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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스스로 판 무덤 (72/154)


  • #72 스스로 판 무덤
    2022.03.06.


    헤르한의 얘기는 짧았다.

    왕녀가 간 곳은 중앙신전이며 파비안을 신전에 공인받으려는 것 같다, 왜냐하면 파비안은 엔릴의 후손이니까, 나와 같은.

    감정과 사설은 배제하고 핵심만을 전달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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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요? 정말이에요? 파비안이……. 그러니까…….”

    하지만 크게 동요할 것 같았던 리엘라는 의외로 담담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저 테이블에 걸터앉아 헤르한과 입을 맞추던 그 자세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살포시 시선을 내리깔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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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으실지도 모르겠지만요.”

    아주 조금. 짧은 침묵이 있었고 리엘라는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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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은 어릴 때부터 좀 그런 면이 있었어요. 엄청 허풍쟁이였거든요. 뭐든 다 아는 것처럼 굴었고 다 해줄 것처럼 굴었어요. 엔리와 안, 제 보물이었던 동화책, 그걸 읽으면서도 파비안은 늘 그랬어요. 자기는 거기 나오는 엔리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절 지켜줄 수 있다나 뭐라나.”

    리엘라의 긴 속눈썹이 조금 떨렸다. 가느다랗고 예쁜 입가엔 쓴 미소도 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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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 거짓말이었죠. 파비안은 모르는 것 천지인 바보였고. 날 주려고 가져왔다는 비비안 로즈는 사실은 왕녀님에게서 받은 거였고. 날 지키긴커녕 아프게만 했고요. 그런데 딱 하나는 진짜였네요. 그 바보의 허풍이, 딱 하나는 맞았어요.”

    헤르한은 가만히 리엘라의 볼을 감싸 쥐고 그녀의 말을 모두 들었다.

    리엘라의 역사를 전해 듣는 것은 언제나 마음 아픈 일이었다. 리엘라의 역사가 곧 그 빌어먹을 사내의 역사이기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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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은 이제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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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로 유쾌하진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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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군요. 당연해요. 그 바보는 벌 좀 받아야죠.”

    리엘라는 헤르한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면서 힘 빠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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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진짜, 엔리였으면서 날 지켜주지 않았으니까. 걔는 벌 좀 받아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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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된 여정에도 불구하고 그레타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가져온 옷 중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은 그레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은 자세를 유지했다.

    신전에 도착하기 전까지 꽁꽁 뒤집어썼던 후드는 진작 벗어던졌다. 여긴 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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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장 확인했습니다. 정말 리오타 왕국의 왕녀가 맞으십니다.”

    수습 사제의 보고에 그레타는 거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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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니까요. 내가 설마 내 신분을 속이겠어요? 확인해보면 금방 들통 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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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예. 실례했습니다. 이국의 왕족이 직접 우리 중앙신전을 방문하시는 일은 워낙 드물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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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드물겠지. 너희들이 나같이 대단한 사람을 또 어디에서 만날까?’

    그레타는 고고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신전의 사무실 안, 그레타 앞에 마주 앉은 세 명의 신관들은 아직도 전부 얼떨떨한 얼굴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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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다시 한 번만 확인하겠습니다. 우리 신전을 방문하신 용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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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릴의 후손을 공인받으러 왔다고 말씀드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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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그, ‘엔릴의 후손’이 왕녀 저하의 약혼자분이시고요.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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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그레타는 대체 같은 것을 몇 번 묻느냐고 대거리를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어쩌면 이 신관들은 앞으로 자신이 거느리게 될 수족이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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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습니다. 판별은 30분이면 끝날 겁니다. 직후엔 바로 공인 절차를 밟고 수속하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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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분이요? 공인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나요? 의식이나 집회 같은 건 하지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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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이나 집회요?”

    신관들이 뚱한 표정을 짓는 것에 그레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분 탓인가. 어쩐지 아까부터 저들의 반응이 생각한 것과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무려 ‘엔릴의 후손’이 나타났다는데 다들 너무 침착한 것도 이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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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에서 공인회를 주관할 때 전 세계 유수의 세력가들을 초청할 생각이었어요. 뭐, 공식적으로는 우리 왕국에서 집결해야겠지만. 어차피 힘을 모을 거라면 기왕이면 서로 얼굴을 빨리 익히는 게 좋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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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인회라니요? 힘을 모아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녀 저하?”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는데도 신관들은 도무지 못 알아듣겠다는 듯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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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야. 다들 바보야? 아. 신전은 중립을 유지해야 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가?’

    그레타와 신관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대화가 헛돌기만 하는 그때, 사무실 문이 다시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수습 사제는 파비안의 판별과 수속 준비 등을 마쳤음을 알렸다.

    신관들을 따라 그레타가 이동한 곳은 신전의 뒤쪽에 이어진 별관이었다.

    같은 신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음습하고 허름한 건물. 그 내부로 들어가 긴 복도를 지나 마주한 광경은 더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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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급? 4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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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뭐 대략……. 3급으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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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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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체내 피로도는 적정선이고. 그래도 약은 바로 하나 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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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주사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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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많긴 하네요. 약 용량 좀 늘려줘요.”

    각자 하나씩 서류나 진찰 도구 등을 들고 오가는 이들 전부가 지나치게 사무적인 모습이었다.

    경이로움에 떤다든지, 놀라워서 감탄한다든지 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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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별은 다 끝났으니 이제 입소 수속을 할 겁니다. 능력자 본인이 성인이라 보호자의 참관은 딱히 필요 없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 오신 김에 수용소도 확인하시겠습니까?”

    머리가 띵했다.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그레타가 눈치채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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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뭐라고 하셨죠? 수용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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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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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수용소를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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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 클레르. 3급 판정이고, 투시력 능력자라 위험도가 높지 않아 일반 수용소로 배정될 겁니다. 현재 4인실은 만실이라 다인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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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데요!”

    그레타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제야 비로소 그레타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파비안을 물건 취급하며 거칠게 잡아끄는 이들, 또 그런 파비안의 손목에 채워진 족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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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인실이라는 것 때문에 그러시는 모양입니다만, 여의치 않은 저희 사정도 이해해주십시오. 이미 수용자가 한계치라 특별 대우를 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여의치 않은 사정? 수용자가 한계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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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죠? 여기 최고 신관을 불러줘요.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나 리오타의 왕족이라니까? 그리고 파비안은 우리 왕가의 부마가 될 사람이자 엔릴의 후손이라고요. 전설의 힘을 가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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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왕녀 저하. 공인 받으러 오신 게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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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요. 맞아요. 공인 받으러 왔어요. 내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온 세상에 알리고 다 나를 우러러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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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게 아니었어?’

    그 순간 그레타를 향하는 모든 이들의 눈빛이 같았다.

    참 한심하다, 라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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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레타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서 비틀거렸다. 발밑이 꺼지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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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잘못 아셨나 봅니다. 왕녀 저하. 공인은, 능력자를 신전 관리 대장에 등록시키고 수용소로 보내는 것을 뜻합니다. 엔릴의 후손은 널리고 널렸는데 대체 누가 누구를 우러러본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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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녜요. 그럴 리가……. 엔릴의 후손은 분명 그 힘으로 세계를 쥐락펴락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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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성녀가 살아 있을 때의 일이지요. 성녀가 없는 지금, 능력자들은 그냥 약물 없이는 목숨 부지도 어려운 골칫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모르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신관은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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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공부를 좀 하시지 그랬습니까?”

    오랫동안 공들인 계획이 한 번에 무너지는 순간.

    그 절망을 다 느낄 틈도 없이 파비안이 끌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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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만요. 파비안을 어디로 끌고 가는 거죠? 당장 그 손 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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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전에서 행패 부리지 마십시오. 등록을 마쳤으니 파비안 클레르는 격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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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 격리라니! 말도 안 돼! 놔요! 당장 파비안을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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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이것 참.”

    지끈지끈한 골을 짓누르던 신관 하나가 성가신 표정으로 턱짓했다. 대충, 왕녀를 끌어내라는 뜻이었다.

    그레타는 자신을 붙잡는 팔들을 뿌리치다가 기어이는 누군가의 손목을 이로 꽉 깨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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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악!”

    당황한 사제들을 벽으로 밀친 후 그레타는 판별실 안으로 들어갔다.

    감히 왕족인 자신의 몸에 손댈 생각 하지 말라면서, 또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들고 휘두르고 깨면서.

    관리인들을 죄다 떨쳐내고 안을 난장판으로 만든 그레타는 무작정 파비안을 끌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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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자. 파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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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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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할 틈 없어. 빨리 뛰라고! 손목……. 사슬, 그건 나중에 풀 테니까 일단은 어서……!”

    그레타는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유례가 없는 황당한 일에 신관들은 모두 입을 턱 벌렸다.

    왕족씩이나 되는 이가 어찌 저리 무지하고 생각이 짧은지.

    다들 혀를 끌끌 차면서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이제 신전의 손바닥 위에 있게 되었으니까.

    *

    바람이 나뭇결을 스치는 소리에도 그레타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신전에서 도망쳐 나온 지 한 이틀간은, 그레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병적으로 앞으로 말을 몰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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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말도 하지 마. 파비안.”

    파비안에겐 그 어떤 선택권도 주지 않고서 그레타는 그냥 도망만 쳤다.

    사흘째 되는 날, 말이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진작 말을 교체했어야 했는데 역참을 죄다 그냥 지나쳐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레타는 죄 없는 말 등에 채찍질만 더했고 그날 저녁 기어이 말이 쓰러졌다.

    파비안과 그레타는 말과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진창에 엎어진 그레타는 오물을 뒤집어쓰고서야 시궁창에 처박힌 제 처지를 깨닫고 서럽게 울었다. 그때까지도 파비안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레타를 지켜보기만 했다.

    두 사람의 몰골은 나란히 엉망이었다.

    며칠을 굶어 볼이 해쓱했고 옷과 머리카락엔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거지꼴이 따로 없는데, 영혼은 그보다 더 피폐했다.

    신전에서 당한 굴욕에. 또 믿었던 하늘이 무너진 절망에.

    두 사람은 신분이 들통 날까 봐 차마 여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숲에서 쪽잠을 청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다그닥. 소리는 가까워질수록 점점 불어났다. 하나가 아니었다.

    그레타는 패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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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 파비안 당장 일어나! 신전 놈들이 쫓아왔어. 코앞까지 왔단 말이야! 당장 도망쳐야 해. 빨리 일어나라고!”

    그레타가 파비안과 함께 일어섰을 땐 이미 선두의 말 한 마리가 그들 앞에 멈춰 선 뒤였다.

    비단처럼 우아한 갈기가 늘어진 말 위에서 여인 하나가 가볍게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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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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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왕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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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른 가지처럼 쩍쩍 갈라진 그레타의 목소리에 비해 리엘라의 목소리는 청초하고 또랑또랑하기만 했다.

    그레타는 벌떡 일어났다. 피폐함에 멍해졌던 눈에는 악독한 총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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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그랬지? 네가 날 이 꼴로 만들었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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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겁먹지 마세요. 왕녀님. 마중 나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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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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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고생하셨어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함께한 아시온의 염려를 뒤로 하고 한발 앞으로 나온 리엘라가 그레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손수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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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은 얼굴이라도 좀 닦으셔야겠어요.”

    그레타는 그 손을 쳐내려고 팔을 휘두르다가 그대로 헛손질만 하고 자빠졌다.

    리엘라가 피해서도 아니고 아시온이 막아서도 아니었다.

    제 처참한 여정 끝에 신발 밑창이 다 해어져 버려서였다.

    그러니까 이 진창은, 결국은 자기 스스로가 파놓은 재앙의 구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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