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 폐하는 제게 꽉 잡혔어요 (56/154)


  • #56 폐하는 제게 꽉 잡혔어요
    202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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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보좌관직을 박탈하신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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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모르게 황제의 팔을 붙잡은 리엘라는 그의 몸이 평소보다 더 경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또, 황제의 명에 깜짝 놀란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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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다들…….’

    제스나 아시온은 그렇다 쳐도 이엘조차 ‘부당하다’ 또는 ‘억울하다’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그저 올 것이 왔다는 듯이 자약하게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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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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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이엘이 물러나기 직전, 그의 눈빛이 잠깐 리엘라를 스쳤다. 리엘라는 차마 그를 붙잡거나 위로하지도 못하고 그의 시선을 안타깝게 응수했다.

    머리카락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이엘의 검은 눈동자는 참 짙었다. 리엘라는 그 안에 담긴 복잡한 의미를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다.

    이엘은 그렇게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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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궁 침실이 언제부터 아무나 벌컥벌컥 드나드는 시장통이 됐지?”

    이엘이 물러난 뒤로도 헤르한의 화는 가라앉질 않았다. 사실 이엘은 ‘아무나’가 아닌 리엘라의 보좌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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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온. 호수궁 정문과 침실 앞에 24시간 상주하는 경비병을 붙이도록 해. 그리고 미리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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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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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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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넷!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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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한시도 리엘라의 곁을 비우지 마라. 혼자가 힘들다면 다른 시녀들의 손을 빌려도 괜찮다.”

    루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헤르한의 명령이 계속 이어졌다. 전부 리엘라의 호위와 관련한 것이었다.

    리엘라는 그런 헤르한을 물끄러미 보았다. 평소보다 말이 빠르고, 언성도 높고, 흥분과 혼란을 좀처럼 잠재우지 못하고 헤매는 헤르한을.

    너무 절박해서 어쩐지 측은하기까지 한 그 모습을 본 순간, 리엘라는 이엘이 해고당한 것을 수습하는 것이 당장 우선순위가 아님을 알았다.

    중요한 것은 헤르한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리엘라는 조용히 손을 뻗어 헤르한의 허리를 꼬옥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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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

    불쑥 뒤에서 튀어나와 제 허리를 감는 손에 헤르한은 크게 들숨을 머금은 채로 말을 멈추었다.리엘라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뻣뻣한 몸을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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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진정하세요. 저 여기에 있어요. 어디 도망도 안 가고요. 누구한테 잡혀가지도 않았어요. 폐하 옆에 이렇게 무사히 잘 있잖아요.”

    크게 부풀었던 헤르한의 가슴이 긴 호흡을 내뱉으며 가라앉았다.

    헤르한은 눈을 질끈 감고서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리엘라의 말이 맞았다. 리엘라는 이렇게 제 옆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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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폐하를 괴롭혔나요? 누가 이상한 말을 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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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헤르한은 몸을 돌려 리엘라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여린 어깨에 이마를 파묻으니 자신을 태우던 열이 서서히 가라앉는 듯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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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의 내실에서 쫓겨난 뒤, 이엘은 문밖에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안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안쪽의 기척만큼은 아직도 느낄 수 있었다.

    리엘라의 걱정과 놀람이, 또 그런 리엘라를 조금도 내어줄 수 없다는 듯이 날뛰던 황제의 광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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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로 대사님이…….’

    이엘은 천천히 자기 목덜미의 은줄을 끄집어냈다.

    마석은 불로 달군 것처럼 뜨거운 열을 내며 다시 붉어져 있었다.

    그 안을 심란하게 들여다보던 이엘의 눈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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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지?’

    자세히 보니 마석은 그저 붉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불꽃 같은 붉은빛의 테두리를 아주 짙푸른 기운이 감싸고 있는 것이었다. 꼭 불길을 한입에 삼켜버리려는 것처럼 푸른 혓바닥을 일렁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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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설마 지금 저 안에 엔릴과 안투의 후손이 모두…….’

    이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악하며 다시 뒤를 돌았지만 문은 아직 굳게 닫혀 있었다.

    사실 그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해도 그 후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

    헤르한이 침착함을 되찾은 뒤 모두는 숨을 고르고 자리에 앉았다.

    다들 이렇게 급하게 뛰어왔을 정도면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정작 리엘라를 향해 쏟아진 질문은 조금 엉뚱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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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요? 글쎄요……. 전혀 떠오르는 게 없어요. 용병단을 만나기 전의 기억은 하나도 없어서요.”

    왜 이런 것을 묻지? 리엘라는 대답을 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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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병단을 만난 건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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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6살 때요. 왕국 북부의 어딘가라고 했어요. 역병이 크게 돌아서 사람이 전부 떠난 마을에 제가 혼자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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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 그 떠돌이 용병이 거둔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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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파비안이 건물 잔해에 갇혀 있는 절 발견하고 구했대요. 행크 아저씨는 절 버리고 가려고 했었는데 파비안이…….”

    리엘라는 저도 모르게 옛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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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차. 괜히 또 파비안 얘길.’

    리엘라는 자신의 무신경한 말이 또 헤르한의 심기를 해치면 어쩌나 걱정했다. 이엘의 방문도 민감하게 받아들인 그였으니까.

    그런데 진작 눈을 세모꼴로 떴어야 할 헤르한은 웬일로 조용했다.

    아까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깊은 상념에 빠진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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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아픈 적은 없었습니까? 폐하와 있을 때 기절한 것과 비슷한 경험도 없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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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 네. 제가 알기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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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혹시…….”

    제스의 질문이 계속 이어져서 리엘라는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서 시선을 거두어야 했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굳어 있는 제스와 아시온을 번갈아 보다가, 리엘라는 문득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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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제가 무슨 큰 병이라도 걸린 건가요? 유전병 같은 거?”

    줄곧 질문을 쏟아대던 제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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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리엘라의 손을 힘주어 꾹 잡으며 대답한 건 헤르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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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건 아니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 네가 걱정해야 할 일은 없어. 내가 다 지킬 것이다. 넌 내 옆에만 있으면 돼.”

    헤르한의 눈빛은 결연했다. 그래서 리엘라는 더 혼란스러웠다.

    걱정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 당신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려고 그렇게 독한 다짐을 하시는지.

    *

    리엘라로부터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황제의 집무실로 돌아온 후.

    모두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가장 먼저 운을 뗀 건 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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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황은 그럴 듯한데 여전히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살아 있는 성녀가 있다니 이게 워낙……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요. 확실하게 ‘판별’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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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녀 판별은 신전의 업무잖아?”

    ‘신전’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내내 초점 없이 멍하던 헤르한의 눈이 칼날 같은 기운을 번뜩이며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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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로 신전 측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설명이 없이도 아시온과 제스가 철석같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엔릴과 안투의 후손들을 독점했던 ‘세계연맹’이 몰락한 뒤로, 남은 뒤치다꺼리를 모두 도맡아 해온 신전이었다.

    전쟁 이후 성녀들은 모두 멸종했다지만 능력자들은 아직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그 골칫덩이들을 관리해주어야 하면서도 중립을 지켜야만 하는 신전은 당연히 사라진 성녀를 늘 아쉬워했다.

    그런 그들이 명맥이 끊긴 줄 알았던 성녀가 돌아왔단 사실을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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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불을 켜고 리엘라를 빼앗으려 들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헤르한의 뒷골이 더 당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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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그래도요. 어쨌든 진짜라면 정말 잘된 일 아닙니까? 그냥 잘됐다고 할 정도가 아니라요. 뭐라고 할까. 이건……. 기적 같은 일인데요.”

    아시온의 음성은 미약한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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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이라면 폐하는 살아남은 엔릴의 후손들 중 유일하게 성녀의 정화를 받는 분이 되시는 겁니다! 앞으로 평생 폭주나 발작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억제제 없이도 사실 수 있어요. 이리에 황자님도 다시 황궁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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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 설레발 치지 말라니까?”

    제스는 아시온에게 픽 신경질을 내면서 내심 마찬가지로 가슴이 떨리는 것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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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암시장의 약쟁이들 쪽에서 정보를 캐보는 건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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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듣고 계십니까? 폐하?”

    하지만 제스의 묘안도, 아시온의 호들갑도 바쁜 헤르한의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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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리엘라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헤르한의 정신을 가득 메운 생각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자기 품 안에 고이고이 감추어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리엘라를, 앞으로는 온 세상천지가 음흉하게 달려들어 탐내게 될 거라는 생각. 걱정. 불안.

    미칠 지경이었다.

    리엘라를 잃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에, 헤르한은 ‘돌아온 성녀’가 자신에게 있어 어떤 벅찬 의미인지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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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나 어디 아파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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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전혀요? 눈도 초롱초롱하시고, 뺨은 장밋빛으로 예쁘기만 한걸요. 아름다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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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폐하가 왜 그러셨을까…….”

    리엘라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듣고서야 루는 그녀가 아직도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루는 리엘라 옆에 앉아 같이 고민하다가 순간 손뼉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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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생각에는 질투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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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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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폐하께서 무시무시하게 이엘 보좌관님을 내치신 것도 그렇고요! 옛날 일을 물으신 것도 리엘라 님의 옛 남자친구 얘기가 신경 쓰이고 궁금해서 그러셨던 게 아닐까요?”

    리엘라는 확신에 찬 루의 말을 경청하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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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 폐하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실 분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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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고 할 수 있나?’

    새삼스럽게 지난 일들을 반추해보니 확실히 그러긴 했다.

    간간이 파비안 얘기가 나올 때마다 황제의 반응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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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엘 경이 내 병간호를 해주었을 때도 그의 손을 자르니 마니 하셨었지…….’

    그쯤 되니 리엘라의 마음이 또 다른 의미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냥 설렌다고 황제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엘에 대한 오해도 풀어주어야 하고, 자신의 진심이 계속 오해받는 것도 싫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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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께서 마음을 놓으시도록 좀 더 확신을 드리는 게 어떨까요?”

    대책을 제안한 건 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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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연인끼리 자기 마음을 전하는 그런 이벤트들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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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 연인이라니요.”

    리엘라는 ‘연인’이라는 낯부끄러운 말에 새삼스레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이벤트’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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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다발? 아니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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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 너무 진부하잖아요! 아, 잠깐. 리엘라 님! 방금 제 머릿속에 딱 떠오른 게 하나 있어요. 기다려보세요. 제가 얼마 전에 본 로맨스 소설에서 나온 건데요.”

    그럴듯한 묘책이 떠올랐는지 루는 쏜살같이 바깥으로 튀어 나가더니 몇 분이 되지 않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대체 저런 것은 어디서 구했나, 싶은 물건을 하나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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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루가 야무지게 건네는 것을 얼결에 쥐고서, 리엘라는 넋이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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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 열여섯 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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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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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대체 무슨 소설을 읽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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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헷.”

     

    *

    사방이 어둑해질 무렵, 호수궁 침실로 돌아온 헤르한은 아주 많이 지쳐 있었다.

    종일 제스와 아시온이 리엘라를 판별할 여러 방안을 꺼내 들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귀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헤르한은 그저 피로했고, 걱정이 짙었고, 그래서 리엘라가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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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그런데 방 안은 어둡기만 했다.

    헤르한은 단번에 심장이 내려앉아 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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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어디 있……!”

    그때 옆에서 스윽 인기척이 다가왔다.

    어스름한 형체만으로도, 또 달콤한 체취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나의 여자. 나의 보물.

    헤르한은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듯이 곧바로 리엘라를 끌어안고서 그녀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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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어진 줄 알고 놀랐잖아. 리엘라. 앞으로 이런 장난은 절대…….”

     
    ‘철컥.’

    그때 쇳소리가 헤르한의 말허리를 끊었다.

    자신의 손목을 감는 차가운 느낌에, 헤르한은 리엘라를 놓고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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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뭐 하는 거지?”

    그제야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리엘라의 차림이 심상치 않았다. 몸의 굴곡이 다 드러나는 얇은 드레스 한 장.

    그런 리엘라가 자신의 왼쪽 손목을 들어 보였다.

    헤르한의 한쪽 손목에 채워진 것과 같은 은빛 수갑의 나머지 한쪽이 리엘라의 손목을 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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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무슨……?”

    헤르한이 얼떨떨한 눈으로 대꾸하기가 무섭게 리엘라는 큰 들숨을 머금었다가 필사의 외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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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 폐하는 이제 제게 꽉 잡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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