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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네 첫 키스는 (71/154)


#71 네 첫 키스는
2022.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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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뭐야? 이제야 제대로 일 좀 쳐보려는 거야?’

다과 쟁반을 든 로리엘은 집무실 문을 열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엘 보좌관을 열심히 자극한 보람이 드디어 있는 모양이었다. 둘을 제대로 엮어서 리엘라가 황제에게 쫓겨나게 만들 일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며 흥미진진하게 안을 엿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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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아니, 그냥 거기서 물러난다고?’

이번에도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했다.

이엘이 결국 리엘라를 놓고서 자기 자신을 팽개치듯 뒤로 물러나 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죄송하다고 리엘라에게 사과를 하고선 고개를 푹 숙인 채 집무실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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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보좌관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문 앞에서 그와 마주친 로리엘이 시치미를 떼며 붙잡아보기도 했지만 이엘은 도망치듯 성큼성큼 멀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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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남자 같으니라고.’

로리엘은 닭 쫓던 개 마냥 아쉬움을 삼키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리엘라는 조금 전까지 이엘과 꽉 맞붙어 있던 자리에 조금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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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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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이엘 경이 몸이 안 좋은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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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래요?”

로리엘이 입을 비죽거렸지만 리엘라는 그런 시녀의 낌새까지 살필 정신이 없었다.

이엘이 움켜쥐었던 팔뚝이 아직도 얼얼한데,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이 전한 동요는 팔뚝의 통증보다도 더 강하게 리엘라의 뇌리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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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몰아세워서 당황했나.’

하지만 모른 체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일전에 그림자 상인 앞에서 이엘을 만났던 일이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그런데 그 일로 황제의 경고까지 받았던 그가, 오늘은 엉망으로 다쳐오기까지 했으니.

손목에 멍이 생긴 것이나 목 부근에 자상을 입은 건 특히 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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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누구에게 협박을 받고 있나.’

리엘라가 굳이 로리엘을 내보내고 이엘의 상처를 봐준 것은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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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밀매상들과 엮여 있는 건가.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가 있나…….’

그때 심란한 마음에 고개를 숙인 리엘라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반짝이는 물건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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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의 목걸이.’

은빛 체인에 매인 붉은 수정체.

방금 이엘이 급하게 집무실을 나가면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리엘라가 조용히 그것을 주워들 때, 로리엘은 아직도 문 바깥쪽에 신경을 쏟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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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가 보시지 그래요?”

리엘라는 이엘이 나간 쪽을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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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리엘라 님이 직접 가서 보좌관님을 살펴드리세요. 저는 못 본 척해드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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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엘 경은 혼자 두는 게 나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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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마시고요. 리엘라 님이 가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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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폐하와 약속한 시간도 다 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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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에…….”

아쉬움에 돌아선 로리엘이 몰래 한숨을 뱉어낼 때도.

리엘라는 이엘이 떨어뜨리고 간 그의 목걸이를 빤히 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이엘에겐 자신이 짐작하는 것 이상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참 달갑지 않은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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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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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온의 전갈입니다.”

아시온은 일부러 제스의 편에 전갈을 보내왔다. 혹시 모를 도난의 위험을 방지한 것이었다.

[여우가 중앙신전으로 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보고의 첫 줄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레타 왕녀를 뜻하는 은어로 ‘여우’라는 말을 쓴 아시온의 재치 아닌 재치에도, 글을 읽던 헤르한은 웃을 수 없었다.

[여정 중간에 여우가 밀매상과 접선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직후 저희가 해당 밀매상을 확보했고 그를 문초해본 결과…….]

아시온의 보고는 헤르한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여우가 능력자에게 쓸 억제제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억제제를 쓸 대상은 20대 중반의 성인 남성이며, 여러 정황을 확인해 본 결과, 파비안 클레르가 엔릴의 후손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도 당황했는지, 원래도 악필인 아시온의 필체가 더 엉망이었다.

그러니 헤르한은 더더욱 방금 자신이 읽은 것을 두 번 세 번 보고 또 보는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뜻밖의 사실에 멍한 헤르한에게 설명을 덧붙인 것은 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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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자의 검진 기록을 다 살펴보고 왔습니다. 그가 보인 여러 증상이 전형적으로 능력자의 폭주 때와 같았습니다. 아시온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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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이 엔릴의 후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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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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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내가. 그자가 나와 같은 족속이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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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헤르한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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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는 무슨 능력을 갖고 있으려나요. 부디 참 쓸데없는 능력이어야 할 텐데.”

제스는 일부러 냉소적인 농담을 뱉고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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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앞뒤가 다 맞아떨어집니다. 왜 그레타 왕녀가 그림자 상인 근처에 얼쩡거렸었는지. 왜 뭐 엄청난 거라도 감추고 있는 양 그동안 득의양양했는지. 굳이 그자를 끌어들여서 폐하를 암살하려 했던 것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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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왜 죽자살자 파비안을 갖겠다면서 리엘라를 괴롭혀왔는지도.’

헤르한은 다른 의미로 또 웃음이 나왔다.

이젠 그들이 한없이 가소롭고 한심해서 터져 나오는 웃음이었다.

차라리 대단한 사랑 놀음이라도 하는 거였다면 봐줄 만했으려나.

능력자가 뭐라고. 그냥 저주받은 불쌍한 인간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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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엔릴의 후손인 주제에 제 발로 신전에 찾아가다니. 왕녀는 무슨 생각인 거죠? 지금대로라면 왕녀는 리엘라 양의 정체는 모르는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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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다. 리오타 왕국은 후손을 가진 적도 없었고 과거 전쟁 당사자도 아니었으니까 정보가 부족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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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에 가면 영웅 대접이라도 받을 줄 알았나 보네요. 불쌍해서 어쩌나. 덕분에 우리가 나서서 손쓸 필요는 없겠습니다. 알아서 자멸의 길로 가고 있으니.”

이젠 모든 퍼즐이 풀린 것 같은데 정작 헤르한의 심란함은 짙어졌다.

그들이 통쾌하다던 제스까지 물러가고 난 뒤, 고요한 집무실 안에서 헤르한이 떠올리는 것은 파비안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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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내가 황실에 도착해서 건강을 회복한 건 리엘라 덕택이었겠지.’

앞으로 언젠가 성녀의 힘을 공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

상상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그 상황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벌어졌음에 헤르한은 피가 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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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괘씸해서 못 견디겠는데.’

헤르한은 리엘라의 숨결 하나도 귀하고 아까웠다.

그런데 그 사내는 그런 귀한 것을 아무런 자각 없이 평생 누렸고, 당연시했고, 지겹다며 버렸으면서, 다시 찾아와선 또 허락 없이 갉아먹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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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무려 18년이나 리엘라를 가졌어. 그깟 게.’

헤르한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집무실을 나서버리는 그를 향해 보좌관이 달려들었다.

곧 회의가 있는데 어딜 가시느냐 물었지만 헤르한은 대답하지 않고 걸음만 재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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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정이 있어서요. 아무래도 부탁할 게 에릭 경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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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어차피 제가 하던 업무의 연장선이니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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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야근 수당은 제가 꼭 챙겨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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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칼같이 챙겨 받겠습니다.”

에릭에게 부탁을 마친 리엘라는 빙긋 웃으며 돌아섰다.

기사 에릭은 황제가 이엘에게 붙인 감시역이었다. 며칠 전 본궁 앞에서 이엘과 만났을 때, 그와 제대로 대화도 하지 못하도록 눈치를 주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심 에릭이 얄밉기도 했는데, 그런 그에게 이런 개인적인 부탁을 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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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엘 경 상황은 좀 더 이렇게 두고 봐야 하려나.’

이엘은 오전에 집무실을 나간 길 그대로 무단 퇴근을 한 듯했다.

리엘라는 보좌관의 행방을 묻는 직원들에겐 그가 몸살이 나 조퇴 처리했다고 대충 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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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니 회의 진행하죠. 보좌관이 없어도 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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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대사님 야무지신 거야 저희도 다 알죠!”

그렇게 리오타 왕국과의 첫 교역을 앞두고 간단한 회의를 진행하려는데, 직원들 모두가 모인 회의실 안으로 다짜고짜 누군가 들어섰다.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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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리엘라는 반가움과 동시에 얼떨떨한 눈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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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무슨 일이세요? 지금 막 회의 중인……!”

리엘라의 말은 도중에 멎어버렸다. 들어서던 걸음 그대로 직행한 황제가 쉴 틈도 주지 않고 리엘라에게 입을 맞춘 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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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업!”

황제의 등장에 전부 일어섰던 직원들은 곧장 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뒤로 한동안 회의실의 적막을 메우는 건 두 연인의 농염한 호흡과 뒤척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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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잠깐 생긴 틈에 리엘라가 입을 열라치면 헤르한은 곧바로 고개의 방향을 틀어 전보다 더 깊이 리엘라의 호흡을 옭아맸다.

부드러우면서도 격정적으로 얽혀드는 움직임이 리엘라의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입안을 적시는 타액은 달콤했고, 헤르한과 맞닿은 이마는 점점 더 뜨거워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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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일 초가 몇 시간인 것처럼 눈을 질끈 감고 모르쇠로 버티던 직원들 모두가 빠져나가고 둘만 남은 회의실.

겨우 떨어진 입술에 숨을 몰아쉬는 리엘라의 볼이 붉었다.

헤르한은 정염에 끓는 눈빛으로 리엘라를 내려다보았지만, 다시 입을 맞추려는 걸 리엘라가 살짝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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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일부러 그러신 거죠? 사람들 다 내쫓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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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었나?”

뻔뻔하다 못해 정말 진심인 것 같은 물음에 리엘라는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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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회의가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폐하도 일이 있다고 하셨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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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아. 맞는데.”

헤르한은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듯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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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묻고 싶은 말이 생겨서. 당장 묻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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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요?”

일정을 물리고 달려올 정도로 급한 용건인가?

궁금해서 고개를 드는 리엘라의 허리를 헤르한은 살짝 들어 올려 회의실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혔다.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입술은 한참 뒤에야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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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 말인데.”

또?

이제 파비안 얘기는 꺼내지 않겠다고 황제가 선언한 것이 고작 오늘 아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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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는 역시 그자와 했겠지?”

리엘라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선상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리엘라는 담담했고, 헤르한은 제법 절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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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줄곧 함께 자랐으니. 네 처음은 모두 다 그자였겠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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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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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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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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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적인 응답에 역시나 헤르한은 당황했다.

자기가 먼저 물어봐 놓고서, 그는 이제 와서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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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말하지 마. 절대로. 절대로 대답하지 마라.”

물론 거기서 끝난 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차라리 대놓고 듣는 것이 마음 편하겠다며 달려들었다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며 또 물러서기를 반복했다.

이대로는 끝도 안 나겠네. 리엘라는 헤르한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리엘라가 당기면 당기는 대로 헤르한은 저항 없이 끌려왔다.

리엘라는 그런 그의 목에 가느다란 팔을 감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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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세로 입 맞추는 건 폐하가 처음이에요. 물론 지금 제게 입을 맞춰주신다면…….”

헤르한이 그 유혹을 뿌리칠 일은 없었다.

헤르한은 단비를 마시듯 리엘라의 붉고 탐스러운 살결을 머금었다.

처음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그저 둘 모두에게 유일한 ‘지금’ 이 순간 안에서,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의 호흡을 나누어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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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 걸터앉아 부푼 치맛단이 헤르한의 몸에 짓눌려 바스락거렸다.

옷이 구겨질 대로 구겨지고, 테이블 위에 놓였던 서류도 엉망으로 흐트러졌을 때쯤 헤르한은 간신히 리엘라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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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쳐가는 걸까. 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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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러면 저 또한 미쳐가는 것일 텐데요.

리엘라는 헤르한의 더운 몸이 좋았다. 열이 올라 붉어진 귓바퀴도, 후끈함을 떨치려고 뱉어내는 숨결도 좋았다.

그래서 그의 단단한 등을 꼭 붙잡고 안겨 있을 때 헤르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또 파비안이라는 이름이 속했지만, 이번엔 지금까지처럼 마냥 귀여운 질투의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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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비안에 대해 네게 알려줄 것이 있다. 네가 많이 놀랄 수도 있는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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