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내 능력은 널 찾아내는 것 (73/154)


  • #73 내 능력은 널 찾아내는 것
    2022.03.10.


    그날 밤 그레타 왕녀와 파비안을 태운 마차는 아주 조용히 황궁 안으로 들어왔다.

    리엘라는 하나부터 열까지를 모두 챙겼다.

    도착할 시간을 계산해 미리 문지기에게 후방 쪽 성문을 개방해놓도록 했고, 괜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서궁의 시녀들도 일찍이 퇴근시켜놓았다.

    왕녀와 파비안이 쉴 거처도 깔끔히 정리해두었다. 그들이 떠돌고 굶주렸을 것을 대비해, 바로 식사할 수 있도록 음식도 가져다 두었고 욕탕의 물도 데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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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동정하니까 재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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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하니, 왕녀는 리엘라의 머리를 쥐어뜯을 힘도 없다는 듯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리엘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이런 배려가 왕녀에게 더 큰 굴욕감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자신이 직접 마중까지 나가면서 과한 친절을 베푼 건 그래서였을까.

    이렇게 복수하고 싶어서. 이렇게 당신이 망가진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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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나겠구나. 날 이겨서.”

    왕녀가 비아냥거리는 말에 이번엔 리엘라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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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우리가 겨루고 있었나요? 그런 줄 알았다면 신경 좀 더 써드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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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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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요. 아직도 정리할 게 잔뜩 남았는데 벌써 끝이 나면 안 되죠.”

    리엘라는 그레타가 쏜 화살을 그대로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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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 쪽에서 황실에 협조 공문을 보내왔어요. 파비안을 신전 수용소로 보내라고요.”

    그 말에 내내 오만하게 비뚤어져 있던 그레타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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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시간을 드릴게요. 왕국으로 돌아가서 파비안을 숨기시든, 신전으로 돌려보내시든. 두 분이 알아서 선택하세요. 어느 쪽이든 제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뭐……. 승자가 베푸는 은혜쯤으로 생각하셔도 되고요.”

    리엘라는 그 말을 끝으로 유유히 방을 나왔다.

    몇 걸음 떨어지기가 무섭게 방 안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다.

    그레타가 발악하는 소리. 테이블이 넘어지는 소리. 또 파비안이 흐느끼는 소리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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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으십니까?”

    난장판이 된 건 안쪽인데, 아시온은 리엘라를 걱정하며 물었다.

    리엘라는 대답 없이 씁쓸하게 웃고는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아시온은 리엘라를 침실 문 앞까지 배웅했다. 모두가 퇴근했을 시간이라 호수궁 전체가 통째로 어둠에 잠겨 있는데 유일하게 한 군데, 리엘라의 침실 안은 미약하게 밝힌 촛불 빛이 은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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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렸어.”

    조곤조곤. 나른하고도 애틋한 목소리.

    침대 위에 몸을 반쯤 눕힌 채로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헤르한이 눈에 들어온 순간, 리엘라의 목구멍을 타고 울컥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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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온에게 다 들었다. 아주 의젓하게 잘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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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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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같이 갈 걸 그랬나?”

    리엘라는 힘껏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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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더 좋아요. 폐하가 절 믿고 기다리고 있어 주셔서. 그걸 알아서 더 씩씩하게 잘하고 왔어요.”

    그랬다. 그래서였다.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왕녀와 파비안을 보고서 어떻게 그렇게 무덤덤할 수 있었나 자신도 의아했는데, 이제 보니 헤르한 덕이었다.

    막상 그의 앞에 서니 필사적으로 의젓해지려던 마음가짐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았다.

    그저 헤르한의 품에 안겨들어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생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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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 와.”

    그때 헤르한이 제 옆쪽 이불을 걷어내며 손을 뻗었다.

    리엘라는 두말없이 그에게 다가갔고, 헤르한은 리엘라가 안겨드는 것보다 더 강하고 단단하게 몸을 끌어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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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생했어.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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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은 당신들의 몫이라며 리엘라가 시간을 주고 간 이후.

    그레타는 머리를 죄다 쥐어 뜯어가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다음 날에야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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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 놈들이 멍청한 거야. 엔릴의 후손을 전염병자 취급이나 하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래. 일단 왕국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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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국으로 가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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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네 위대함을 알아볼 사람이 있을 거야. 그래. 분명 그럴 테지. 신전 따위는 필요 없어. 우리가 스스로 세력을 끌어 모으면 돼. 일단 우리 왕국의 재력가들부터 포섭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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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요?”

    엉망으로 어질러진 방 안. 파비안은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였다.

    그의 물음은 평소보다 더 낮고 느렸다.

    그래. 자기도 딴엔 좀 지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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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라질 때까지 해야지. 안 그러면? 이대로 황제에게 당하기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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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황제에게 뭘 당했는데요?”

    그런데 진작 고개를 수그렸어야 할 파비안이 오늘따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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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라서 물어? 우릴 이 꼴로 만들었잖아!”

    그 말에 파비안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그레타는 그가 절망하는 의미를 끝내 알지 못하고 제 할 말만을 더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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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황제가 만든 거야. 황제는 다 알았던 거라고. 모르겠어? 내가 약을 구하러 다니는 거 처음부터 알았으면서 일부러 그림자 상인을 엎어서 날 궁지로 몬 거야. 일부러 날 여기로 불러들이고, 신전으로 가게끔 유도한 거라고! 리엘라도 다 한통속이야. 우릴 짓밟으려고! 제깟 것들이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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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그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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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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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왜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대체 왜 그게 황제 탓이고 리엘라 탓이죠? 왜 왕녀님은 늘……. 왜 모든 일에 다 그렇게 남 탓을 하세요?”

    그레타는 순간 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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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지금……. 나한테 화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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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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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지금 나한테 소리 지른 거냐고!”

    늘 자기 뜻을 따르기만 하던 파비안이 제게 저항했다는 게 너무 분해서.

    너무 괘씸하고 황당해서, 그레타는 그가 소리를 지른 것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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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다 내 탓이라는 거야? 나만 잘못했어? 너도 같이 선택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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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아요. 우리 탓이에요. 아니, 제 탓이죠.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저는 계속 지켜보고만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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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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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그 순간 그레타는 또 악을 쓰며 파비안을 이겨 먹으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책임지겠다는 뜻. 그건, 혼자 떠나겠다는 뜻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레타는 벌떡 일어나 파비안의 옷깃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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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돼. 파비안. 그러지 마. 우린 틀리지 않았어. 아직 방법이 있을 거라니까? 내가 널 무슨 수로든 일으켜 세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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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녀님.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전 왕녀님의 구원자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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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야. 파비안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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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신전에서 똑똑히 보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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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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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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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네가 날 버리고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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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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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감히! 날 버리겠다는 거냐고!”

    파비안이 천천히 제 옷자락을 움켜쥔 그레타의 손을 떼어냈다.

    그건 사실 지금이 아니라, 더 예전에 떼어냈어야 할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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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하는 걸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왕녀님.”

    그레타는 악독하리만치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충혈된 제 눈에 물기를 그렁그렁 매달고서, 눈꺼풀에 힘을 바짝 주고 파비안을 노려보기만 했다.

    파비안은 그런 왕녀에게서 돌아섰다.

    굳이 걸음을 재촉하진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천천히 멀어지더라도, 왕녀는 자신을 붙잡지 못할 것임을 파비안은 알고 있었다.

    *

    파비안이 터덜터덜 서궁에서 나왔을 땐 어느새 하늘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빛에 물든 황궁이 참 아름다워서 파비안은 더 슬프고도 기뻤다.

    이 아름다운 세상은 리엘라의 세상.

    그리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닌 저 반대편의 어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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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리엘라를 한 번만…….’

    파비안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젓고 움직였다.

    그렇게 묵묵히 걸어 성문을 막 나섰을 때쯤 마차 한 대가 그의 꽁무니를 밟고 와서 멈추었다.

    마차의 뒤로 언뜻 노을보다 아름답게 요동치는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을 때, 파비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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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서 어떻게 가려고. 길은 알아? 바보 같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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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알아. 난 다 알거든.”

    파비안 앞에 와서 선 리엘라는 작게 웅얼거렸다. ‘또 허풍.’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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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 쪽에 네 사정을 잘 말해뒀어. 수용소는 그리 무서운 곳만은 아니래. 네가 오래 살 수 있도록 널 살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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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고마워.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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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이상하지? 파비안. 우리가 함께 있을 땐 넌 단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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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보지. 내가 널 아프게 한 만큼 그대로 돌려받는 건가 봐.”

    리엘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울거나 웃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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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가. 파비안.”

    리엘라는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파비안에게 이별을 고했다.

    원망하고, 다투고, 울부짖고, 도망쳤던 지난 시간들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이별도 하다 보면 실력이 느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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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게.”

    파비안도 담백하게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마차가 출발하기 전, 리엘라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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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파비안. 네 힘은 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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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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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릴의 후손은 각자 특별한 힘이 있다고 들었어. 네 힘은 뭐였어?”

    성숙한 ‘어른들의 이별’을 하는가 싶던 파비안은 결국 밀려드는 감정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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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 찾는 거야.”

    꼭 리엘라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파비안은 아이같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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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힘은 네가 어디에 있든지 널 찾아내는 거였어. 리엘라.”

     

    ***

    6살. 어린 리엘라가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 그리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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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살아남아야 한다. 꼭 살아남아. 응, 알았지, 리엘라?”

     
    그게 대체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이 슬픈 목소리를 떠올릴 때면 왜 이렇게 아프면서도 행복한 것인지.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기억하기에 리엘라는 너무나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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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와……주세요.”

    가뜩이나 미약한 리엘라의 목소리는 코앞에 내려앉은 벽에 부딪혀 밖으로 퍼져나가질 못했다.

    무너져 내린 벽에 갇혀버린 게 벌써 얼마나 됐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이곳이 버려진 지 오래된 폐허라는 것도 리엘라는 몰랐다. 그저 비를 피해 지붕이 있는 곳으로 왔을 뿐이고, 거기서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사방이 칠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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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와주……. 흐흑.”

    아직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를 나이, 리엘라는 막연히 엄습하는 두려움에 마냥 떨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다 까지도록 밀어 봐도 꿈쩍 않던 벽이 푸스스 소리를 내며 먼지를 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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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다니까. ……사람이. ……여기 있다니까요. ……구해주라고요!”

    벽이 한 겹 거두어지고 바깥의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대충 어떤 꼬마애가 떼를 쓰면서 요란을 떠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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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안에 있어요! 진짜로! 빨리 구해줘요. 안 그러면 행크 아저씨는 멍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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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알았다고. 파비안. 요 녀석아. 위험하니까 옆으로 비켜! 에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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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돼. 내가 봐야 돼요. 아 거기가 아니라 여기인데!”

    벽이 거두어지면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에 리엘라는 콜록콜록 기침했다.

    그 기척을 알아챈 바깥의 어른들이 리엘라의 앞을 막은 벽을 한 겹 더 거두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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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여기 있다. 내가 찾았다. 내가 구했어!”

    더는 어느 벽에 가로막히지 않은 꼬마의 외침이 크게 들렸을 때, 리엘라는 눈을 질끈 감고 크게 울음을 앙앙 터트렸다.

    갑자기 쏟아진 밝은 빛에 눈두덩이가 아파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제 살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안도해서 그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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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울어? 아파? 괜찮아? 이제 안 울어도 되는데. 내가 구했으니까 괜찮은데?”

    네가 구하긴 뭘 구해, 나대지 말고 비켜 이 녀석아, 하고 어른 중 누군가가 꼬마를 타일렀다.

    그 누군가가 리엘라를 잔해 속에서 완전히 끄집어냈다.

    꼬마는 어른들의 훈계에도 지치지 않고 폴싹대더니 리엘라에게 다가와서 손을 덥석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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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파비안이야.”

    그제야 눈물과 먼지에 마냥 따갑던 눈을 비비고 고개를 든 리엘라가 본 것은, 세상에서 가장 예쁜 초록색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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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구해줬으니까 나랑 같이 갈 거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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