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재회2022.01.27.
그때만 해도 그레타는 자신이 어떤 얘기를 듣게 될지 몰랐다. 내심 리엘라가 일은 팽개치고 황제의 호의로 놀고먹으면서 황실의 위신을 깎아 먹고 있다는 부류의, 유쾌한 뒷담화를 기대했는데.
“지금 뭐라고 했어요……? 리엘라가 황제 폐하의 아이를 가졌다고요?”
“네. 소문이긴 하지만요. 폐하께서 리엘라 님을 무척 아끼시는 건 사실이에요. 최근 들어서는 대사관에 출근도 못 하게 하시고 침실 안에서만 리엘라 님을 감싸고 계셨거든요. 침대 밖으론 발도 함부로 뻗지 못하게 하셨으니, 그런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레타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리엘라가 황제의 아이를? 그 주제에 황손을 임신했다고?’
아무리 소문이라지만 만일에 하나라도 정말이라면 가만히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황제의 위세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한 리엘라가 더 날뛰게 될 테니까.
“……진짜라면 축하할 일이로군요.”
그레타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감추고 애써 이를 악물었다.
“글쎄요. 정말 그렇다면 기뻐할 일이지만…….”
‘그렇지만?’
“저는 걱정이 더 앞서네요. 리엘라 님은 아직 정식으로 폐하와 혼인하신 것도 아니고, 뒷받침될만한 배경도 딱히 없으신 분이라……. 회임하셨다 하더라도 과연 귀족 사회가 그 핏줄을 인정이나 해줄까요? 리엘라 님이 괜히 구설에 올라 상처만 더 입으실까 봐 참 속상해요.”
‘구설수를 퍼트리고 있는 건 너 같은데?’
시녀는 예쁘장한 눈꼬리를 한껏 늘어뜨리고 울적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레타는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가 치솟았다. 너는 대체 어디서 온 누구니?
“참 속이 깊은 분이로군요.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호수궁에서 리엘라 님을 모시고 있는 로리엘 이그드니스라고 합니다.”
‘리엘라의 시녀였어?’
“혹시 황실 공보관을 지냈던 이그드니스 백작가?”
“네.”
“기품이 남다르다 했더니, 역시 명문가의 영애셨군요.”
그레타가 눈을 반짝였다. 비로소 좀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역시, 그냥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와중에도 볕들 구멍 하나는 반드시 있는 것을 보면.
“그렇군요. 로리엘. 기억해둘게요. 앞으로도 다른 소식이 생기면 내게 전해주겠어요? 리엘라가 배경이 보잘것없다지만 내 나라 백성이니 결국은 내가 리엘라의 친정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예. 알겠습니다.”
“우리 리엘라 잘 부탁해요.”
“네.”
“혹시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얘기하고요. 리엘라 성격 알잖아요?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잘 얘기하지도 않고, ……좀 미련한 편인 거?”
그 말에 시녀가 두 눈을 고상하게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레타는 그 미소의 참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위선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이니까. *
“네? 내가요? 이, 임신요?”
“그냥 소문일 뿐이에요. 리엘라 님이 하도 침실 안에만 숨어 계시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리엘라의 뒷골을 타고 뜨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황당한 것을 넘어선, 차마 말로 못 할 부끄러움 같은 것이. 더 민망한 건 그게 백 퍼센트 사실무근이라고 항변할 수도 없다는 거였다. 심지어 자신에게 수갑이니 뭐니 낯부끄러운 팁까지 대령했던 루 앞에서는 더더욱.
‘폐하는 이 상황을 알고 계시는 건가?’
알아도 문제, 몰라도 문제라는 생각에 리엘라의 볼까지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루는 그 앞에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그것 말고도 소문이 한 다섯 종류는 더 있긴 해요. 리엘라 님이 무슨 중병에 걸려서 오늘내일하신다는 거랑, 일하는 게 싫어서 다 팽개치고 도망가셨다는 거랑, 또 보좌관님과 대판 싸워서 그렇다는 소문도 있고…….”
“뭐라고요? 그게 다 정말이에요?”
루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지만 리엘라는 이미 입을 턱 벌린 뒤였다. 그저 민망한 관심들만 떠도는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폐하 덕만 보면서 마음 편히 있었구나.’
황제와 함께 보내는 휴가가 마냥 기꺼운 마음에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 안 좋게 떠드는 말들도 억울한데, 그게 황제의 평판에까지 영향을 끼칠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더 불편했다.
‘일에서 손을 놓은 지 너무 오래됐지. 무책임하게 굴었으니 헛소문이 생길 만도 해.’
그래서 리엘라는 직원 하나를 불러 대사관의 업무 진행 상황을 물었다. 리엘라 모르게 일을 처리하라던 황제의 명도 닿지 않았을 정도로 말단이었던 직원은, 아무 생각 없이 리엘라 앞에 그간의 문건을 모두 대령했다. 리엘라는 그때야, 자신이 휴가를 보내는 사이 대사관 측과 왕녀 사이에 오갔던 서신을 모두 보았다. 황제가 잠깐 호수궁 침실에 들른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였다.
“폐하. 부탁이 있어요.”
헤르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앞에 쪼르르 달려드는 리엘라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부탁 같은 걸 하는 법이 없던 리엘라가 다짜고짜 청을 올리는 것도 마냥 귀엽기만 했다.
“뭔데? 원하는 건 다 가져다주지.”
“대사직에 복귀하게 해주세요.”
“……뭐?”
예상치 못한 청에 이맛살을 찌푸리는 헤르한의 시선이 이내 테이블 위의 문서들을 찾아냈다. 그 문서들의 정체를 알아챈 후, 헤르한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다 안 건가.”
낮은 목소리의 자백 앞에 리엘라의 심장도 덩달아 내려앉았다. 하지만 솔직히 대답했다.
“……네.”
파비안이 사경을 헤맬 만큼 아팠던 것이나 그 때문에 왕녀가 황실에 지원을 요청했던 것. 황실이 그 청을 거절했고 덕분에 일정에 차질을 빚던 왕녀가 엊그제 황실에 도착한 것.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황제가 자신 모르게 처리하고 있었던 것까지 전부. 리엘라는 이제 다 알았다.
“그래서 날 원망하나?”
“……조금 원망해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리엘라는 조금보다는 더 많이, 황제를 원망했다. 자신이 그리도 못 미더웠나 하는 마음에 서운해서였다. 자신을 가장 안전한 곳에서 보호하고자 하는 황제의 뜻은 알았지만, 그래서 더 속상했다.
‘이젠 나 혼자도 맞설 수 있다는 걸 폐하께 보여드리고 싶어.’
그래서 수락한 대사직이었고, 그래서 왕녀의 방문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리엘라는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씁쓸하게 돌아선 헤르한에게 다시 말했다.
“휴가는 충분한 것 같아요. 이제 대사직에 복귀하게 해주세요.”
헤르한이 숨을 들이켜는지, 그의 어깨가 한번 크게 부풀었다가 꺼져 들어갔다. 그는 등을 보인 채로 대답만 했다.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렇게 해.”
“서궁부터 다녀올게요.”
“그래. 그러든지.”
기분 탓인지, 헤르한의 목소리가 조금 차갑게 들렸다.
* 리엘라는 대사관에 들러 세심히 채비하고 왕녀가 있을 서궁으로 향했다. 서궁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한적하고 녹음이 우거진 정원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곳이 마냥 낯설고 두려웠던 ‘리엘라 블리니테’는 없었다. 리엘라는 이제 당당하게 로비를 가로질러 왕녀가 머물고 있다는 곳으로 가, 대사가 찾아왔음을 고하도록 했다.
“뭐? 누가 와?”
그레타는 신경질적으로 벌컥 나오다 말고 문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리엘라와 눈이 마주친 그레타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참 한결같은 왕녀의 모습에 리엘라의 숨이 턱 막혔다.
“왕녀 저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도 리엘라는 그레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을 살펴보니 내부가 엉망이었다.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나 봅니다.”
“리엘라!”
‘리엘라’라는 이름 앞에선 무작정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것까지도, 왕녀는 전과 같았다. 그레타는 리엘라의 손목을 잡아 거칠게 끌어당겼으나 리엘라는 그 손을 살며시 빼냈다.
“지금 누구 앞에서 주인 행세야? 누가 멋대로 들어와도 좋다고 했지? 왕족 앞에 섰으면 냅다 바닥에 엎드리지는 못할망정 괘씸한 건 여전……!”
리엘라는 개의치 않고 데리고 온 루를 불러 두 사람분의 차를 세팅하라 명했다. 그레타가 얼이 빠진 사이 루는 재빠르게 응접실 안으로 쏙 들어가 차와 다과를 차렸다.
“왕궁에 있을 때, 왕녀님께서 절 장미정원으로 불러주셨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제가 대접해드리려고요.”
“리엘라, 너…….”
“앉으세요. 왕녀님.”
리엘라는 자기가 먼저 그레타에게 자리를 권했다. 꼭 당신은 이곳에 잠시 들른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듯이.
“그때 왕녀님이 내어주셨던 차가 잊히질 않아요. 꽃 향이 나면서도 톡 쏘는 맛이 독특했거든요.”
“…….”
“아. 그땐 제가 독을 마셔서 그랬을까요?”
차를 한 모금 머금은 리엘라가 빙긋 웃었다. 그 여유 넘치는 웃음을 보면서 그레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리엘라가 차 한 잔을 다 비우도록 그레타는 제 찻잔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때쯤 열린 문으로 정복을 갖추어 입은 자들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리엘라가 불러온 대사관 직원들이었다.
“그레타 왕녀 저하. 이제야 뵙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왕녀 저하.”
“……!”
난데없는 이들의 등장에 그레타는 당황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리엘라가 몰고 온 손님들은 계속 들어섰다. 대사관 직원뿐만 아니라 상자를 든 시종이나 검을 찬 호위 기사도 있었다. 어쩔 줄 모르고 그들을 맞이하는 사이마다, 리엘라를 한 번씩 흘겨보는 그레타의 눈빛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치사하게 편을 잔뜩 끌고 왔다고 욕하실 건가요? 왕녀님께 배운 건데.’
리엘라는 그런 그레타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해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문득 왕녀와 왕녀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시달리던 때가 떠올랐다.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게 하찮은 존재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멸시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던 그 시절. 이제 정반대의 처지가 되어버린 지금에, 리엘라는 그때 당한 것을 똑같이 복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리엘라는 왕녀가 자신을 괴롭혔노라고 모두에게 이르는 대신 직원들 앞으로 나아가 왕녀를 향해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제가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왕녀님께 드릴 것도 있고 해서요. 그동안 제 보좌관에게만 일을 맡겨두고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불편한 건 없으셨나요?”
그레타는 등 뒤로 숨긴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제깟 게 언제부터 저렇게 지체 높고 고상했다고.
“그딴 건 없……!”
그레타는 죽일 듯이 리엘라를 노려보며 답하다가, 새삼 리엘라의 뒤에 늘어선 이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재빨리 말을 고쳤다.
“……어, 없었어요. 대사.”
“저희가 준비한 거처는 마음에 드시고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리엘라가 은은하게 미소 짓자, 그걸 따라 대사관 직원들과 시종들도 해맑게 웃었다. 서궁의 분위기는 언뜻 보기에 아주 화기애애해 보였다. 똥 씹은 표정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인 건 오로지 그레타뿐이었다.
“왕녀 저하의 방문을 환영하는 의미에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저희 대사관 측에서 준비한 것들이에요.”
그레타는 제 앞에 차곡차곡 놓이는 선물들을 노려보았다. 리엘라가 인심 좋게 베푸는 호의가 번쩍거리며 쌓여갈수록 그레타의 굴욕감도 함께 쌓여갔다. 그레타는 몇 번이고 그냥 테이블을 엎어버릴까 고민하다가, 다른 식으로 리엘라에게 반격하기로 마음먹었다.
“환영 선물은 고맙긴 한데요. 그리 섬세하진 못한 행동 아닌가요? 대사.”
역시나 그레타의 말은 단번에 실내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 약혼자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나요? 그런데 이런 호화스러운 선물이 다 무슨 소용이죠? 내가 지금 해맑게 선물 포장이나 뜯을 기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레타가 처연하고도 불쾌한 얼굴을 내보였다. 하지만 리엘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왕녀가 파비안 얘기를 꺼낼 거라는 걸 예상했으니까. 정확히는, 그녀가 가진 무기가 파비안을 들먹이는 것 외엔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리엘라가 동요하긴커녕 담담하게 사과하자 그레타는 주춤하면서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었다.
“그, 그래요. 생각이 짧…….”
“그러면 선물은 모두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뭐요? 아, 아니…….”
그레타는 난감해하면서도 뭐라 받아치지 못했다.
“헉. 대사님. 이 보석 세트도 도로 가져가나요? 부르도산 가넷으로 맞춤 세공한 건데……. 시일 안에 받아보느라고 고생했잖아요.”
‘부르도산 가넷?’
그때 직원 중 한 명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속삭이는 말에 그레타는 더 크게 동요했다. 부르도는 엘슈바이크 제국이 독점하고 있는 대륙 북방의 광산으로, 왕국에선 구경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품질의 보석을 생산해내는 곳이었다.
‘그거면 파비안의 약을 몇 달치는 살 수 있는데…….’
그레타는 뒤늦게 후회했다. 이제라도 그냥 선물을 받겠다고 말해볼까도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엘라 앞에서 비굴하게 굴 수는 없었다. 리엘라는 그런 그레타가 들으란 듯이 더 엄중한 목소리로 직원을 꾸짖었다.
“왕녀님께서 굳이 거절하시는데 더 실례를 범할 참이에요? 어서 가지고 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