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후손들
(54/154)
54 후손들
(54/154)
#54 후손들
2022.01.02.
그레타는 파비안의 곱슬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인정해. 네 곁을 지키는 건 나뿐이라는 걸. 너는 날 떠나서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고.”
“왕녀님…….”
“네가 날 선택한 이유를 잊지 마.”
파비안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슬픔으로 일렁이는 녹안이 몹시도 애처로워 보였지만, 그레타는 거기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해? 리엘라가 널 떠난 건 사실인데. 그 바보 같은 여자 옆에만 있었다면 넌 진작 죽었을 거야. 널 살려낸 건 나야.’
그레타는 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그리곤 그 병을 열어 안에 든 물약을 입안에 가득 머금은 후, 그대로 고개 숙여 파비안에게 입을 맞추었다. 파비안은 제 턱을 쓰다듬는 그레타의 손짓에 따라 순종적으로 목 넘김을 했다.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 사이로 푸른 액체가 한 방울 길게 흘러내렸다.
그레타가 내어주는 대로 꼴깍꼴깍 약을 다 받아먹은 파비안의 눈은 조금 전과 비교될 정도로 초점이 더 흐려져 있었다.
“아. 마약 성분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다니까. 좀 독해도 어쩌겠어? 남들은 이것도 못 구해 난리야!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지나가시든지!”
“알겠어. 있는 대로 다 살 테니 그 약을 내놓기나 해.”
“큭큭. 그쪽도 사정 참 급한가 봐. 그런데 그쪽 능력자는 나이가 몇이라고?”
“스물넷.”
“엥? 열 넷이 아니라 스물넷이었어? 그 나이까지 어떻게 안 죽고 버텼대? 스물이 넘는 놈은 여태껏 본 적이 없는데.”
“말이 많네. 그래서 팔 거야, 말 거야?”
“두 배.”
“뭐라고?”
“몸체가 큰 놈이니 값도 두 배를 받아야겠어. 싫으면 말고? 이런 허접한 약이라도 살 사람들은 줄을 섰으니.”
불법 약을 거래하는 이들이 다 그렇지만, 이번에 만난 판매자는 그중에서도 순 악질이었다. 심지어 이번 약은 이전에 구했던 것보다 효능도 떨어지고 더 독했다. 그래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밀거래하는 처지에 왕녀의 신분을 드러낼 수도 없고, 그 약이 아니면 당장 파비안이 죽게 생겼으니까.
‘그마저도 이젠 마지막 약…….’
그레타는 주머니 속에서 빈 약병을 꼭 쥐었다.
그새 약 기운이 더 돌았는지 파비안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리엘라…….”
의식이 흐릿한 가운데도 파비안이 중얼거리는 건 리엘라의 이름이었다.
그레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죽는다고 해도 리엘라는 오지 않는다니까. 그걸 똑똑히 보여줬는데도 아직도 그 여자를 찾다니.
그레타는 분노를 꾹 삼키면서 파비안의 볼을 어루만졌다.
“제국 황성 근처에 가면 약을 구할 만한 곳이 있대. 훨씬 효과가 좋은 약 말이야. 그러니까 버텨, 파비안.”
파비안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레타는 그걸 못 본 척하고 계속 그를 세뇌했다.
“버텨. 내가 널 어떻게든 살릴 테니까. 버텨서, 멍청하게 널 놓친 리엘라에게 복수해. 또 황제 앞에서 보란 듯이 우리 왕국을 일으켜 세워줘. 알겠어?”
***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헤르한은 자기 자신을 리엘라와 호수궁 침실 안에 가두기로 한 것이 참 야심차고 대단한 계획인 줄 알았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얕잡아 보았다는 점을 뒤늦게 통감했다.
“리엘라 양의 피로도가 완전히 다 낮아지기 전까지는 다시 안으시면 안 됩니다. 안 그랬다간 이번엔 단순한 기절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스의 경고였다.
알겠다고, 리엘라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설마 자기가 그깟 욕정쯤을 못 참겠느냐고 일축하고 당당하게 침실로 들어와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것이었는데.
‘……미치겠네.’
막상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도 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리엘라를 눈앞에 두고 보니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폐하! 폐하 차례예요.”
“아. 그래…….”
“어라? 폐하가 비숍을 거기에 두신다면……. 와! 어때요? 이번에도 제가 이겼어요!”
반면 리엘라는 헤르한의 불타는 심정은 꿈에도 모른 채 체스 삼매경이었다.
어릴 적, 할 수 있는 놀이라곤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써서 하던 빙고 게임뿐이었던 리엘라에게 비싼 말과 판이 필요한 체스는 꿈도 꾸지 못할 호사였다.
그런데 그런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헤르한과 둘이서 질리도록 할 수 있다니.
“너무 즐거워요!”
“그래? 넌 이게 즐거워?”
“네! 폐하는 재미없으세요?”
“아니……. 그래. 나도 재미있다. 네가 즐거우면 나도 재미있는 거지. 그렇지…….”
리엘라는 활짝 웃다 말고 어딘가 지쳐 보이는 헤르한의 안색을 살폈다.
자신에게 계속 져서 기분이 상했나? 아니면 다른 중요한 일이 있으신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헤르한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아무리 휴가를 선언했다지만 황제라는 자리가 그렇게 녹록한 자리는 아닐 텐데.
“폐하.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나 봐요.”
“뭐?”
“무리하고 계시는 거죠? 바쁘신데 억지로 시간을 내서 절 보살펴주시는 거잖아요. 폐하는 저랑 한가롭게 체스나 두실 분이 아니신데. 죄송해요. 제가 마냥 폐하랑 노는 게 좋아서…….”
“……뭐, 무리하고 있는 건 맞는데.”
무리는 다른 식으로 하고 있는데.
헤르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엘라는 줄곧 보석처럼 소중하게 다루던 체스 말들을 우르르 쏟아서 통 안에 담아버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침대 위로 가서 곱게 누운 채 이불을 덮는 것이었다.
“자자고?”
“네! 아, 아니요!”
리엘라는 씩씩하게 말했다가 곧장 얼굴을 붉히며 말을 고쳤다.
“혼자서도 잘 잘 수 있어요. 그러니까 폐하는 제 걱정 그만하시고 이만 가보셔도 돼요.”
헤르한은 리엘라에게서 축객령을 들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앙큼한 건지. 순진한 건지. 남의 속도 모르고.’
자신을 애태우는 리엘라가 얄미운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리엘라의 말처럼 이렇게 리엘라와 단둘이서 오롯이 보내는 시간은 거의 처음인데, 그 소중함도 모르고 너무 음흉한 생각만 하며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던 건 아닌지, 하고.
“안 가. 여기 있을 거다.”
“하지만 바쁘…….”
“바쁘지 않아. 아무리 바쁘더라도 너 잠들 때까지 동화책은 읽어줘야지.”
헤르한은 그렇게 말하며 리엘라의 옆에 상체를 비스듬히 숙여 누웠다.
“그러면……. 이 책, 읽어주실래요?”
“뭐야. 정말 책을 읽어달라고?”
“폐하 목소리가 좋아요. 폐하께서 읽어주시면 좋겠어요.”
잠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주겠다는 건 일종의 은유였는데.
“넌 이게 무슨 책인지나 알고 읽어달라는 건가?”
“그냥 요즘 취미로 읽고 있는 책인데요……. 혹시 보면 안 되는 책인가요? 금서 같은 거예요?”
‘엔릴과 안투 신화 연구’.
하도 낡아서 칠이 다 벗겨진 제목을 찬찬히 훑어 내리는 헤르한의 눈빛이 참 아득하고도 서늘했다.
그 눈빛을 보고 리엘라는 책을 다시 치우려 했다. 금서까지는 아니더라도 헤르한의 기분을 망치는 책임은 틀림없어 보였으니까.
“이건 내 저주받은 핏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헤르한은 리엘라에게 책을 도로 내주기는커녕, 뭔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어려운 얘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건 네가 아는 것처럼 동화나 그저 그런 전설 같은 게 아니야. 엔릴은 실존했던 고대의 인물이다.”
“네? 엔릴이 실존했다고요?”
“그래. 엔릴은 탐욕스러워서 감히 신들의 능력을 넘보았다고 하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많은 죄악을 저질렀고, 그 결과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었지만 죽음에 가까운 형벌을 받았어.”
헤르한의 목소리는 분명 나긋나긋했으나 리엘라가 기대했던 것처럼 달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몹시 쓰고도, 괴로웠다.
“엔릴을 향한 신들의 저주는 그의 아들의 아들들에게도 이어졌지. 엔릴의 후손들은 저마다 어떤 특별한 힘을 가졌지만 대부분 그 힘을 다스리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죽었고.”
“그럼 설마 폐하의 능력이……. 폐하의 저주란 게…….”
“그래. 먼 옛날 나의 조상이 저지른 죄의 업보랄까.”
“폐하가 바로 엔릴의 후손이었던 거군요.”
리엘라는 자조적으로 웃는 헤르한의 손을 꼬옥 쥐었다.
자신에겐 그저 동화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은 이런 거대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였다니. 그리고 다름 아닌 헤르한이, 그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다니.
“아주 오랜 이야기야. 사람들에게서 다 잊혔을 만큼. 하지만 이 세상엔 아직 나 말고도 나 같은 자들이 더 있다. 리엘라. 네 말대로, ‘하늘도 날고 불도 뿜는’ 또 다른 엔리가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겠지.”
“꿈에도 몰랐어요. 그 엔리가 정말 존재하는 것이었을 줄은……. 그런데 왜 다들 숨어 살죠?”
“그건…….”
글쎄. 그걸 설명하려면 전쟁사까지 훑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이 밤이 부족하지 않을까.
헤르한이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리엘라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또 몹쓸 학구열이 발동한 모양이군.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투는요? 안투도 실존했어요?”
“안투는 엔릴의 연인이었어. 탐욕에 폭주하는 엔릴을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헤르한은 거기서 일순 멍해진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이야기에 심취한 리엘라는 헤르한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온갖 질문을 퍼부으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면 안투의 후손들도 아직까지 살아 있나요?”
리엘라가 그것까지 물었을 때, 헤르한은 아득해졌던 초점을 되찾고 대답했다.
“아니. 안투의 후손은 멸종했어.”
“네? 엔릴의 후손은 살아 있는데, 어째서……. 안투는 어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리엘라.”
헤르한은 리엘라를 감싸 안아버리며 더 이상의 말을 일축했다.
*
헤르한은 곤히 잠든 리엘라가 아직 깨지 않은 틈을 타서 제스의 연구실로 향했다.
아직 하늘이 어두운 새벽인데도 제스의 연구실은 환했다. 그 안에서 머리를 맞대고 주군의 상태에 대해 고민하는 제스와 아시온 앞에, 헤르한은 다소 뜬금없고 황당한 말을 꺼냈다.
“만약 살아 있는 안투의 후손이 있다면 어떨까?”
“예? 안투의 후손이요? 성녀 말씀이세요? 오밤중에 찾아오시더니, 난데없이 무슨…….”
아시온이 어이없이 웃는 동안 제스는 머릿속으로 많은 것들을 빠르게 계산하고 짜 맞추기 시작했다.
“내 몸이 나은 이유가 성녀의 정화를 받았기 때문이라면?”
“에이. 어떻게 정화를 받아요? 정화를 해줄 사람이 없는데.”
아시온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는 사이 제스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자신의 책장 어딘가를 미친 듯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의 안색이 창백했고 손끝은 덜덜 떨렸다.
“저거 갑자기 왜 저래. 밤새더니 미쳤나 봅니다.”
제스를 바라보며 이맛살을 찌푸리는 아시온 앞에 헤르한은 이 어이없는 가설의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만약, 리엘라가 성녀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