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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헤르한의 사정 (63/154)


  • #63 헤르한의 사정
    202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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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그냥 돌아가네요. 리엘라 양이 정말로 그냥 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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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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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깨가 축 늘어져 있어요. 많이 상심했나 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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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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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혹시 우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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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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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냥 머리카락 넘기는 거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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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구경났나. 저 자식이…….’

    헤르한은 괜히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꾹 주고서 아시온을 노려보았다.

    아시온은 제 뒤통수가 주군의 날 선 눈빛에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문가에 붙어 깐죽거렸다. 문틈으로 몰래, 멀어지는 리엘라의 모습을 지켜보고 또 그것을 헤르한에게 중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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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왜 그랬지?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란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냥 먼저 잠들었다고만 할 것을. 저 자식 농간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헤르한은 심란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끈지끈한 두통에 관자놀이도 세게 문질렀다.

    대체 어쩌다가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온 걸까.

    시작은 오늘 아침, 리엘라의 말 몇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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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직에 복귀하게 해주세요.’

     
    헤르한은 그때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리엘라 모르게 독선적으로 일을 처리했을 때부터 각오는 했던 일이었다. 리엘라의 미움을 사더라도 왕녀나 그 지긋지긋한 옛 남자로부터 리엘라를 떼어놓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막상 눈앞에 닥친 ‘리엘라의 미움을 사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버겁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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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원망해요.’

     
    리엘라가 저를 원망한다고 했다. 헤르한에게는 그것이 사형선고와도 같았다.

    조심성이 많아 싫은 소리는 잘 하지도 않는 리엘라가 그런 말을 했으면 그건 끝장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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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왕녀의 도움을 외면해서? 내가 파비안을 곤경에 빠트렸으니까?’

    물론 리엘라에게 파비안이 단순한 옛 연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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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궁부터 다녀올게요.’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자마자 그 사내를 보러 가겠다는 말을 할 만큼, 그렇게 그가 걱정되었나?

    역시 함께 자란 세월은 무시하지 못한다는 건가?

    아시온을 불러다 확인해보니 리엘라는 정말 서궁에 들렀다가 호수궁 대사관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헤르한의 귀에는 그 말이 ‘파비안을 보러 갔다가 이엘을 보러 갔다’라는 말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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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오늘은 리엘라를 만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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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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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틋한 옛 연인도 있고 충직한 보좌관도 있으니 리엘라는 충분히 바쁘고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겠지. 난 필요 없을 거다. 그러니 오늘은 보러 가지 않을 거야.”

     
    헤르한의 꿍한 선포에 아시온은 눈을 샐쭉 뜨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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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요? 리엘라 양을 안 보시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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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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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양이 폐하를 찾아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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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마지막 말은 사실 허세가 깃든 공수표였다. 어차피 리엘라가 자신을 찾아올 일은 없다고 헤르한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각, 정말 리엘라가 문 앞에서 헤르한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아시온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서 일부러 헤르한을 놀린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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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오. 어쩌지요. 리엘라 양이 너무 상처받은 것 같은데요? 지금이라도 붙잡으러 안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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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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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요? 혹시 저 아픈 마음을 달래고자 파비안을 만나러 가기라도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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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려면 그렇게 하라지.”

    왜 뚫린 입으로 마음과 정반대되는 말들만 튀어나오는 걸까?

    헤르한은 책상 위로 주먹을 꾹 쥐었다. 이 주먹으로 아시온을 치든, 스스로 제 뺨을 치든, 뭐라도 해야 정신이 들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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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좀 자만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튕기실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때 아시온이 일침을 놓았다.

    지금까지 신나게 이 유치한 감정을 부추겨놓고서는 이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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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는 본인의 처지를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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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처지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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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리엘라 양의 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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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 내가 종이라고?”

    태어나기를 황태자로 태어나 줄곧 누군가의 주군이기만 했던 헤르한은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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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잖습니까. 리엘라 양이 진짜 성녀라면 아쉬운 건 폐하 쪽이죠. 성녀는 능력자 없이 살아도, 능력자는 성녀 없인 못 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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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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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사실 이 얘기까지는 굳이 안 꺼내려고 했었는데 말입니다.”

    헤르한은 자신이 아시온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말을 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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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고 계신 거 아니죠? 능력자는 한 성녀에게만 각인되지만, 성녀는 여러 능력자를 동시에 정화할 수 있는 거.”

    헤르한의 입이 턱 벌어졌다.

    잊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유념한 적도 없는 사실이었다.

    멸종했다는 성녀를 만나리란 기대도 못 했었는데, 성녀를 대할 때의 원칙 따위를 따질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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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야 폐하가 리엘라 양을 운 좋게 독점하고 있지만. 만약 리엘라 양이 성녀라는 게 확실시되고 널리 알려지면 그때는……. 어쩌면…….”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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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양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는…….”

    쾅-!

    헤르한은 말없이 책상을 치고 일어났다.

    머리는 멍했고 가슴 속에선 천불이 일었다.

    ‘공유’라는 단어가 이렇게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던가? 그 말에 실체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찢고 베어서 불길 속에 쳐 넣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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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휴. 보자 보자 하니 정말 둘 다 웃겨서. 난리 칠 거 없습니다. 제가 깔끔한 해결 방법을 알려드리죠.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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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제스가 응접실로 나오며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질투심에 휩싸여 괜한 오기를 부리는 주군, 또 그런 주군을 신나게 놀려먹는 아시온이 한심하다면서 지금까지 내내 한발 물러나 있던 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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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합니다. 지금처럼 리엘라 양과 사이가 좋을 때 미리 계약서를 써 두시는 겁니다. 혹시 나중에 둘이 헤어져 각자 갈 길 가더라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성녀의 정화를 해주기로 한다든가,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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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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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요?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설마 리엘라 양이 평생 폐하만을 바라보면서 변심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십니까? 앞으로 오만 것들이 다 달려들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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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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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정 관계만큼 불확실한 게 어디 있습니까? 차라리 계약금을 왕창 주고라도 공식적으로 묶어두는 게……. 폐하. 제 말 들으세요. 계약서를 쓰시라니까요? 폐하!”

    헤르한은 제스고 아시온이고, 전부 싫었다.

    저런 놈들의 부추김에 마구 흔들리면서도 아직도 그 알량한 질투와 자존심 때문에 리엘라를 붙잡으러 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은 더 싫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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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리엘라 님. 폐하가 많이 피곤하셔서 그런 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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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본성에서 호수궁으로 돌아가는 길.

    불과 10분 전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는 내내 리엘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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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해요. 괜히 제가 본궁에 가자고 부추겨서…….”

    결국 루까지 울상이 되어버린 상황에, 평소라면 네 탓이 아니라며 루를 달래주었을 말도 리엘라는 하지 못했다.

    만나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라는 말. 그 말이 주는 충격과 슬픔이 너무나 컸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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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폐하께 밉보인 건가? 오늘 회의가 길었다던데, 혹시 내 소문 때문에 폐하의 입장이 곤란해지기라도 한 건가…….’

    헤르한의 마음을 믿고 넘어가면 되는데 괜히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헤르한이 소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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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보좌관님이시다.”

    루가 저 앞을 가리키며 외친 건 그때였다.

    야근을 마친 이엘이 막 호수궁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퇴근길엔 황제가 붙여둔 감시병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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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엘 경.”

    리엘라의 탄식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고 말았다.

    리엘라는 머쓱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아무리 접근 금지 명령이 있었다지만 그렇다고 뻔히 눈이 마주쳤는데 못 본 척할 수는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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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님. 이제 들어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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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이엘 경도 퇴근이 늦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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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늘 이 시간에 퇴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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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군요. 나 때문에 이엘 경이 고생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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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두 사람이 말을 주고받자, 이엘 옆에 선 병사가 예민한 눈빛으로 눈치를 주었다.

    그걸 눈치채고 병사의 앞을 가로막은 건 루였다. ‘우리 리엘라 님께서 보좌관과 대화 좀 나누시겠다는데, 뭐!’ 하면서, 양 옆구리에 손을 짚고 결연하게 나서는 것이었다.

    루가 그렇게 시간을 벌어준 덕택에 리엘라와 이엘은 몇 마디 농담이나마 더 주고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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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력 좋은 시녀를 두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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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풉. 내가 인복이 있는 편인가 봐요. 그러니 이엘 경도 만났죠.”

    작지만 무서운 것 없는 강아지처럼 으르릉거리는 루를 보면서 리엘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본궁에서 쫓겨난 일로 줄곧 속상했던 것이 조금이나마 잊히는 듯했다. 이엘과 얼굴을 마주하고 웃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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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를 만난 것이 대사님께 복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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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당연하죠. 이엘 경은 아니에요? 아. 하긴. 아닐 수도 있겠다. 나 때문에 괜히 폐하께 미움 사고, 일만 왕창 하고…….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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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엘이 머뭇거렸다.

    그 틈에 감시병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섰다. 그의 한 손엔 루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잡혀 있었다. ‘힝. 져버렸어요. 죄송해요.’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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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는 안 됩니다. 폐하께서 내린 접근 금지 명령을 어길 참입니까?”

    리엘라는 손사래를 치며 열심히 항복의 뜻을 표했다.

    이엘은 루를 데리고 호수궁 안으로 들어가는 리엘라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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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요. 뒷모습을 보는 것도 금지입니까?”

    감시병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리엘라를 향하는 이엘의 시선이 못마땅했던지 어서 움직이라고 그를 재촉했다.

    그렇게 달밤에 우연히 마주쳤던 남녀가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고 난 뒤.

    리엘라와 이엘이 마주 섰던 자리의 바로 옆, 담벼락 뒤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스윽 밖으로 나왔다.

    시녀 로리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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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지? 리엘라 님이 폐하께 거절당했다고? 그 와중에 이엘 보좌관과 만나고?’

    로리엘은 조금 뒤에 호수궁 내실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 리엘라는 어두운 얼굴로 테이블에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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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리엘라 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무슨 일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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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뇨. 별일 아니에요. 오늘 다시 일을 시작하신 것 때문에 조금 피곤하신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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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 그렇구나. 어떡해요?”

    루가 슬쩍 얼버무리는 말에 로리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 후엔 일부러 리엘라에게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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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님. 제가 피로 회복에 좋은 차를 좀 가져다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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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으응.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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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더 필요하신 건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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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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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무리하시지 마세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언제든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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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요. 고마워요. 로리엘.”

    리엘라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고, 로리엘은 영 걱정을 떨치지 못하겠다는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하지만 차를 준비한다며 밖으로 나온 로리엘의 입가는 어느새 절로 씰룩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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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께 퇴짜 맞은 티는 죽어도 내기 싫은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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