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앞으로도 내 여자2022.02.20.
순간 헤르한의 눈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 오늘은 파비안이나 왕녀님 얘기는 더 안 하겠다는…….”
“알아.”
헤르한은 대답과 동시에 성큼 다가왔다. 그가 무릎을 짚은 자리에 매트리스가 움푹 패면서 침대가 출렁였다. 리엘라는 자연스레 헤르한의 어깨를 잡았고 헤르한은 리엘라의 허리를 감아 눕혔다.
곧 제 위에 올라타는 묵중한 몸에, 또 그 온기에 리엘라의 심장이 미칠 듯이 뛰기 시작했다. 누운 채로 올려다본 헤르한의 얼굴은 그늘이 져서 날렵한 선이 평소보다 더 도드라져 있었다. 그 와중에 정염에 살짝 붉어진 눈가, 그 시선을 수줍게 응시하면서 리엘라는 어서 그가 자신을 품어주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밤만 그럴 건가?”
그때 헤르한이 낮게 물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헤르한의 더운 숨결이 리엘라의 콧잔등에 닿았다. 그는 일부러 입을 맞출 듯 맞추지 않으며 리엘라의 애를 태웠다.
“앞으로도 계속 내 여자 해주면 안 되고?”
“그건……. 생각해보고…….”
두 사람의 입술은 말을 머금는 모양대로 살짝 움직이면서 서로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마음을 안달 나게 하기에, 그 어떤 강렬한 입맞춤보다도 더 자극적인 접촉이었다.
“무슨 생각?”
“폐하가 하는 것 봐서…….”
피식. 헤르한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오늘 밤엔 특히 더 잘해야겠네.”
헤르한은 짓궂은 미소를 띤 얼굴 그대로 리엘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
온몸 구석구석, 샅샅이 닿는 입맞춤에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신음하다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마음껏 소리 내도 되는데. 어차피 여긴 내 침실이고.”
그때 헤르한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한창 입 맞추던 리엘라의 가슴 언저리, 그 희고 두툼한 살결을 입에 물고 지분거리는 채로.
“그, 그러고 말씀하지…… 마세요.”
“왜? 리엘라. 넌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앞으로는 오해 생기지 않게 다 솔직히 얘기하자며?”
“그, 그래도 지금은……!”
쿡쿡, 낮게 웃은 그가 방금까지 입 맞추던 그 자리에 붉고 선명한 열꽃을 피워냈다. 리엘라는 불에 닿듯 아찔한 촉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리엘라를 애태우자고 한 행동에 저 역시 달아올랐는지, 헤르한의 얄궂은 장난은 거기까지였다.
“사랑해.”
그 후 열렬하게 치대는 몸짓 사이, 헤르한은 거친 호흡을 몰아서 할 때마다 숨을 뱉듯 그 말을 뱉었다.
‘이미 말씀하셨잖아요. 오늘 밤. 벌써 수도 없이, 여러 번.’
리엘라는 대답을 속으로만 삼켰다. 머릿속은 점점 하얘지는데 몸은 더 뜨거워져만 가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저와 같은 체온으로 끓고 있는 단단한 몸에 꼭 안겨드는 것뿐이었다. * 그날 새벽. 땀에 젖은 축축한 몸 안에서 뒤척이는데 이내 아주 선선한 기운이 불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잠결에 눈을 뜬 리엘라는 헤르한이 자신을 안은 채로 손부채질을 해주고 있다는 걸 알았다.
“……푸흡.”
“웃어? 내 사랑이 가소로워?”
“아뇨. 너무 위대하고 기분 좋아요.”
리엘라는 웅얼거리며 헤르한에게로 파고들었다. 어느 한 부분이라도 떨어지기가 싫어서 맨살의 모든 부분을 헤르한에게 밀착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발끝을 꼼지락거리며 헤르한의 종아리 사이에 밀어 넣자, 그가 움찔하며 손부채질을 멈추었다. 리엘라는 자신이 어떤 앙큼한 짓을 한 것인지도 모르고,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저 이제 기절 안 해요. 그렇죠?”
“그렇지.”
“저 이제 완전히 튼튼해졌나 봐요. 밥 잘 먹고 운동한 보람이 있었어요.”
“운동했나? 나랑 있을 때 기절 안 하려고?”
“아……. 그게…….”
아주 뿌듯한 얼굴로 자랑을 하던 리엘라는 금방 부끄러움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냥 틈틈이 체조…… 정도.”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가 사랑스러워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체력을 키워보겠다고 방 안에서 몰래 야무지게 팔다리를 휘둘렀을 리엘라의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귀엽고, 대견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는데. 그동안 네가 기절했던 건 아마 날 정화하느라 무리해서……. 내 힘에 적응하느라 그랬던 걸 텐데.’
그런 것도 모르고 리엘라가 자신을 놀린다며 야속하게 여기고 원망했던 밤들. 그 미안함과 감사함을 어쩌지 못해 헤르한이 지긋한 눈길만 쏘아낼 때, 리엘라가 별안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 운동 더 열심히 할게요.”
아직 부끄러움을 다 떨치지도 못했으면서도 나름대로 결연한 얼굴이었다.
“리엘라. 그럴 필요는…….”
“아뇨. 저 더 튼튼해질 거예요. 그러니까 폐하도 저를 좀 더…….”
“…….”
“좀 더 사랑해주셔도 괜찮아요.”
리엘라는 부끄러웠는지, 말을 마치자마자 헤르한의 다리 사이에 밀어 넣었던 발끝을 괜히 꼬물거렸다. 헤르한은 단전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른 한숨을 느른하게 뱉어냈다. 아직 해가 뜨려면 시간이 남아 있었다. 리엘라가 오롯이 당신의 여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약속한 시간이 다 끝난대도 멈출 생각은 없지만.’
헤르한은 다시 상체를 일으켜 리엘라에게 입술을 포갰다. * 느긋한 오전, 호수궁으로 출근하는 로리엘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로리엘 양.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저녁에 본가에 다녀왔다더니,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흐흥. 그런가요? 모처럼 가족들을 보고 와서 그런가 봐요.”
로리엘은 상냥하게 웃었다. 사실 그녀가 기분 좋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엘라 님, 어제 폐하께 루를 보냈던 것도 퇴짜를 맞았었지? 후후. 폐하도 참. 리엘라 님을 옆에 끼고서 죽고 못 살듯이 구시더니 이렇게나 빨리 흥미가 떨어지실 줄이야. 우리 리엘라 님 처지가 안쓰러워서 어쩌나? 고작 뭣도 안 되는 대사직 하나 받고 끈 떨어진 신세가 되었네?’
리엘라가 황제의 총애를 잃으면 리엘라의 시녀인 자신의 입지 역시 불리하겠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도 상쾌한 마음이 앞섰다.
‘차라리 이 기회에 다른 곳으로 소속을 옮기면……. 아니면 내가 직접 폐하의 눈에 들어봐?’
막상 따져보니 마냥 허무맹랑한 계획도 아닌 것 같았다. 외국에서 온 용병 출신 여자보다야, 이 나라 황실에서 일했던 공신 가문에서 곱게 자란 자신이 황제의 짝으로는 백 번 더 어울릴 테니까. 애초에 귀족인 자신이 그 평민 여자의 수발이나 든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 로리엘 양! 어서 본궁으로 가 봐요. 폐하의 호출이에요.”
“네? 폐하께서……. 저를요?”
“네. 로리엘 양을 콕 집어 부르셨어요.”
‘역시!’
로리엘은 뛸 듯이 기뻐하며 당장 거울 앞으로 달려가 제 옷매무새며 머리 모양을 다듬었다.
‘그래. 말이 되는 건 바로 이런 거지! 호수궁에 오며 가며 얼굴 마주친 게 몇 번인데, 역시 폐하께서도 날 신경 쓰고 계셨던 거야.’
로리엘은 천한 것의 종노릇을 자처하며 옆에 붙어 있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향수까지 폭 뒤집어쓰고 만반의 준비를 마친 로리엘은 당장 본성으로 향했다. 황제의 내실은 한적하고 선선한 호수궁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복도, 그리고 그 복도마다 서 있는 기사들. 그들 곁을 당당히 지나면서 로리엘은 말 못 할 쾌감을 느꼈다. 황제의 여자가 된다면 늘 이렇게 구름 위에 뜬 것처럼 우월감을 누리며 살게 될까?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로리엘 이그드니스입니다.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헤르한은 흰 셔츠 차림으로 내실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 이그드니스 영애.”
“예. 폐하.”
황제의 나른한 부름에 로리엘의 얼굴이 바짝 달아올랐다.
‘어쩌지? 이제 어떻게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니면, 폐하가 뭔가 하시기를 얌전히 기다려?’
로리엘은 어쩔 줄 몰라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데 황제가 의아한 듯 물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예? 그게……. 폐하께서 저를 호출하신…….”
“아니. 호출한 건 맞는데, 왜 거기 멀뚱히 서 있기만 하느냐고. 리엘라는 저 안에 있다.”
황제가 턱짓한 곳. 우측 안쪽의 침실. 그곳을 향해 로리엘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리니, 안에서 로리엘을 발견한 루가 손을 흔들며 배시시 웃었다. 로리엘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기는 웃음이었다.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한 로리엘의 뒷골이 뜨끈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아……. 리엘라 님이…….”
“네! 어젯밤 여기서 주무셨잖아요. 아, 로리엘 양은 어제 일찍 퇴근하셔서 몰랐구나!”
잠깐 응접실로 나온 루는 마냥 해맑았다.
“폐하께서 오늘 아침은 여기서 리엘라 님을 채비하라고 하셨는데 제가 아직 머리를 만져드리는 게 미숙해서……. 헤헤. 머리 묶는 솜씨는 로리엘 양이 최고잖아요!”
로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절로 구겨지려는 표정을 열심히 감추며 침실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황제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이그드니스 영애. 향수가 좀 진한 것 같군. 본인 치장은 얼마든지 해도 괜찮은데, 리엘라에게 향이 배진 않았으면 해서.”
“……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로리엘은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가 묵묵히 리엘라의 머리를 빗었다. 황제의 말대로, 리엘라의 몸에선 인공적인 향이라곤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저 뽀얀 비누 냄새와 간밤에 누군가와 진하게 부대끼며 배어난 체취뿐.
“로리엘 양. 오늘은 머리를 앞으로 늘어지게 반만 묶어줄래요?”
그때 리엘라가 나긋하게 물었다.
“왜요? 날이 더워서 전부 틀어 올리는 게 편하실 텐데요.”
“그냥…….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어서요.”
리엘라는 쑥스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로리엘은 리엘라의 머리를 걷어 올렸다가 그녀의 목덜미 아래 깊숙한 자리에 곳곳이 피어난 붉은 자국들을 보았다. 배알이 뒤틀렸다. 리엘라의 머리칼을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후. 리엘라는 옷차림을 다 갖추고도 밖으로 나서지 않았다. 황제와 하는 얘길 들어보니 내실 안에서 둘이 오붓하게 아침을 먹기로 했다는 것 같았다. 루 역시 그런 리엘라의 시중을 들겠다며 황제의 내실 안에 남았다. 쓸모를 다 한 로리엘은 쿵쾅거리며 제 침실로 돌아가다가, 문득 호수궁 로비에서 몸을 틀었다.
“보좌관님. 계세요?”
로리엘이 굳이 들른 곳은 대사관 집무실이었다. 역시나 이엘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리엘라 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왕녀님께서 약혼자분과 함께 외출하셨다고요?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떠나셔서 괜히 대사관이 곤란해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건 제가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용건이 뭡니까?”
“당연히 오늘 리엘라 님이 보셔야 할 업무 서류를 가지러 왔죠.”
이엘은 평소보다 더 까칠했다. 그럴수록 로리엘은 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휴우. 오늘은 서류를 본궁까지 가져다드려야 하니 이래저래 운동하게 되네요.”
“본궁이요?”
“네. 어젯밤 리엘라 님께서 폐하의 침상에 드셨거든요. 오늘도 종일 내실에 함께 계실 작정이신 것 같던데……. 모르셨나 봐요? 보좌관이시니 당연히 알 줄 알았는데.”
“……그렇군요.”
“네. 두 분 금슬이 참 좋아요. 한시도 떨어져 있기가 싫으신가 봐요. 호호. 이러다가 정말 리엘라 님이 황후 관까지 쓰시는 것 아닐까요? 어머. 그러면 이엘 경도 황후의 보좌관으로 승진하게 되는 거네요. 좋겠어요.”
로리엘의 눈에 이엘이 동요하는 것을 감추려고 일부러 빈 서류에 시선을 처박는 것이 전부 보였다.
‘아주 세기의 짝사랑 나셨어.’
별 볼 일 없는 가문이 아쉬웠지만 그걸 상쇄할 정도로 이엘은 매력적인 남자였다. 빼어난 외모에 좋은 머리. 그런 그가.
“……그냥 두십시오. 오늘 서류는 제가 대사님께 직접 전하겠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야망에 솔직해지기까지 하면 어떻게 될까?
“네. 그러세요.”
로리엘은 싱긋 웃었다. 부디 아주 재미있는 싸움이 펼쳐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