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오늘 밤은 당신의 여자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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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오늘 밤은 당신의 여자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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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오늘 밤은 당신의 여자로만
2022.02.17.
내 여자라고. 내 사람이라고. 보물이라고.
지금껏 황제가 장난 반, 또는 타의 반, 속을 알 수 없이 하는 말은 많았지만 이런 고백은 처음이었다.
일부러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오직 자신에게만 들리는 진솔한 목소리로, 눈을 바라보며 하는 고백.
“넌 정말 꿈에도 모를 거야.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람인지…….”
“폐하…….”
눈꼬리에 살짝 맺힌 눈물이 흘러내릴 새도 없이 헤르한이 리엘라의 눈가를 할짝거렸다.
그러곤 촉촉해진 입술로 다시 리엘라의 입술을 머금었다.
헤르한의 입맞춤은 간절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했다. 그만큼 급하고도, 격정적이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몸을 잠시 뒤로 밀어냈다.
그게 거절의 뜻이기라도 한 줄 알고 헤르한의 미간이 한껏 긴장한 채 일그러졌다.
“제가 아직 파비안에게 미련 있는 줄 아셨다고요? 왜요?”
그걸 몰라서 묻나?
하지만 헤르한이 인상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리엘라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황제에게 그동안 충분히 확신을 주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가 도착했다는 걸 듣자마자 서궁으로 갔잖아.”
이렇게까지 일일이 말해야 하나.
민망한 마음에 헤르한의 귓가가 붉어졌다. 그 와중에도 리엘라의 몸이 닿은 곳들이 홧홧하게 달아올라서 더욱.
“파비안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그러면?”
“왕녀님을 보러 간 거예요.”
뭐?
일그러졌던 헤르한의 미간이 단번에 펴졌다.
“왕녀님에게 나 멋있게 잘살고 있는 거 보여주려고 다녀온 거였어요. 그때 파비안은 만나지도 않았어요. 파비안은 오늘 처음 봤어요. 그것도 서궁에서 절 급하게 불러서 어쩔 수 없이.”
얼마나 억울했던지, 리엘라는 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하필 제 휴가를 두고 황실에 이상한 소문도 돌아서……. 그게 폐하께 누가 될까 봐 걱정됐어요. 그래서 일부러 더 열심히 일한 건데. 자랑하러 간 저를 폐하는 만나주지도 않으시고. 그래서 전 제가 역시 폐하의 발목을 잡은 줄 알고 걱정이 되어서…….”
서러움이 가득 담긴 항변 이후 리엘라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걸 보면서 헤르한은 며칠간 가슴 가득 꾹꾹 눌러 담았던 답답함을 긴 한숨으로 전부 토해냈다.
그랬나. 그랬던 건가.
오해가 풀렸는데도 후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리엘라를 믿지 못하고 힘들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몇 배는 더 무겁고 괴로웠다.
“제가……. 지겨워지신 것 아니었어요?”
이어진 리엘라의 물음이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헤르한은 눈을 더 질끈 감았다.
리엘라가 저런 말도 안 되는 고민을 하게 만들다니.
이 순간, 헤르한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한심하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벌을 받아야 할까…….”
“네?”
“나 말이야. 대체 무슨 벌을 받아야 널 오해하게 만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머리를 조아리라면 조아리고, 종이 되라면 종이 될 작정이었다.
때려야 분이 풀리겠다면 기꺼이 뺨을 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엘라는 그냥 헤르한을 제 품 가까이 끌어당기기만 할 뿐이었다.
“……그냥 말씀해주세요. 폐하의 마음. 솔직하게 다.”
“내 마음은…….”
헤르한은 리엘라가 이끄는 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사랑해. 리엘라 블리니테. 너에 관한 거라면 뭐든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굴 정도로. 네가 너무 아깝고 소중해서 자꾸만 바보처럼 굴게 될 정도로. 그만큼 사랑해.”
리엘라가 사슴 같은 눈망울을 들어 헤르한을 절절하게 보았다.
이대로 볼썽사나운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어서 입을 맞춰달라고 채근하듯이.
리엘라의 팔이 헤르한의 목을 감았고, 헤르한은 기꺼이 제게 안겨 오는 이의 호흡을 삼켰다.
*
그레타와 파비안은 아직 만찬장 문 앞에 있었다.
리엘라와 헤르한이 있는 곳으로부터 세 번 꺾어진 복도와 두꺼운 중문 하나를 사이에 둔 곳이었다.
그런데도 파비안은 무수한 벽을 관통해, 정확히 리엘라와 헤르한이 서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서 가슴을 뜯고, 숨을 헐떡이고, 또 눈물을 구토처럼 쏟으면서 바닥에 주저앉아 괴로워했다.
“두 사람, 어쩌고 있어?”
네발로 선 짐승처럼 몸을 말고 우는 파비안을 향해 그레타가 물었다.
“껴안고 있니? 입맞춤이라도 하고 있어?”
울음에 숨을 쉬기도 힘들어하는 파비안과는 달리, 그레타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어서 파비안. 난 너처럼 벽 너머를 보지 못하잖아. 대답이라도 해줘야 알지.”
그레타의 채근에 파비안이 엎드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참담하게 위아래로 떠는 고갯짓에 따라 그의 눈물이 후드드 떨어져 바닥의 카펫을 적셨다.
“그렇구나. 내 말이 맞지, 파비안?”
“…….”
“직접 보니까 이제 믿겠어?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리엘라는 너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거. 너 보란 듯이 단단히 황제를 붙잡고 매달려 있는 거.”
파비안은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토해냈다.
리엘라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왕녀와 입을 맞추는 자신을 보았을 때 이렇게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 아팠을까?
눈을 감았는데도 저 벽 너머에 있는 두 연인의 모습은 파비안의 머릿속에서 흐려지지 않았다.
“파비안. 세상 사람들이 능력자들의 힘을 ‘저주’라고 하는 말, 난 믿지 않아. 파비안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지금은 저 두 사람을 엿보는 네 그 힘이 저주스럽겠지만, 언젠가 분명히 오늘을 감사히 여기게 되는 날이 올 거야.”
“모르겠어요. 저는……. 괴로워요. 이제 그만 보고 싶습니다. 제발…….”
“아니. 안 돼.”
그레타는 자꾸만 고개를 돌리려는 파비안의 턱을 억지로 잡아 앞을 보게 했다.
“똑똑히 봐. 그리고 똑똑히 기억해. 지금 네가 겪는 절망, 슬픔. 그거 하나도 잊지 말라고.”
그레타는 몸부림치는 파비안을 꼭 끌어안았다.
***
엔릴의 후손. 다시 말해 ‘능력자’.
그레타는 자신이 살면서 그런 대단한 존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벽 너머가 보인다고요? 정말이에요?”
“예……. 사람이 있는 경우만요. 저 뭐, 큰 중병인 겁니까?”
“아, 아뇨. 그건 병이 아니라……. 파비안. 아무것도 몰라요?”
“무얼 말씀이세요?”
심지어 본인이 엔릴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모르는 남자.
마냥 순진하고 착해 빠져서 자신이 말해주는 것들만 곧이곧대로 철석같이 믿는 남자.
그는 그레타의 삶에 찾아온 한 줄기 빛이었다.
“아버지. 이번 일을 해결해줄 적임자를 찾았어요.”
“정말이냐? 제대로 믿을 만한 놈이겠지?”
당시 리오타 왕가는 엘슈바이크 제국의 황제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었다. 국경 어딘가에 숨어서 자신의 황위를 노리고 있는 황태자 헤르한을 대신 처리하라는 협박이었다.
“그냥 뜨내기 용병 아니냐?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자 같은데?”
“아뇨. 우리 왕실을 구하고, 이 나라까지 일으킬 사람이에요.”
리오타 왕국은 소국이었다.
가진 것이 없어 옆 나라 엘슈바이크 제국에 기생하지 않으면 백성들을 먹여 살리지도 못하고, 왕가에 힘이 없어 국제회의에는 초청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그런 자신들이 전설 속에나 존재했다는 ‘엔릴의 후손’을 얻는다면?
‘파비안은 우리 왕국의 힘이 될 거야. 구질구질한 내 인생에 빛이 될 거라고.’
그레타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파비안을 제 사람으로 만들었고, 사랑했다. 문제는, 파비안의 곁에 찰거머리처럼 지긋지긋하게 붙어 있는 여자, 리엘라 블리니테였다.
“……파비안. 넌 남들과 다른 존재야. 네 힘 때문에 언제 어느 날 네게 죽음이 찾아올지 몰라. 널 살려줄 수 있는 건 나뿐인데. 그래도 날 잡지 않을 거야?”
“……리엘라 옆에서 계속 짐이 되고 싶어? 나를 따르는 게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일 아닐까?”
“……리엘라는 떠났어. 이 바보야. 네가 버린 게 아니라, 그 여자가 떠났다고.”
그레타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리엘라가 파비안에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파비안이 리엘라의 망령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임을.
파비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그레타는 방법이 필요했다.
***
그레타가 제국에 온 건 그래서였다.
첫째로는 파비안의 약을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둘째로는 파비안이 리엘라를 완전히 단념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제국에 와서 보니 리엘라는 그레타의 예상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빛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분한 일이었지만, 파비안을 위해서라면 차라리 잘된 일이기도 했다.
“파비안. 이젠 좀 괜찮아졌어?”
서궁으로 돌아온 그레타는 파비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파비안은 그새 혼이 빠진 듯 더 수척해졌다. 온몸으로 울며 리엘라를 털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레타는 그런 파비안을 껴안고 속삭였다.
“리엘라는 네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몰라. 자기가 뭘 놓친 것인지 알면 분명 피눈물을 흘리겠지.”
그레타는 며칠 전 밀매상에게서 구한 마지막 약을 파비안의 입에 물리며 말을 이었다.
“파비안. 중앙 신전으로 가자.”
꿀꺽. 약을 삼킨 파비안이 멍한 눈을 들었다. 처절한 울음에 잔뜩 충혈된 눈이었다.
“중앙 신전에 엔릴의 후손을 모시는 조직이 있대. 거기 가서 네 존재를 알리고 공인받자. 그래서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두에게 당당하게 보여주는 거야. 리엘라를 후회하게 만들어주자. 어때? 내 말대로 할 거지?”
파비안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에 파비안은 스스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타는 비로소 쓰게 미소 지었다.
“옳지. 내 사랑.”
*
“폐하. 무슨 일이에요?”
급한 보고가 있다며 잠깐 밖으로 나갔던 헤르한이 방 안으로 돌아오자마자 리엘라가 물었다.
하지만 헤르한은 리엘라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대신 한 손으로 자기 옷의 단추를 풀며 다른 한 손으로는 리엘라를 잡아끌고 입을 맞추었다.
“폐……. 으음…….”
헤르한이 묵직하게 기대오는 통에 리엘라는 하릴없이 뒤로 풀썩 넘어졌다.
뒤는 푹신한 침대였다. 헤르한의 체취가 그대로 배어 있는, 황제의 침실.
만찬장에서 도망 아닌 도망을 친 후, 리엘라는 헤르한에게 안긴 상태로 황제의 침실까지 왔다.
사람들이 보면 어쩌려고요, 또 해괴한 소문이 퍼지면 어쩌려고, 하는 말에도 헤르한은 막무가내였다.
“폐……하.”
지금 또한 막무가내인 건 마찬가지였다.
오해로 서로를 헛돌았던 짧은 시간이 헤르한에게 더 큰 갈증을 일으킨 걸까.
리엘라 역시 헤르한의 손길이 그리웠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그의 수에 넘어갈 뻔도 했지만, 기어이 속아 넘어가지는 않았다.
“저 알아요. 일부러 대답 피하려고 이러시는 거죠?”
헤르한은 다른 의미로 리엘라에게 감탄하며 물러났다.
“……내가 맨몸으로 들이대는데도 그걸 뿌리칠 이성이 있다고?”
“이제 솔직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러니까. 난 방금 본능에 솔직하게 행동한 건데.”
“폐하!”
장난은 그만하라며 흘겨보는 눈에 헤르한은 한숨을 쉬며 침대 밖으로 일어섰다.
도저히 리엘라를 끌어안은 상태로는 뱉고 싶지 않은 이름들이라.
“그레타 왕녀와 파비안이 떠났다는군.”
“네? 지금요? 아예 황실을 떠난 건가요?”
“아니. 서궁에 짐은 그대로 있어. 어딘가로 잠깐 잠행을 나간 모양인데 목적지는 따로 알리지 않았다는군.”
“아……. 그래요.”
“신경 쓰이나?”
“네. 리오타에서 오신 손님이 아무런 보고 없이 떠났으니 대사로서 당연히 신경 써야 할 일이잖아요.”
“……그래도 마음에 안 들어.”
이번엔 헤르한이 눈을 가늘게 뜨다가 돌아서 버렸다. 어리석은 질투가 어쩌고 하며 화해를 한 것이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의 등을 잠시 물끄러미 보았다.
설마 이런 거로 또 질투하는 거냐, 나에게 대사직을 맡긴 것은 당신이지 않으냐, 따질 수도 있었지만.
그 순간 리엘라의 머릿속에 아까 헤르한의 고백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에 관한 거라면 어린애처럼 유치하게 굴게 된다던, 그만큼 깊이 사랑한다던, 그의 고백이.
리엘라는 자신이 아직 그 고백에 답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른 얘길 하는 대신 나긋하게 헤르한을 불렀다.
“폐하.”
“……왜.”
“저 오늘 밤은 리오타 대사 안 할게요.”
헤르한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리엘라를 향하는 얼굴이 꼭 그림 같았다. 달빛 아래에 맨살을 훤히 드러낸 탄탄한 몸도 마치 조각인 양 황홀했다.
“오늘 밤은…….”
벌써 몇 번이나 안겼던 몸. 그런데도 도저히 제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그를 향해, 리엘라는 자신이 준비한 대답을 건넸다.
“오늘 밤은 폐하가 사랑하는 여자, 그것만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