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끝까지 갈 생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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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끝까지 갈 생각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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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끝까지 갈 생각이라면
2022.02.24.
여유로운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리엘라는 루와 정원을 산책하겠다고 했다.
“나가겠다고?”
“그럼, 가둬두시려고요?”
리엘라는 헤르한이 눈을 흘기는 모양을 똑같이 따라 하며 되물었다.
꼭 거울처럼 저를 흉내 내는 모습에 헤르한은 너털웃음을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아, 웃으면 지는 건데, 후회했을 땐 리엘라가 이미 자신의 승리를 직감하고 외출용 양산을 꺼내 드는 중이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던데. 리엘라.”
헤르한은 팔짱을 낀 채로 벽에 몸을 기댔다.
“이젠 네가 나보다 강해.”
그러자 외출 채비에 분주하던 리엘라가 헤르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저 역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을, 리엘라는 짓궂은 미소로만 응수했다. 지난밤 내내 헤르한의 손길에 휘둘렸던 것을 복수라도 하듯이.
“저 정원 보이지? 푸른 담장 부분. 여기 창문에서 보이는 건 저기까지니까 저 담장을 넘어가지 마라. 루를 꼭 데리고 다니고 호위도 붙였으니까…….”
“다녀올게요!”
끝날 줄을 모르고 이어지는 헤르한의 걱정도 리엘라는 단 한마디로 일축했다.
헤르한은 마냥 미련 없이 침실을 나서는 리엘라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내가 너를 이기지 못하는 건 확실해. 내가 더 초조한 쪽이니까. 내가 더 불안하고, 너의 손길 하나 더 아쉬운 입장이니까. ……제길. 아시온 말이 또 맞았군.’
이러다간 정말 아시온의 말마따나, 자신이 ‘리엘라의 종’을 자처하는 날도 머지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벌써 그렇게 된 것일 수도.
헤르한은 창가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턱을 괴었다.
그러고 조금 기다리니 얼마 되지 않아 밖으로 나간 리엘라와 루가 보였다. 먼저 황제를 알아본 루가 창가 쪽을 가리켰고, 리엘라는 거길 향해 고개를 들고 황제를 올려다보면서 한참 맑게 웃었다.
여름 햇살을 담뿍 받아 참 싱그러운 미소였다.
헤르한은 무심결에 리엘라를 따라 웃었다. 그러다가 막상 리엘라가 멀어지기 시작하니, 여태 느낀 행복 이상의 고뇌가 밀려들었다.
‘하아……. 멀리서 보고 작게 봐도 저렇게 예쁜데 어떻게 하지?’
턱을 괸 헤르한의 한숨이 짙어졌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만 눈독 들이면 어떻게 하나, 리엘라?’
누가 들으면 웬 팔불출이냐 싶겠지만 헤르한에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진지하고도 심중한 고민이었다.
어제 왕녀가 파비안과 함께 황궁을 떠났다.
급하게 달려와 그 사실을 알린 건 아시온이었다.
“왕녀의 거동이 수상합니다. 서궁 시녀들에겐 남쪽 라테스 산맥 부근을 여행하고 오겠다고 했다는데, 망루에서 확인해 본 결과 왕녀가 간 방향은 북동쪽입니다.”
“북동쪽이라면…….”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예상 진로대로라면, 중앙 신전입니다.”
헤르한은 놀란 나머지 얼굴을 구길 정신도 없었다.
밀매상과 몰래 접선했던 왕녀가 이젠 중앙 신전 쪽으로 접근한다라. 대체 무슨 꿍꿍이로? 정말 리엘라의 정체를 눈치라도 챘단 말인가? 그래서 신전에 리엘라를 고발하려고?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왕녀의 속을 읽어놓는 건데, 그 약혼자 놈이 혼을 빼놓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제가 지금 바로 뒤를 밟겠습니다.”
“괜찮겠나? 며칠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아이고. 폐하야말로 저 없이 괜찮으시겠습니까?”
헤르한은 여유롭게 웃으며 돌아서는 아시온에게 마지막 당부를 더했다.
“아시온. 전에 명한 것 기억하고 있지? 리엘라에게 허튼짓을 하려는 자는 그 자리에서 베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상대가 왕족이나 신관……, 이어도 말입니까?”
헤르한은 살포시 눈을 감는 것으로 긍정했다.
신의 노여움을 사는 것.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는 것. 그건 리엘라를 품에 안는 순간 각오한 일이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아시온이 왕녀의 마차를 추적해 떠난 지 몇 시간.
그 목적지가 정말로 중앙 신전이라면 늦어도 내일은 그 결과를 알게 될 것이었다.
‘왕녀가 리엘라를 고발하려는 거라면……. 그땐 정말 죽이는 수밖에는…….’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 자리를 되찾기까지 헤르한은 숱한 전투를 거쳐 왔다. 적을 처단하는 것은 그에겐 거리낄 것 없는 일이었으나 문제는 리엘라였다.
과연 리엘라가 이해해줄까? 너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괴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폐하. 리오타 대사관 수석 보좌관의 알현 요청이 있습니다.”
“뭐, 누구라고?”
가뜩이나 머리가 아플 때, 예상치 못한 방문객은 헤르한의 심기를 더 어지럽혔다.
“무슨 일이지? 리엘라는 없는데.”
헤르한은 일부러 직접 문 앞에 나가 이엘을 맞았다.
“압니다. 산책하러 나가셨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그러면?”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이엘에게 붙인 감시병이 괜히 초조한 낯빛을 띠었다. 헤르한은 그에게 손을 들어 편히 있으란 뜻을 보이고는, 이엘을 내실 안으로 들였다.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헤르한의 말에 이엘은 정말 무례할 정도로 단도직입적인 물음을 건넸다.
“대사님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헤르한은 그 질문을 받고 처음 몇 초간은 마냥 벙쪘다. 질문의 뜻도, 질문의 의도도 알 수가 없어서.
“대사님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알리지 않을 생각이다.”
“따로 판별 받지 않아도 폐하는 이미 아실 텐데요. 확실하게.”
머리카락이 드리운 그늘 아래, 이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헤르한의 머릿속을 꿰뚫었다.
이엘의 말이 맞았다.
신관의 판별 따위 없어도 헤르한은 리엘라의 존재를 확신했다.
엔릴의 후손이기에 그랬다. 마침내 맞물린 영혼의 반쪽에게 정화 받는 입장으로서, 본능적으로 그걸 모를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아시면서, 확신하시면서, 어째서 대사님을 방치하고 계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내가 리엘라를 방치한다고?”
“폐하의 곁에 가까이 두시는 것.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 뻔히 내놓고 품고 계시는 것. 그게 방치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주제넘은 말이었다.
필요에 의해 살려두었고 리엘라의 면을 보아 참아왔지만, 이제는 참기가 힘들었다.
이 자를 어떻게 끊어내야 할까. 너무 많은 진실을 알고 있으니 그냥 베어버려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헤르한의 눈길이 칼을 찾는 동안 이엘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대사님은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의 눈에 띄었고 표적이 되셨습니다. 며칠 전에도 대사님을 둘러싼 소문을 해명하시느라 긴급회의를 주관하신 것으로 압니다. 지금도 이런데 앞으로는 어쩔 작정이십니까? 대사님을 끝까지 책임지실 작정이 아니시라면…….”
“내 계획을 너에게 설명할 이유는 없다.”
다만 여기서 치워버리면 그뿐.
“뭐가 없다고요?”
그런데 하필 그때 리엘라가 돌아왔다.
서로를 향해 날을 있는 대로 세우던 헤르한과 이엘은 애써 급하게 각자의 시선을 거두어갔다.
“폐하.”
리엘라는 곧바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헤르한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험악하게 일그러진 헤르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꼭 성난 아이를 달래기라도 하듯이.
“그새를 못 참고 또 싸우고 계신 것 아니죠?”
“리엘라! 난 정말 가만히 있었는데 저자가 먼저 시비를…….”
헤르한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차마 끝맺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어린 애나 할 법한 말 같아서.
어색한 분위기에 말을 돌린 건 이엘이었다.
“대사님께서 보실 서류를 들고 왔습니다.”
“아. 굳이 여기까지……. 고마워요. 이엘 경.”
“아닙니다. 왕녀님이 말없이 출타하셔서 수습해야 할 문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알아요. 근데 이건 나 혼자 처리하기는 좀 힘들 것 같은데…….”
리엘라가 도움을 청하듯 헤르한에게 눈을 굴렸다.
하지만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외면했다. 리엘라가 혼내기는 저만 혼내고 이엘과는 다정하게 업무 얘기만 나눈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폐하. 잠시 이엘 경과 집무실에 다녀오면 안 되나요?”
“안 돼.”
“그러면 여기서는요? 여기서 이엘 경과 잠깐만 같이 일하면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돼.”
“그러면 어떻게 해요? 이건 혼자선 못 해요.”
“그냥 이엘에게 맡겨.”
“그럼 저는요? 그냥 다 된 서류에 사인만 해요?”
“그래. 그렇게라도 해. 리엘라, 네가 이엘과 마주 앉아서 일하는 일은 이제 없을 거다. 차라리 내가 하면 했지.”
“…….”
빠르게 오가던 말이 뚝 그쳤다.
리엘라에게 등을 보이고 단호한 말만 뱉던 헤르한은 아뿔싸 싶었다.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더 무리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노라는 고백을 들은 게 바로 어제인데. 그래놓고 바로 오늘, 또 다른 사내를 질투하며 리엘라에게 일에서 손을 떼란 말이나 퍼부어버리다니.
“리엘라. 내 말은, 널 무시하는 게 아니라…….”
“폐하 말이 맞아요.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그런데 뒤늦은 변명이라도 하려고 몸을 돌린 헤르한이 마주한 건, 의외로 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 리엘라였다.
“폐하와 이엘 경이 같이 일을 하세요. 전 두 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게요! 그러면 되죠?”
*
“어때요, 잘 되어가는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리엘라 님. 분위기가 살벌한 것 같아요.”
“그래도 대화는 하잖아요? 화해의 조짐 아닐까요?”
황제의 침실 안에 갇힌 리엘라와 루는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황제는 이엘과 마주 보고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리엘라가 처리해야 할 업무 서류를 대신 살피면서.
“그러잖아도 폐하께 이엘 경의 접근 금지 명령을 거두어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는데 잘됐어요. 이 기회에 둘이 좀 친해지면 좋겠네.”
“글쎄요. 리엘라 님. 두 분이 친해지고 말고 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루가 머리를 긁적였지만 리엘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어제 일로 폐하도 이젠 좀 변하셨을 거예요. 날 정말 믿으신다면 굳이 이엘을 적대하실 이유도 없잖아요?”
*
당연히 어림도 없는 기대였다.
“내가 널 마주 앉혔다고 해서 너에 대한 경계를 풀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딱히 바라는 일도 아닙니다.”
두 사람은 차마 리엘라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 잠시 마주 앉았을 뿐이었다.
멀리서 언뜻 보면 사이좋게 서류를 나누어 보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들 사이에 오가고 있는 건 냉기 서린 독설이었다.
“네가 리엘라의 정체를 좀 안다고 리엘라의 보호자라도 되는 건 아냐.”
“폐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대사님이 안투의 후손이라고 해서 당연히 폐하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리엘라를 황후에 앉힐 생각이라면?”
“……예?”
쉬지 않고 오가던 대화는 기어이 헤르한이 꺼내든 최후통첩에야 잠시 멎었다.
주춤하는 이엘을 보며 헤르한은 비로소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아까 네 말. 리엘라를 끝까지 책임질 게 아니라면 이쯤에서 놓으란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그럼 이젠 어떻지? 내가 끝까지 갈 생각이라면?”
이엘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내 헤르한에게 맞서듯 치뜬 시선까지 그대로 굳은 채.
“리엘라가 현명했어. 우리 둘을 이리 마주 앉혀놓은 것 말이야. 리엘라가 그러지 않았다면 난 아까 그 자리에서 널 죽였을 거다. 하지만 리엘라 덕분에 차분해졌어. 덕분에 너에 관한 생각도 바뀌었다.”
“인심 좋게 살려주시려고요?”
“아니. 철저히 쓸모를 다 하고 죽일 셈이다.”
헤르한은 이엘의 시선에 차분하게 응수하며 대답했다.
“널 찬찬히 볼수록 왠지 그런 확신이 들어서 말이야. 리엘라를 끝까지 지키는 데 있어서 네가 아주 유용한 카드가 될 것 같다는.”
그 말에 이엘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가 이내 흥미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헤르한도 마찬가지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찌릿하게 통하는 눈빛을 타고 말 없는 대화가 오갔다.
그래, 해볼 테면 해 봐, 어디 한 번, 얼마든지 덤벼보시지, 하는.
“두 분, 간식 좀 드실…….”
때마침 상황이 궁금했던 리엘라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등장했다.
간식이래 봤자 응접실 어딘가에 진작 놓여있던 쿠키 접시를 들고.
사실은 그마저도 슬쩍 이들 사이에 두고 다시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어라?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네? 서로 보면서 웃기까지 하고?’
그때 이엘이 여유만만하게 리엘라에게 말을 건넸다.
“예. 대사님. 폐하께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시던 참입니다. 대사님의 향후 거취에 관한 대단한 계획을 들려주셨는데……. 아. 혹시 말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폐하?”
이엘을 향해 한껏 도발적으로 웃던 헤르한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껏 올라갔던 입꼬리는 그대로 웃지도, 다시 내려오지도 못한 채 파들파들 떨렸다.
“응? 제 거취에 관한 대단한 계획이요? 그게 뭔데요, 폐하?”
당연히 리엘라는 마냥 순수하게 미끼를 물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리엘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요? 왜 저만 모르는 거예요? 뭔데요?”
“벼, 별거 아니라니까…….”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들었으니 이 정도는 복수는 해드려야지.
당황해하는 헤르한에게 이엘은 일부러 빙긋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