 후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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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조차도 엔릴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갔는데. 하물며 폐하가 능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애가 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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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가 걱정돼.’

참 웃긴 일이었다.

황제의 곁엔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고 유능한 부관들이 있는데.

그런데도 리엘라는 왠지 헤르한은 자신이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헤르한의 곁에 있고 싶다는 욕망이라기엔, 그보다 더 가슴 깊은 곳에서 어떤 감각이 절절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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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봐야겠어. 일이 바쁘면 내가 도와드려도 되고. 아니면 옆에서 같이 밤을 새우더라도.’

리엘라는 옷장을 열었다.

야밤이라 시녀들을 깨우기는 미안했다. 특히 루는 요새 피곤한 일이 있는지 잠이 많아져서 얼굴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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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정도만 간단히 걸치고…….’

그때였다.

급하게 옷을 낚아채느라고 허둥대다가 옷장 안쪽을 짚었는데, 그대로 리엘라의 손이 쑤욱 들어가며 옷장 안쪽 벽이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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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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