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내 꼴은 이런데 넌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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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내 꼴은 이런데 넌 예뻐서
2022.02.10.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앞으로만 뛰던 리엘라는 본궁 정원 근처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아야……. 어머, 리엘라 님?”
상대가 먼저 알아보고 건네는 말에 리엘라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부딪친 이는 서궁의 시녀였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리엘라 님.”
“아녜요. 미안해요. 내가 앞을 제대로 보질 못해서.”
리엘라의 사과는 거기까지였다.
황제의 말에서 온 충격이 도무지 가시질 않아서 그대로 몸을 돌리려는데, 별안간 시녀가 그런 리엘라를 붙들었다.
“리엘라 님. 실례지만 지금 바쁘신가요? 왕녀님께서 이엘 경을 급하게 찾으시는데 대사관에 계시지 않아서요.”
“무슨 일이죠?”
“지금 왕녀 저하의 약혼자분 상태가 너무 위중해요. 당장 숨이 넘어가게 생겼는데 아무 약도 듣질 않아요!”
“네?”
멍하던 정신은 그제야 돌아왔다.
리엘라는 마침 근처를 지나던 시종에게 서궁으로 의사를 불러오라고 명한 뒤, 시녀와 함께 먼저 서궁으로 출발했다.
서궁은 난장판이었다. 그레타의 방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복도에까지 그레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빨리 의사를 데리고 오라고! 내 남자를 죽게 만들 셈이야?”
리엘라는 인파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발을 내딛자마자 그레타가 던져서 깨트린 화병의 파편이 바작바작 밟혔다.
개의치 않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리엘라 쪽으로 또 유리잔 하나가 날아왔다.
“뭐야? 여기가 어디라고 네가 멋대로 들어와?”
쨍그랑. 그레타가 던진 유리잔은 리엘라까지 닿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리엘라는 발끝으로 유리 조각을 밀어 치우면서 의연하게 대답했다.
“왕국에서 오신 손님이 아프신데 당연히 대사가 와야죠.”
“너 같은 거 부른 적 없어. 당장 꺼져. 의사나 데려와!”
그레타는 패닉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느라 여념이 없더니, 저 정도로 이성을 잃은 것을 보면 확실히 파비안이 위독하긴 한 모양이었다.
리엘라는 그런 그레타를 상대하지 않고 그냥 옆을 지나 파비안이 누워 있을 침실로 직행했다.
‘파비안…….’
시체처럼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파비안을 본 순간, 리엘라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아프다는 얘기는 누누이 들었고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도 생각했는데, 막상 창백하고 해쓱해진 몰골을 직접 보니 마음이 동요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나와. 나오라고!”
그때 파비안이 눈을 떴다.
자기 남자를 함부로 쳐다보지 말라면서 그레타가 리엘라를 괄괄하게 끌어내는 순간.
“리엘라…….”
파비안이 거친 쇳소리로 리엘라의 이름을 불렀다.
“리엘라. 정말 리엘라 너야……?”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파비안의 첫마디.
그레타가 아니라 리엘라를 향하는 그의 첫마디와 첫 눈길에, 손톱자국을 낼 정도로 리엘라의 팔을 꽉 잡았던 그레타의 손이 맥없이 스르륵 풀렸다.
“그래. 나야. 너 꼴이 왜 이래?”
리엘라는 꼿꼿이 서서 대답했다. 그러자 말갛게 뜬 파비안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러게. 내 꼴은 이런데. 넌……. 되게 예쁘네.”
*
루에게 자초지종을 다 들은 헤르한은 놀라고 억울한 마음에 목구멍이 꽉 막혀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다.
“내가 언제……. 내가 언제 리엘라가 지겹다고……. 내가 언제 리엘라를 무시했……. 같이 식사하자는 말은 듣지도 못했……!”
타이밍이 이다지도 지독하게 맞아떨어질 수 있는 걸까?
아까 내쫓았던 방문자가 루였다니! 게다가 리엘라가 하필 ‘지긋지긋하다’라는 부분만을 듣고 뛰쳐나갔다니!
그 말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만류하는 제스와 아시온에게 한 말이지, 절대로, 당연히, 리엘라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저희가 당장 리엘라 양을 찾아오겠습니다.”
“나도 가겠다.”
“아닙니다. 그랬다가 엇갈리면 안 되니 폐하는 여기 계십시오. 금방 오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리엘라를 오해하게 만든 공범이 되어 미안했던지, 아시온이 제스를 데리고 냅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루까지 그 둘을 따라 나가고 헤르한은 홀로 남아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제 리엘라를 매정하게 돌려보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미 끔찍한 회한의 밤을 보낸 뒤인데.
‘저녁엔 분위기 좋게 결혼……, 얘기를 한번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래서 청혼은커녕 사과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시온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집무실로 되돌아온 건 그로부터 삼십 분쯤 뒤였다.
“왜? 리엘라는?”
헤르한이 눈을 씻고 봐도 아시온은 혼자였다. 게다가 헐떡거리며 급하게 들어온 것 치고, 아시온은 말을 오물거리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리엘라 양은 나중에 따로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 리엘라에게 무슨 일이 있어? 못 찾았나?”
“아닙니다. 찾았습니다. 찾았는데…….”
“어디야? 답답해 죽을 것 같으니까 빨리 말해.”
헤르한의 날 선 채근에 아시온은 눈을 질끈 감고 사실을 고했다.
“서궁, 왕녀 약혼자분의 병상에 계십니다.”
당장이라도 리엘라가 있는 곳으로 튀어갈 듯 떠올랐던 헤르한의 엉덩이가 애매한 높이에서 엉거주춤 멈추었다.
헤르한은 입을 턱 벌린 채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곧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을 땐, 어제 아시온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러다가 리엘라 양이 아픈 마음을 달래고자 파비안을 만나러 가기라도 하면요?”
“그러려면 그렇게 하라지.”
*
리엘라는 서궁의 시종들을 시켜 어질러진 응접실을 치우도록 했다.
깨진 물건들을 다 치우고 정리를 마쳤을 즈음, 침실 안에서 진료를 마친 의사가 나왔다. 문틈으로는 파비안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는 그레타가 보였다.
“고비는 넘긴 것 같습니다. 이젠 안정을 되찾으셨습니다.”
“다행이네요. 확실한 병명은 아직도 모르나요?”
“예. 그건 아직…….”
“이상하네요. 파비안은 어릴 때부터 감기도 앓은 적이 없었는데.”
리엘라가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의사와 시종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침실 안에서 대화를 들은 그레타도 곧장 사나운 눈길을 쏘아붙였다.
“아. 파비안과는 어릴 적부터 친구라서요.”
그때 그레타가 방 밖으로 나오며 맞장구쳤다.
리엘라가 제 약혼자를 아는 체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지.
“대사 말이 맞아요. 대사와 제 약혼자는 오랜 친구랍니다. 대사가 저희 둘을 소개해준 거나 마찬가지죠.”
언제 악을 썼냐는 듯, 다시 고상하게 돌아온 말투였다.
“리엘라. 아깐 내가 미안했어요. 너무 무서워서 이성을 잃었나 봐요. 내 마음 알죠?”
리엘라는 대답 없이 시선을 외면했지만, 역시 그레타는 그것을 자기 좋을 대로의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리엘라가 와준 덕택에 파비안도 기운을 차렸나 봐요. 우정의 힘으로?”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정리도 다 마쳤으니,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대사.”
그레타는 떠나려는 리엘라를 붙잡았다.
“생각해보니 황궁에 온 지 며칠이나 됐는데도 아직 제대로 식사 한 끼 대접 못 받았지 뭐예요? 파비안도 깨어났으니 폐하와 공식적으로 식사 한번 해야 하지 싶은데요. 오늘 저녁 어때요?”
“당장 오늘 파비안이 괜찮을까요?”
“그럼요. 내 사람은 내가 알아요.”
그레타가 빙긋 웃었다.
“그새 몸도 잘 가누는걸요. 좋은 자리에 초대받으면 더 기운 날 거예요.”
“네. 그럼 폐하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대사도요.”
“…….”
“넷이서 같이 해요.”
분명 속이 썩어 문드러질 텐데도 왜 웃는 얼굴로 붙잡나 했더니, 역시 심보가 따로 있는 모양이었다.
리엘라는 알겠다고 대충 대답한 뒤 호수궁 침실로 직행했다.
아직 한낮인데도 온몸이 무겁고 힘들었다.
파비안 생각이나 왕녀 생각은 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헤르한 생각이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리엘라는 그저 혼자 있고 싶었고, 이불 속에 몸을 파묻고 싶었다. 호수궁 침실까지 가는 동안 제발 아무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침실 안에 헤르한이 있었다.
“리엘라.”
초조한 걸음으로 응접실 가운데를 왔다 갔다 하던 그는 리엘라를 발견하자마자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딜 다녀오나 보군.”
‘내가 파비안을 보고 온 걸 뻔히 알면서.’
리엘라는 아까 서궁으로 자신을 찾아온 아시온과 인사까지 나누었었다.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어.”
“뭐 하러요. 바쁘신 것 같던데 그냥 다른 사람에게 전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그건…….”
냉담한 리엘라의 대꾸에 헤르한은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오해야. 리엘라.”
“저를 만나기 싫다고 내치셨잖아요. 그거 폐하가 하신 말씀 아닌가요?”
“그건……. 맞는데…….”
그것만 맞는데. 딱 그거 하나만 맞는데, 리엘라는 하필 그 일을 따져 물었다. 그마저도 사무치도록 후회했고 나머지는 전부 다 오해인데.
빨리 리엘라에게 해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헤르한은 초조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리엘라가 여태 파비안을 보살피고 왔다는 사실에 질투가 끓어올라 미칠 것 같았다.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심지어 리엘라는 너무 지쳐 보였다.
그렇게나 열성을 다해서 파비안을 간호하고 왔나?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막상 눈앞에서 보니 아련한 옛 감정이라도 다시 살아났나?
“……그래. 그럼 쉬어라. 나중에 얘기하지.”
헤르한은 결국 투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간절하게 리엘라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 무색하게 돌아서 버렸다.
그의 등을 본 리엘라의 눈은 서럽게 커졌다.
그냥 이렇게 가버린다고? 나는 당신을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당신은 고작 한 번에 그냥 돌아서는 거야?
리엘라는 헤르한을 붙잡기 위해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꺼내 들었다.
“오늘 저녁 식사 같이 할 수 있을까요?”
“그래. 이따가…….”
“왕녀 저하와 파비안도 같이요.”
헤르한이 멈칫했다.
“힘들까요?”
“……전혀. 준비하고 있어. 이따 사람을 보내지.”
*
그날 저녁, 황궁 본성 만찬장에 높은 촛대가 모처럼 빛을 냈다.
황제가 만찬장에서 손님을 맞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시종들은 모두 기합이 바짝 들어 호화로운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그레타 왕녀와 파비안은 팔짱을 낀 채, 약속 시각에 정확히 맞추어 나타났다.
“영광입니다. 폐하. 이제야 황실에 온 것이 실감 나네요.”
“대접이 늦었군.”
“피차 어쩔 수 없었죠. 제 쪽에도 사정이 있었으니.”
파비안이 앓아누웠던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헤르한은 파비안을 향해 비뚜름한 시선을 내던졌다.
“오늘 아침까지 중환을 앓았다는 것 치고는 혈색이 괜찮은데?”
파비안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대답했다.
그의 팔 한쪽에는 여전히 그레타가 매달려 있는 채였다.
“빠르게 회복하고 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로 신경 쓴 적 없으니 개의치 마.”
“…….”
헤르한의 노골적인 무시에 그레타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그레타는 검은 눈알을 굴려 분한 마음을 대신 퍼부을 대상을 찾다가 황제에게 물었다.
“리엘라는 아직인가요?”
“아직 준비 중이다.”
“엘슈바이크의 법도는 저희 리오타와는 다른가 봅니다. 가장 낮은 사람이 모두를 기다리게 하다니요.”
“아니. 우리의 법도도 리오타와 같아. 가장 귀한 사람이 가장 늦게 도착하지.”
헤르한의 말에 마땅히 받아칠 것을 찾지 못하고 그레타가 이를 가는 사이, 리엘라가 도착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그런 리엘라를 향해 파비안과 헤르한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예쁘다, 리엘…….”
“리엘라. 이쪽으로.”
리엘라는 붉은 눈을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