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아직 살 기회 (70/154)


#70 아직 살 기회
2022.02.27.


여차여차 업무를 마무리한 이엘은 쫓겨나듯 황제의 내실에서 나왔다.

그런 그를 후다닥 쫓아 배웅 나온 것은 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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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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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류 하나 놓고 가셨어요! 폐하께서 옷 갈아입으시는 틈에 잠깐 나왔어요!”

황제가 알아채기 전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며 다급해하면서도 리엘라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이엘 앞에서 뭉그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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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와줘서 고마워요. 얼굴 봐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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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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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엘 경과 폐하 사이……, 조금 풀어진 거 맞죠?”

조심스럽게 뜬 눈이 초롱초롱했다. 이엘은 거기에 잔뜩 깃든 다정한 기대를 왠지 저버리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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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런 것 같습니다. 대사님 덕입니다.”

대답을 기다리며 동그랗게 떠졌던 눈이 이내 초승달처럼 휘며 예쁘게 웃었다.

다행이다…… 하는 리엘라의 작은 중얼거림이 이엘의 심장을 울렸다.

사실 다행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이가 풀어지긴커녕, 황제는 이제 대놓고 저를 이용하겠다며 겁박했고 심지어 리엘라를 황후에 앉히겠다고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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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사님이 황후가 되면 내 쪽의 승산은 없어져.’

그러다가 이엘은 그런 계산이나 하는 자신이 문득 우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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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덤빌 용기도 없으면서 승산이나 따지고 있다니.’

머리가 아팠다. 괜히 황제에게 쳐들어가 종일 소득 없는 기싸움이나 펼친 탓이었다.

그날 저녁, 늘 야근을 자처하던 이엘은 평소보다 일찍 퇴궁했다.

집에 도착해보니 안이 난장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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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버니! 으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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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린 누이가 오른쪽 팔과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로 울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오늘 낮에 마차 사고가 있었노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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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 사고요? 어쩌다가요? 많이 다친 거예요? 어디 마차였어요? 사과는 제대로 받았고요?”

어머니는 참담한 얼굴로 모든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별안간 나타난 푸른색의 마차가 순식간에 데니스를 치고 사라져버려서 쫓아가지도 못했고, 치료는 이웃들이 적당히 도와주었다는 거였다.

이엘은 화를 억누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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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이 다쳤는데 의원에 데려가셨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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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러……. 옆집 필립이 그러는데 이 정도는 붕대만 감아 놓으면 뼈가 금방 붙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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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엘이 소리를 지르자 겁먹은 어린 여동생이 이엘의 품에서 더 서럽게 칭얼거렸다.

이엘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고르다가, 여동생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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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디 가니, 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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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의사를 불러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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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 늦은 시간에 출장 의사는 값이 두 배인데……!”

이엘은 더 지긋지긋한 말을 섞지 않고 집안에서 뛰쳐나왔다.

지름길로 통하는 골목에 접어들어서, 여동생의 울음도 더 들리지 않을 때쯤. 이엘은 그때야 음산한 인기척이 제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걸음을 멈춘 그가 몸을 돌려 도망칠 겨를도 없이, 곧장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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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뭐야? 이거 놔……!”

이엘은 낯선 이들에게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몸부림쳤다.

그때 푸른 마차 한 대가 골목 안으로 들어와 이엘 앞에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린 노신사는 고고한 걸음걸이로 다가와서는 천천히 가죽 장갑을 벗고 냅다 이엘의 뺨을 후려갈겼다.

‘쫘악-!’

살을 찢는 듯한 소리가 골목의 어둠을 갈랐다.

정신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강한 충격에 이엘의 눈앞이 번쩍였다.

이엘은 이제 알 것 같았다. 데니스가 오늘 사고를 당한 것은 자신 때문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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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나를 자선 사업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널 키워준 은혜는 대체 언제 돌려받을 수 있는 거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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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는 계속 드리고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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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보고? 아. 눈을 씻고 찾아봐도 황실엔 ‘후손들’이 없다는 그 한심한 보고?”

복면을 쓴 이 중 하나가 이엘의 목 아래에 서늘한 칼날을 들이밀었다.

노신사는 창백한 살결을 짓누르는 칼끝에 살짝 피가 맺히는 것을 지그시 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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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상인 쪽에 성녀 하나가 굴러들어올 것 같다는 말을 네게 해주자마자 그날 밤 그쪽이 털렸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 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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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위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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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계속 눈 가리고 아웅 하시겠다. 이엘. 똑똑한 녀석이 왜 이리 멍청해진 게야?”

한 번 더 거센 따귀가 내려앉았다.

이엘은 골이 띵해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그런 그의 목덜미 안으로 노신사가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주름으로 쭈글쭈글한 손이 끄집어낸 건 이엘의 목에 걸린 마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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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하지만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 있구나.”

노신사는 탐욕으로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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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네가 아직 살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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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개처럼 부려질 날이 남았다는 뜻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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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연맹을 배신하지 말거라.”

이엘은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와중에도 당돌한 눈을 들어 노신사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엘 앞에 침을 탁 뱉고는 그 위에 돈다발을 서너 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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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불쌍한 네 동생 치료비에 쓰고. 물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직 사지가 멀쩡할 때의 얘기지. 이번에도 연맹의 지령을 무시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난 모르겠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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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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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도 좋은 아침이에요!”

다음날, 리엘라는 아주 가뿐한 걸음으로 대사관에 출근했다.

오늘 리엘라의 옆에 따라붙은 것은 루가 아니라 로리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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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도 참. 늦잠이나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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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에요. 리엘라 님. 제가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영 못 일어나는 거 있죠? 다시 가서 깨워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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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풉. 아녜요. 어제 종일 본궁에 있느라고 긴장해서 그런 모양이니 푹 자게 둬요. 오늘 대신 수행해줘서 고마워요. 로리엘.”

그 말에 로리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리엘라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오늘은 몇 주 만에 드디어 자신의 집무실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어제 우연히 맞닥뜨린 행운 덕에 마침내 황제와 담판을 지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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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 대한 계획이라면서요. 그런데 왜 저는 모르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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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대단한 계획도 아니야. 이엘이 잘못 듣고 헛소리를 하는 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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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지 않으니 더더욱 알려주셔도 되잖아요? 제게 비밀을 두시는 거예요? 앞으로는 솔직하기로 해놓고?”

 
사정없이 몰아세우는 말에 황제는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럴수록 궁금증이 커졌지만, 리엘라는 저 고집쟁이 황제가 절대 입을 열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른 이득을 노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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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해주시지 않을 거라면 대신 다른 부탁을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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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거 괜찮군. 어떤 부탁이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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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무실로 출근하게 해주세요. 항상 시녀를 대동할게요. 그래도 불안하시면 병사를 붙이셔도 좋아요. 폐하의 계획이 무슨 계획인지 이엘 경에겐 절대 물어보지 않을 테니까요. 네?”

 
황제는 괴롭게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그래도 최후의 승자는 리엘라였다.

오전에 딱 한 시간만, 그것도 시녀를 반드시 대동하고서-라는 조건이 따라붙었지만 그것도 리엘라는 감지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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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이엘 경! 놀랐죠? 저 오늘 폐하 허락받고 당당히 출근했어요!”

드디어 집무실에 도착한 리엘라는 개선장군처럼 쾌활하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이엘은 그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리엘라가 갑자기 들이닥친 것에 몹시 놀란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고개를 들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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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의 정식 복귀인데 눈도 안 맞춰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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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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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싱거워. 나만 혼자 신났나 봐요?”

일부러 한 농담에도 이엘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기만 했다.

리엘라는 그런 그를 더 보채지 않고 머쓱하게 제자리로 가 앉았다.

떠들썩했던 등장이 민망할 정도로 그 뒤는 조용했다.

리엘라는 책을 꺼낸답시고, 또 잉크를 빌린답시고 이엘의 앞을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할지언정 이엘에게 특별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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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엘. 차 좀 가져다줄래요? 간식거리도 조금요. 오랜만에 집무실로 출근해서 그런가, 입이 심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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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한참 후 정적을 깬 리엘라는 로리엘이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엘에게 조용히 다가가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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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에요, 이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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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은요. 아무 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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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리엘라의 눈이 심각했다.

의심이 깃든 것 같기도, 원망이 깃든 것 같기도 한 그 눈빛에 이엘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뭐라도 눈치챈 걸까.

그때 리엘라가 벌떡 일어났다. 밖에서 병사라도 불러올 생각인가 했더니, 리엘라가 들고 온 건 집무실 구석 수납함에 들어 있던 구급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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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이 다 터졌잖아요. 어디서 패싸움이라도 하고 다녀요? 방황하는 불량 청소년처럼?”

상자에서 연고를 꺼내든 리엘라가 다가오자 이엘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마침내 마주 본 얼굴에 리엘라도 들숨을 삼켰다.

어쩐지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더라니, 이엘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오른쪽 눈가와 입꼬리가 터져있고, 볼에는 푸른 멍까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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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아니네. 이 정도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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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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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용병 출신이잖아요. 상처만 보면 딱 아는데 어디서 발뺌을 하실까.”

거들먹거리는 말투에 비해 이엘의 손등에 연고를 발라주는 손길은 다정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리엘라는 차마 이엘의 얼굴에까지 직접 손을 대기는 민망했는지, 조금 망설이다가 연고를 통째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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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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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요. 뭘.”

리엘라는 그대로 일어나는 듯싶더니 다시 흠칫했다.

잠깐 굳어 있던 리엘라가 갑자기 어수선하게 굴며 어디에선가 꺼내온 건 흰 손수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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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고?’

이엘이 빤한 눈만 들어 보이자 별수 없다는 듯이 리엘라가 얕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음 순간, 이엘의 가슴에 리엘라가 폭 안겨들었다.

아니, 그런 줄만 알았다.

가까이 다가온 리엘라가 팔을 들어 이엘의 목을 감았다. 그 상태 그대로 이엘이 얼어붙어 있는 동안, 리엘라는 그의 목에 손수건을 둘러주었다.

이엘의 목에 난 자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감추어주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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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경. 계속 위험한 일 하고 다녀요?”

다정하게 꾸짖는 목소리. 그 속삭임이 멍한 이엘의 정신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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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아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매듭을 만든답시고, 리엘라의 가느다란 손길이 이엘의 어깨 위에서 사부작거렸다.

이엘은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가 눈을 부릅떠보니 리엘라의 희고 가느다란 목덜미가 바로 코앞이었다.

당장 두 손을 들면 한 번에 움켜쥘 수 있는. 단번에 꺾어버릴 수도 있는 연약한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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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연맹의 지령을 무시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난 모르겠구나.”

 
이엘은 손아귀를 펼친 채로 덜덜 떨었다.

가슴에 걸린 마석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더 망설이지 말라고, 당장 저 여자를 한입에 삼켜버리라고 종용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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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다 됐……!”

이엘은 이를 악물고서, 물러서려는 리엘라의 팔을 꽉 잡아 끌어안았다.

리엘라가 깜짝 놀라 올려다보자 이엘이 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아주 고통스러운 갈등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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