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은밀한 요양 (53/154)


  • #53 은밀한 요양
    2021.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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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너희. 여태 기다리고 있었나?”

    헤르한은 제스와 아시온을 향해 심드렁한 눈길을 던졌다. 마치 두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는 동안 루가 후다닥 움직였다. 날쌔게 밖으로 나갔던 루가 다시 날쌔게 안으로 들어와 황제에게 건넨 것은 한 컵 가득 받아온 물과 빨대였다.

    헤르한은 컵 안에 빨대를 꽂아 리엘라의 입에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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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지.”

    꼴깍꼴깍. 시키는 대로 착실히 물을 마시는 리엘라를 보며 헤르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시온은 그제야 침실 문이 열린 것이 한 시간 가까이 밖에서 기다린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리엘라에게 먹일 물 한 모금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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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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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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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가 목말라 하는 것 같아서 물을 먹이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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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그것도 보입니다.”

    제스는 큰 의미 없는 황제의 말이 사실은 ‘알았으면 나가’라는 뜻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리엘라가 깨어난 것보다, 또 황제가 그런 리엘라를 새끼 품듯 품고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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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의 검진 결과가 나왔습니다.”

    물 한 컵을 다 비운 리엘라의 뒤통수를 기특하게 쓸어내리던 헤르한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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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데?”

    결과를 묻는 헤르한의 목소리에 아주 미약한 긴장이 묻어났다.

    아무리 연애에 정신이 팔린 주군이라도 자신이 죽고 사는 이야기는 듣고 싶은 모양이네, 하며 제스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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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말씀드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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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제스는 리엘라를 한번 흘긋거리던 시선을 거두고선 ‘그 결과’를 헤르한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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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암살만 안 당하시면 백발이 되실 때까지 사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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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도 수치가 현격히 낮아졌고 지금껏 몸에 축적되었던 내상도 전부 회복되었습니다. 상흔도 전혀 남은 것이 없어서 현재로서는 거의 완치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영문을 알 수도 없고 믿기지도 않는 결과였지만, 헤르한은 어째선지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제 저주에 ‘완치’ 같은 게 있을 수 없다는 건 뻔히 알고 있는데도 요 며칠 헤르한의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자라고 있었다.

    절대 자신이 이대로 죽을 리 없다는, 참 근본 없는 자신감 같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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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건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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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빨대를 입에 물고 내내 보글보글 소리를 내던 리엘라가 몽롱한 눈을 들어 보이며 입을 연 건 바로 그때였다.

    제스는 자신이 들은 것을 의심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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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여자, 지금 저한테 반말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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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해라. 제스. 아직 리엘라가 제정신을 다 차리지 못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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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나…….”

    제스는 기가 차서 한숨을 푹 쉬다가 못 이기는 척 리엘라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김에 리엘라의 상태를 봐주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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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양도 확실히 어제보단 피로도가 떨어졌군요.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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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나도 건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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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한테 한 말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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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제스한테 한 말.”

    제스는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

    리엘라의 초점이 나른하게 풀려 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자신에게 일부러 싸움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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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그러면 안 되지.”

    그때 두 사람의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관전하던 헤르한이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스는 드디어 주군이 제 편을 조금 들어주나 했는데, 헤르한은 다정히 리엘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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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말은 나에게만 해야지. 아무한테나 그런 귀여운 모습 보여주면 안 돼.”

    제스는 졸지에 ‘아무나’가 되었다.

    *

    제스가 가져온 피로 회복제를 한 통 다 마신 리엘라는 다시 잠들었다.

    리엘라를 루에게 맡겨두고 헤르한과 제스, 아시온은 침실 바깥쪽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제스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 수도 없이 재검했던 검사 결과를 주르륵 늘어놓고 진지한 논의가 이어진 것이었다.

    논의의 주제는 ‘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만 있을 뿐, 답을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그들 모두는 침묵 속에 입을 닫아야만 했다.

    정복을 단정하게 갖추어 입은 이엘이 황제를 찾아와 알현을 요청한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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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업무상 용건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이엘은 헤르한의 뒤에 보이는 문 안쪽에 리엘라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쪽으로는 눈길도 하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다.

    헤르한은 어젯밤 그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이 잘 먹혀들어 갔다고 생각해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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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은 네 선에서 다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을 텐데. 리엘라는 아직 휴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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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 드릴 보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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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할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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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리오타 왕국의 왕녀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헤르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시온과 제스도 함께 질린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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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디 이틀 뒤 왕녀께서 도착하실 예정이었으나 급한 사정으로 일정이 늦어지고 있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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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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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행하시는 약혼자분의 건강이 몹시 악화하여 기동이 힘들다고 합니다.”

    그 말에 헤르한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왕녀의 약혼자라면 바로 그 사내였다. 리엘라의 옛 연인. 감히 황제인 자신의 멱살을 쥐고 리엘라를 놓아달라느니 허튼소리를 했던, ‘파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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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를 아프게 만들더니 그 벌을 받는 모양이군.’

    헤르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영 마음이 좋지 않았다.

    리엘라는 옛 연인에 대한 미련을 어느 정도 떨친 것 같긴 했지만, 과연 그자가 사경을 헤맨다는 얘기를 듣고도 괜찮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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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 대사님이 직접 헤일턴까지 마중 나와 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해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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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라고?”

    헤일턴은 황성에서 꼬박 3일은 말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중위 도시였다.

    그런데 저깟 게 뭐라고 일개 왕녀가 제국 황실에 헤일턴까지 마중을 나오라 말라, 그것도 감히 리엘라를 직접 부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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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혼자가 곧 죽을 지경인가? 왕녀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보니 이성을 상실하고 미쳐 돌아가는 모양인데.”

    평소보다 몇 배는 날카로운 헤르한의 독설에 이엘을 포함한 모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지, 이엘은 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이를 갈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헤르한이 알아서 명령을 내릴 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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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히 리엘라는 보내지 않는다. 리엘라뿐 아니라 우리 황실의 그 누구도 왕녀 일행을 마중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 사내가 죽거든 그때 다시 연통하라고 해. 그땐 시신을 운구할 마차 한 대 정도는 보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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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적어도 이 사안에 대해선 헤르한과 이엘의 의견이 일치한 듯,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눈빛이 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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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실은 리엘라가 모르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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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하겠습니까? 저희가 입을 다물어도 요새 리오타 왕국에서 온다는 왕녀 커플에 대한 소문이 꽤 떠들썩합니다.”

    아시온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그럴수록 헤르한의 눈빛은 결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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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능하게 해야지. 리엘라를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면 돼. 한동안 내가 리엘라와 함께 지내겠다. 문제없겠지?”

    이 물음은 사실 ‘문제없어야 할 거다’라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덕분에 제스와 아시온은 동시에 움찔거리며 서로 눈치를 주고받아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제는 헤르한의 건강 상태를 핑계로 둘을 갈라놓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몸이 나은 원인을 확실히 하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차마 리엘라의 보좌관이 듣는 앞에서는 할 수도 없었다.

    *

    그렇게 리엘라의 ‘은밀한 요양’ 작전이 시작된 후.

    이젠 비밀 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정문을 이용해 당당히 호수궁 침실로 들어간 헤르한이 맞닥뜨린 것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웅크린 리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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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아직도 자는 것인가?”

    침대에 걸터앉은 헤르한이 리엘라의 어깨를 흔들어보았지만 리엘라는 묵묵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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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또 기절? 이번엔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당황하던 헤르한은 순간 이불 밖으로 빼꼼히 삐져나와 있던 리엘라의 발가락이 안으로 쏘옥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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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이제는 정신이 확실히 든 모양이군. 귀엽게.’

    헤르한은 절로 비죽거리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느라 곤란할 지경이었다.

    헤르한의 짐작이 맞았다.

    회복제까지 마시고 잠깐 잠들었던 리엘라는, 드디어 온전한 정신을 갖춘 채 잠에서 깨어났다. 온전한 정신만 있는 게 아니라 온전한 기억도 있었다.

    리엘라는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 그 뜨거웠던 순간부터 새벽녘 황제의 품 안에서 잠꼬대 같은 말을 웅얼거렸던 것, 또 오늘 아침 헤르한의 탄탄한 맨가슴 살결 위에 꼼지락대며 그림을 그렸던 것이나 초콜릿 향이 그윽하던 입맞춤까지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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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절할 거면 기억도 같이 없어지든가!’

    리엘라의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마구 흘렀다.

    차마 황제를 볼 낯이 없어서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지만 언제까지 이런 회피가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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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엘라. 설마 또 기절한 것은 아니지? 초콜릿을 줄까? 그러면 일어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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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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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반말한 것이 걸려서 그러나? 그거라면 용서해주지. 대신 앞으로도 둘만 있을 땐 내게 반말한다는 조건으로.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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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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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면 물을 마시겠어? 아까 네가 계속 입에 물고 놀던 빨대가 여기 어디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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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요. 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만요. 폐하!”

    결국 리엘라는 헤르한의 짓궂은 도발에 5분도 버티지 못하고 이불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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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잘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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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절. 초콜릿. 반말. 빨대. 전부 다요!”

    샐쭉하게 뜬 황제의 눈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하는 대답은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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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부 다 기억하네.”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를 빤히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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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이군. 나 혼자만의 추억으로 남았으면 정말 섭섭할 뻔했어.”

     

    ***

    파발마가 도착했다.

    이틀 만에 답장이 도착하다니. 이렇게 빠른 파발마를 보낸 것을 보면 황실 쪽도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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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됐네.’

    그레타는 황실에서 보내온 답신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의 의도한 대로였다. 황제는 분노했고 당연히 리엘라를 보내지도 않았다. 역시 최대한 뻔뻔하게 황당한 요구를 하길 잘했다.

    만족스럽게 웃던 그레타는 편지를 꼭 쥐고 파비안의 침상 안으로 들어갔다.

    파비안의 가까이 몸을 끌어당겨 앉을 때는 어느새 미소를 싹 거두고 잔뜩 걱정 어린 가면으로 제 얼굴을 중무장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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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비안. 이를 어쩌지? 리엘라의 답신이 도착했는데…….”

    파비안은 ‘리엘라의 답신’이라는 말에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걸 보고 그레타는 저도 모르게 험악한 표정을 지을 뻔했지만 필사의 심호흡으로 분노를 달랬다.

    화를 내면 안 된다.

    최대한 안타까운 표정으로. 네가 받을 상처에 나까지 정말 마음이 아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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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지? 리엘라는 오지 않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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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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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 네가 사경을 헤맨다는 말도 다 했는데. 그래도 그러든 말든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네.”

    그레타는 최대한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애처로운 얼굴로 말했다.

    파비안이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손을 내밀기에, 그레타는 당당하게 황실의 답신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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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보면 더 마음 아플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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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보고 마음껏 아파해.’

    그레타의 말이 맞았다.

    서신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갈수록, 가뜩이나 병색에 창백해진 파비안의 얼굴이 더욱 파르라니 절망으로 물들어갔다.

    그레타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사랑하는 남자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마냥 마음 편할 리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곪아버린 살점을 칼로 긁어 떼어내는 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파비안은 평생 리엘라의 그림자나 쫓으며 살 테니까.

    마침내 파비안이 힘없이 서신을 떨구었을 때 그레타는 파비안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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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이제 그만 인정해. 리엘라는 널 버린 지 오래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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