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결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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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결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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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결혼할까
2022.02.06.
늘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호수궁 대사관의 아침.
평소와 달리 웬 사교 모임에서나 들릴 법한 웃음소리가 들리기에 이엘이 나와 보니, 대사관 로비에서 직원들이 한 시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나저나 로리엘 양, 시녀 생활은 어렵지 않으세요?”
“어려울 게 뭐가 있어요? 리엘라 님이 얼마나 잘해주시는데요.”
“다행이네요. 로리엘 양이 우리 대사님의 생활을 잘 살펴드리니 저희는 참 감사할 따름이에요.”
직원들 앞에 고상한 웃음을 짓던 시녀가 이엘과 눈이 마주친 건 그때였다.
시녀는 살짝 무릎을 굽혀 그들과 대화를 마무리하고는 이엘이 선 집무실 쪽으로 들어왔다.
“리엘라 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어제 확인하신 업무 서류를 보좌관님께 전하라고 하셔서요.”
“예.”
“또 오늘 보셔야 할 것도 가져다 달라고 하셨어요.”
“잠깐 기다리십시오.”
이엘은 자신의 책상에서 문서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업무에 관한 건 다 챙겼지만, 그 외에 리엘라가 읽을 만한 책도 몇 권 함께 보낼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매번 이렇게 일감을 따로 챙겨주기 번거롭지는 않으세요?”
이엘이 돌아보니, 시녀는 순수한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있었다.
“그렇잖아요. 호수궁 내실에서 복도 몇 개만 건너면 바로 집무실인데. 왜 리엘라 님은 여기로 출근하시질 않고 굳이 그곳에서 따로 업무를 보시는 걸까요?”
“대사님이 그곳이 편하신가 보죠.”
이엘은 일부러 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불편한 대화를 일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녀는 끈질겼다. 순진한 것인지, 눈치가 없는 것인지.
“글쎄요. 그런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요?”
“…….”
“보좌관님도 대사님이 출근하시길 바라시죠? 생각해보면 처음에 한동안은 두 분이 온종일 붙어 계실 정도로 사이가 좋으셨잖아요.”
“쓸데없는 참견이 많으십니다.”
“어머. 제가 무례했나요? 죄송해요. 두 분을 걱정한다는 게 그만.”
시녀는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이엘은 그 모습이 어딘가 낯이 익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이그드니스 백작가의 영애셨군요.”
마냥 여유롭게 웃던 시녀의 눈꼬리가 경련하듯 움찔한 건 그때였다.
“……저를 아세요?”
“백작 어른을 압니다. 아카데미 시절에. 그런데 그분의 여식께서 대사님의 시녀로 계시는 줄은 몰랐군요.”
“시녀가 뭐 어때서요. 아버지는 은퇴하셨고, 저는 제 나름대로 황실에 대한 우리 가문의 충성을 다 하는 것뿐인데요.”
시녀 로리엘은 어느새 싱긋거리는 웃음을 되찾고서 물었다.
“보좌관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폐하께 충성하는 것 말이에요.”
“예?”
“워낙 유명하시잖아요. 아카데미 수석 졸업 이후에 좋은 일자리를 많이 제안 받으신 것으로 알아요. 그런데도 전부 마다하고 결국 리엘라 님의 보좌관으로 오신 건 당연히 폐하의 부름에 충심으로 응답한 것인 줄 알았는데요?”
로리엘은 이엘이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웃으면서 제 말에 쐐기를 박았다. 또다시, 순진한 듯 눈치 없는 듯.
“그거 말곤 다른 이유가 없잖아요? 여기 대사관에 뭐 볼 게 있다고요. 해봐야 호수 하나랑 리엘라 님뿐인데. 설마 정말 그게 좋아서 계신 건 아닐 거고?”
꼭 허를 찌르는 것만 같은 말에 이엘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로리엘이 떠나고 난 뒤 이엘은 한동안 멍했다.
‘그러게. 내가 아직 여기서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뭔가.’
성녀를 찾아오라는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인가. 상관과는 말도 섞지 말고 잡무나 처리하라는 황제에게 순종하기 위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리엘라 블리니테, 그냥 그 여자를 계속 지켜보고 싶은 건가.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만 있었다. 이제는 어느 쪽이든 답을 내려야 했다.
*
그 무렵 본궁, 헤르한의 내실 안에선 오늘도 열띤 토론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물론 팽팽한 입장을 고수하는 양측은 아시온과 제스가 각각 일당백이었다.
“그냥 사실을 다 고백하고 납작 엎드리자고요. 리엘라 양은 다 이해해 줄 겁니다. 자기가 없으면 폐하가 죽는다는데 설마 떠나기라도 하겠어요? 의리가 있지.”
“아닙니다. 폐하. 사랑, 우정, 의리, 그딴 것에 매달리는 것보다 더 한심한 게 또 어디 있습니까? 제 말대로 리엘라 양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지금 바로 계약서를 쓰십시오.”
“계약서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그거보다 더 단단한 마음의 결속! 신뢰와 안정! 그게 핵심이라고.”
“핵심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딴 거 믿고 있다가 성녀 잃어버리면, 그땐 나도 진짜 폐하 못 고쳐. 정화에 면역이 생겨버리면 약도 잘 안 듣는다고!”
헤르한은 가운데서 머리가 터질 듯했다.
새벽부터 이어진 두 사람의 다툼 사이사이, 헤르한이 한 말은 ‘둘 다 입 다물어’ 내지는 ‘둘 다 나가’ 정도뿐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헤르한의 명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정말 괘씸한 부관들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제 하루 리엘라를 혼자 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여서 돌아버리겠는데.’
제스와 아시온에게 소리를 지를 힘도 없을 만큼 헤르한이 넋을 놓고 앉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도 헤르한의 머릿속엔 온통 ‘당장 리엘라를 보러 갈까’ 하는 것뿐이었다.
“폐하. 고작 열흘 동안 쉬었다고 온갖 헛소문이 돈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어제 국무회의 내내 그 말도 안 되는 회임설, 잠적설을 해명하느라고 고생하셨잖습니까? 또 같은 일을 반복하실 겁니까?”
그때 제스가 헤르한의 팔을 붙들고 간곡하게 매달리며 말했다.
제스의 말대로였다.
‘하긴. 참 웃겼지. 아직 결혼도 안 한 황제가 사생아부터 낳을 작정이냐며 다들 난리를…….’
“잠깐. 결혼?”
“네?”
“예?”
그때 난데없이 터져 나온 헤르한의 혼잣말에 제스와 아시온이 동시에 얼빠진 얼굴을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헤르한은 의자에 늘어져 있던 몸을 스르륵 일으키며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혼할까.”
아시온이 입을 쩍 벌렸다. 제스는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귀를 후볐다.
“그러고 보니 나 이제 결혼해도 되는 거잖아.”
헤르한의 머릿속에 아주 커다란 느낌표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폐, 폐하. 일단은 진정하고…….”
“맞습니다.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어려울 것도 없지. 대답해 봐. 너희가 말한 믿음과 결속, 공신력 있는 계약. 양쪽 다 동시에 충족하는 방법 아닌가?”
헤르한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리엘라를 황후로 앉히면 되겠어.”
아시온과 제스가 모두 벙쪄서 아무 대꾸도 못 하는 그때, 내실 문지기가 살짝 발을 들였다.
“폐하. 잠시 알현 요청이 있습니다.”
“리엘라인가!?”
“아, 아닙니다.”
혹시 모를 기대에 벌떡 일어섰던 헤르한은 곧장 흥미를 잃은 얼굴로 다시 돌아앉았다.
“그럼 내보내.”
“하, 하지만 서…….”
“됐어. 지금은 바쁘다.”
“……예. 알겠습니다.”
헤르한은 다시 테이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리엘라와 함께할 건설적인 미래를 적극적으로 구상해봐야 하니까.
*
“네? 정말요? 정말 또 거절당했다고요?”
호수궁 침실 안, 리엘라의 충격에 찬 외침이 울렸다.
리엘라는 가득 밀려드는 실망과 서운함에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했다. 루는 그 앞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어떻게……. 대체 왜…….”
“저도 잘 모르겠어요. 리엘라 님이 전하라고 하신 대로 폐하께 함께 식사하시자고 청을 드리려고 했는데…….”
“그런데?”
“폐하 얼굴은 뵙지도 못하고 또 문 앞에서 쫓겨났어요. 이유는 듣지 못했고요. 그냥 돌아가라고만…….”
리엘라의 잇새로 ‘어떡해’ 하는 울먹임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젯밤 한 번이야 무슨 사정이 있었겠거니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두 번 연속. 그것도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문 앞에서 내쫓기다니.
심지어 어젯밤에 무턱대고 찾아갔던 것이 실례였나 싶어서 이번엔 미리 루를 보낸 것이었다. 제대로 예를 갖추어 식사 선약을 잡으려던 것인데 그마저도 무시당하다니…….
“뭔가 바쁜 일정이 있으신가…….”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문지기에게 여쭤보니 폐하는 어제저녁부터 줄곧 내실에서 쉬고 계신다고 하셨어요.”
‘그럼 대체 뭔데. 나 정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거야? 그래서 폐하께 미움을 산 거야?’
고작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보지 못한 것뿐인데, 그 사실에 이렇게 초조해지는 자신이 리엘라는 이해되지 않았다.
현명하고 의젓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왠지 황제의 앞에선 그게 불가능했다.
저도 모르게 칭얼거리게 되고. 확인받고 싶어지고.
“안 되겠어요. 내가 직접 가볼래요.”
결국 리엘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엘라 님…….”
“또 뿌리치시려거든, 얼굴 뵙고 이유라도 들어야겠어요.”
리엘라는 본성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마주친 사람들의 인사에도 대꾸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내달렸다. 그렇게 급한 걸음으로 황궁을 가로지른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황제의 내실 앞.
어제와 달리 문지기는 리엘라를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헤르한이 리엘라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문을 연 것이었지만, 리엘라는 당연히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연달아 퇴짜를 맞고도 또 찾아온 자신이 오죽 불쌍해 보였으면, 생각할 뿐.
‘집무실에 계시는구나.’
리엘라는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을 뻗었다.
그 순간, 집무실 문틈으로 헤르한의 진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리엘라 얘기는 그만 하라니까? 더 듣고 싶지 않다.”
리엘라는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던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러곤 그 상태로 하얗게 질려서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루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 들었을 거라고 리엘라를 달래려는 순간.
“정말 지긋지긋해.”
집무실 안에서 헤르한이 다시 한번, 더 분명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루……. 들었……어요? 지금 폐하가……. 나더러 지긋지긋하다고…….”
“아, 아니에요. 리엘라 님. 그런 뜻이 아닐 거예요.”
“지긋지긋……. 내가 지긋지긋해서……. 폐하가 어제부터 날 피하셨던 게 그래서…….”
“리, 리엘라 님.”
루가 필사적으로 매달려보았지만 리엘라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리엘라는 그저 서서히 뒷걸음질 치면서 루의 팔을 뿌리쳤고, 그러다간 결국 몸을 홱 돌려 바깥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리, 리엘라 님! 리엘라 님!”
루의 외침에 집무실 안에 있던 헤르한이 곧바로 나왔다.
“루? 네가 왜 여기에 있지?”
“그게, 그러니까……!”
“뭐 하는 거야? 리엘라가 여기에 왔었나?”
루의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당장 리엘라를 쫓아가야 하는데 황제를 뿌리칠 수도 없고, 해명한다고 해도 대체 어디부터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