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나에게 단단히 빠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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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나에게 단단히 빠졌나?
2022.03.13.
“이제 들어가시지요.”
“네.”
리엘라는 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파비안을 태운 마차가 아스라이 멀어지도록.
저녁놀이 붉게 번진 하늘은 꼭 파비안의 마차를 꿀꺽 삼켜버리는 것만 같았다.
“대사님. 안 가실 겁니까?”
“저는…….”
마차가 멀어지는 앞을 보았다가 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던 리엘라는 곧 결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야죠. 제가 있을 곳으로.”
마냥 자신을 찾아와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이를 따라가던 6살 때와 지금은 다르니까.
리엘라는 온전히 제 마음의 소리만을 따라서 움직였다.
리엘라는 다시 황궁을 향해 발을 돌렸다.
그렇게 막 성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을 때 등 뒤의 어디에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본 리엘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폐하.”
헤르한은 리엘라의 부름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성벽에 몸을 기댄 자세 그대로, 쀼루퉁하게 리엘라를 쳐다볼 뿐이었다.
“다 보고 계셨어요?”
“그래.”
“어쩐지 뒤통수가 따갑더라니.”
“뒤통수가 따갑긴 했어? 그런 것치곤 너무 자유분방하게 절절했던 거 아닌가?”
자유분방하게 절절한 건 또 뭐야.
리엘라는 웃음을 터트렸고 그럴수록 헤르한은 더 미간을 찌푸렸다.
“파비안에게 마차를 주고 인사하고 오라고 먼저 말씀하신 건 폐하셨잖아요.”
“마차를 주고, 인사를 하라고만 했지, 그 사내를 울리라고는 하지 않았어.”
파비안이 울었던가.
아~ 파비안의 환한 웃음 안에 깃든 울음을 헤르한이 알아보았구나.
“딱히 제가 울린 건 아니에요. 파비안은 원래 눈물이 많아요.”
“그래서? 눈물 많은 남자가 취향이야?”
리엘라는 헤르한의 얼토당토않은 공격이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울어주시려고요?”
“원하면 해볼게.”
음. 예쁘게 눈물을 또르르 흘리는 헤르한의 모습.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가 우는 모습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리엘라.”
“네?”
리엘라를 부른 헤르한은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제 앞쪽을 향해 턱을 스윽 내밀었다가 다시 당겨왔다.
가까이 오라는 뜻일 거라고 리엘라는 생각했고 그게 맞았다. 리엘라가 다가오자마자 헤르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리엘라를 안았다.
가녀린 몸을 꽉 끌어안고서야 그는 마음이 놓이는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네가 저 사내를 따라가기라도 할까 봐 마음 졸였다고 하면 웃을 건가?”
리엘라는 헤르한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로 부스스 웃었다.
진지한 헤르한에게는 미안하지만.
“자꾸 웃으니까 예뻐서 안 되겠네. 어서 궁으로 돌아가자.”
헤르한은 조금 분한 듯했다.
리엘라는 그가 당기는 것을 버티고 서서 말했다.
“폐하. 갑자기 전에 폐하가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어요. 폐하가 미워지면 미운 티 내지 말고 그냥 조용히 떠나 달라고 하셨던 말.”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네. 카넬 일로 힘들어하셨을 때.”
헤르한은 살짝 인상을 썼다가 눈썹에 힘을 풀었다. 확실히,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있긴 했다.
“정말 그럴 날이 오게 될까요? 제가 폐하가 미워서 떠나게 될 날이?”
“…….”
“아니. 꼭 미워서가 아니더라도. 우리도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될 날이 올까요?”
헤르한이 리엘라를 잡아끌던 손을 놓았다. 그러곤 일부러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리엘라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옛 남자친구를 떠나보내고 심란한 마음을 나한테 떠넘기시겠다?”
“아녜요. 그런 건 아닌데.”
리엘라는 잠시 주춤했다가 말았다.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뻔뻔한 대답에 이번엔 헤르한 쪽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취소할게.”
“네?”
“그때 그 말. 취소하겠다. 내가 미워져도 괜찮으니까 떠나지만 마. 미운 티 팍팍 내고 날 괴롭히면서 평생 내 옆에 있어라. 리엘라.”
황제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렇게 쉽게 자기 말을 번복하셔도 되는 건가.
리엘라는 피식 웃으며 생각 없이 말했다.
“꼭 청혼 같네요.”
마침 리엘라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려고 고개를 숙이던 헤르한은 말캉한 입술이 닿기 전에 우뚝 멈추어버렸다.
“청혼이면 안…… 되는 거지?”
“네?”
“아니. 그게. 청혼이라는 건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청혼은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조금 전까지 리엘라에게 늘 제 옆에 붙어 있으라고 말했던 헤르한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갑자기 꽁무니를 빼며 먼저 궁 안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그 후로 이틀이 지났다.
신전 측에서는 파비안이 잘 도착했다고 연락을 보내왔다. 그를 아무 문제 없이 수용소에 입소시켰다며, 일 년에 두 번 면회가 가능한 날에 대해서도 안내해주었다.
리엘라는 그 안내문을 들고 서궁으로 갔지만 그레타가 만나주지 않았다.
파비안이 떠난 이후로 그레타는 궁 안에만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리엘라는 그레타가 먹을 식사 쟁반 안에 파비안의 짧은 편지와 면회 안내문을 밀어 넣고 나왔다.
“왕녀는 곧 왕국으로 돌려보낼 거야.”
이른 아침, 호수궁 침실에서 일어난 헤르한은 본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며 그렇게 말했다.
“약혼자의 행방에 대해 떠들썩하게 알릴 필요는 없겠지. 왕녀도 지금은 어디로도 나서고 싶지 않을 테니까.”
“네……. 이번 교역 때 함께 돌아가는 것으로 하면 될까요?”
“괜찮군.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아니,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시죠. 대사.”
말로는 사무적인 말투를 꾸며내며 장난을 치면서, 헤르한의 손은 쉼 없이 리엘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돌리며 희롱하느라 정신없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손길을 떨쳐내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그 손에 깍지를 끼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무릎 위로 끌어와 버리는 리엘라의 행동에 헤르한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나저나. 네 보좌관은 아직도 휴가 중인가?”
“아, 네.”
“음. 어쩐지 호수궁 공기가 맑더라니.”
헤르한은 상쾌하게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사실 이엘은 저번에 집무실을 뛰쳐나갔던 날 이후로 줄곧 무단결근 중이었다.
리엘라가 에릭에게 확인해보니 그는 집 안에서 두문불출하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나마 위험한 짓 하면서 돌아다니는 건 아니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리엘라. 오늘 아침은 혼자 먹을 수 있지?”
그때 헤르한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야 혼자 식사하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굳이 왜?
“무슨 일이 있으세요?”
“아주 중요한 회의가 있어.”
“오늘 일정 없으신 거로 알고 있는데요?”
“아……. 아주 중요한……. 비공식 회의야.”
리엘라가 뭔가를 더 캐물을까 걱정이 되었는지, 헤르한은 어울리지 않게 잰 동작으로 나갈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 ‘나갈 준비’의 마지막은 리엘라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것.
그게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가볍게 ‘쪽’ 하고 뽀뽀 정도로만 끝내야 하는데.
“하아. 안 돼. 이러다가 오늘도 못 나가면 안 되지.”
헤르한은 리엘라에게서 힘겹게 떨어져 나와 테이블에 걸쳐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툭, 하면서 뭔가가 아래로 떨어진 건 그때였다.
“이 보라색 목걸이는 뭐지?”
“네? 보라색 목걸이요?”
리엘라는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헤르한이 바닥에서 집어 든 건 이엘의 목걸이였다. 그에게 돌려주기 전까지 보관하고 있던 것인데.
하지만 그건 보라색이 아니라…….
“자세히 보니 보라가 아니네. 붉은색과 파란색이 섞여 있는 건가? 처음 보는 보석인데? 어디서 난 거지?”
리엘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잘 모르는 척 버티다가, 헤르한이 방을 나가자마자 냉큼 달려들어 목걸이를 집었다.
‘정말 한쪽이 파랗게 변했잖아? 원래 이랬던가?’
의아하게 목걸이의 보석을 살피던 리엘라의 눈은 잠시 후 한층 더 커졌다.
조금 전까지 푸르렀던 보석 일부가 다시 붉은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헤르한이 방을 나간 지 삼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땐, 리엘라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완연히 빨간 루비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
“천천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당장 국혼 카드를 꺼내면 반대 여론만 드세질 게 뻔하다니까요. 일단 귀족 사회에 리엘라 양의 명성을 쌓는 작업부터 차근차근하시죠.”
아시온이 말했다. 턱을 괸 채로 픽 코웃음을 친 건 제스였다.
“명성을 쌓든 파벌을 만들든 뜻대로 하십시오. 대신 그 전에 계약서 먼저 써야 하는 거 아시죠?”
“야. 인마. 아직 당사자에겐 얘기도 못 꺼냈는데 어떻게 계약서를 써?”
“그러는 너는, 어느 세월에 쪽수 모아서 리엘라 양을 황후로 올리자고? 그 전에 성녀인 거 들켜서 뺏기는 쪽이 빠르겠네.”
헤르한은 으르렁대는 아시온과 제스가 이제 웃기지도 않았다.
이렇게 진척이 없을 줄 알았으면 그냥 리엘라와 아침이나 먹고 올걸.
그런 그의 마음이 바깥까지 들리기라도 한 것인지, 대뜸 집무실 문이 달칵 열리며 리엘라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리엘라?”
“그 ‘아주 중요한 비공식 회의’ 때문에 다들 식사도 거르셨다고 들어서요.”
리엘라가 싱긋 웃으며 트레이 하나를 들고 들어오자, 제스와 아시온은 기겁하며 자기들 앞의 서류를 감추었다.
다행히 리엘라가 무언가를 알아챈 눈치는 아니었다.
“그럼 전 나가볼게요. 편하게 드시면서 말씀 나누세요.”
“그냥 간다고?”
“네. 이것만 전하려고 잠깐 온 거예요.”
안건이 안건이니만큼, 헤르한은 미련 없이 돌아서는 리엘라를 붙잡을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리엘라의 등장에 잠깐 중지되었던 세 사람의 회의는 조금 뒤에 재개되었다.
“폐하. 가을에 있을 수확제를 이용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리엘라 양을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시키고 인맥을 쌓으면…….”
“그건 됐고. 자. 폐하. 여기 제가 계약서 초안을 만들어 봤으니 읽어보시고 당장 사인하…….”
달칵.
또 뭔데!?
“아직도 회의 중이시죠? 이번엔 차를 가져왔어요.”
또 다시 리엘라의 난입.
제스는 헤르한에게 건네던 계약서를 당장 도로 가져와 어디로 숨기지도 못하고 제 엉덩이 아래에 깔고 앉았다.
그러는 사이 리엘라는 유유히 두 사람을 지나 헤르한에게로 갔다.
“어제 향이 좋다고 이 차를 좋아하셨잖아요. 또 마시는데 폐하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 그래. 고마워. 리엘라.”
“혹시 제가 많이 방해됐나요?”
“저, 전혀.”
네게 청혼할 작전을 짜고 있는데 네가 자꾸 들어와서 얘기가 끊어진다는 설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행히 리엘라는 이번에도 별 꼬투리를 더 잡지 않고 가볍게 퇴장했다.
문제는 그 뒤로도 리엘라의 짧은 방문이 몇 차례나 더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찻잔을 다시 가져가려고요. 제가 아끼는 거라서.”
“……어머. 죄송해요. 아까 접시 하나를 빼놓고 안 가져간 거 있죠?”
“……저녁도 따로 드시나요? 보좌관에게 듣긴 했는데, 그냥 한 번 더 확인하려고요.”
그때마다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 놀라는 두 부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르한은 방금 또 리엘라가 나간 문 쪽을 흐뭇하게 보면서 말했다.
“리엘라가 나에게 단단히 빠졌나 보군. 저렇게 한시도 못 참고 내가 보고 싶을까?”
제스는 그런 주군이 어이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그래서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 그게 아니면?”
“아니면 폐하의 속셈이 들통 난 것일 수도 있죠. 그래서 계속 저렇게 안 하던 짓을 하면서 염탐을 시도하는지도.”
“뭐? 풉. 설마. 그럴 리가.”
제스의 말을 농담으로 듣고 웃던 헤르한의 얼굴이 차차 굳어갔다.
“설마…….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