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달아요 (52/154)


#52 달아요
2021.12.26.


리엘라의 침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그것도 풀어 헤쳐진 옷자락만큼 잔뜩 느른하게 풀어진 얼굴로.

이엘은 당황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곧장 시선을 깔고 예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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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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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것까지는 없고. 용건만 간단히 하면 좋겠군.”

헤르한의 태도는 공격적이었다.

당연했다. 밤중에 리엘라를 아무렇게나 찾아오는 사내 따위, 탐탁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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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님이 편찮으시다기에 걱정되어왔습니다.”

이엘의 대답은 담백했다. 헤르한은 그 정갈한 토씨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리엘라를 ‘대사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꼭 그만의 애칭 같아서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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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님’은 괜찮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서 헤르한은 굳이 ‘대사님’이란 호칭을 따라 해가며 대답했다.

어린아이의 장난감 구슬을 눈앞에서 빼앗듯, 실로 유치한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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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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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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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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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둘의 대화가 헛도는 동안 어색한 긴장감이 주변에 팽팽했다.

일부러 벽에 느슨하게 몸을 기댄 헤르한의 어깨 뒤로는 침대 위에 봉긋하게 웅크린 몸이 보였다. 리엘라였다.

헤르한은 이엘을 빤히 노려보았다. 이래도 계속 거기 그러고 있을 거냐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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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대사님께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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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으니 나중에 다시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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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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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지금 내가 대신 전달하지.”

다른 남자가 리엘라에게 건네는 병문안 선물 따위, 당연히 달가울 리가 없었다. 헤르한이 생각을 고쳐먹고 이엘에게 손을 내민 것은 순전히 자신이 선물을 ‘사전 검열’ 해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정 웃긴 선물이면 제 선에서 가져다 버릴 생각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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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열제와 초콜릿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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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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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님께서 최근에 재미있게 보시던 것이라 들고 왔습니다. 휴식하시는 동안 심심풀이로 읽으시면 좋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네가 챙기지 않아도 리엘라는 내 옆에서 심심할 틈이 없을 것인데.

헤르한은 짜증을 누르며 이엘이 건넨 책을 살피다가 그 책의 제목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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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릴과 안투 신화 연구?’

다행히 이엘은 헤르한이 동요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헤르한은 일부러 책을 떨어뜨렸다. 이엘이 빠르게 허리를 숙여 다시 책을 건네줄 때, 헤르한은 책을 잡는 척 이엘의 손을 살짝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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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엘의 속은 읽히지 않았다.

오늘 아침부터 또 이상증세가 발현된 덕에 헤르한은 황성 바깥 어느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장사꾼의 속마음까지도 다 들어야 했다.

온종일 온갖 이들의 속내를 듣느라, 또 그걸 애써 진정해가며 정밀검진을 치르느라 지칠 대로 지쳤건만 정작 중요한 이의 마음은 들리지 않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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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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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없다. 이만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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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엘의 마음이 읽히지 않는 건 찝찝했지만, 그렇다고 이엘을 리엘라의 방문 앞에 오래 세워두는 건 더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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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바이스. 넌 리오타 대사관의 직원일 뿐이다. 리엘라의 보좌관이라고 해서 이런 것까지 챙길 의무는 없다는 뜻이다.”

아카데미 수석을 할 정도로 영특한 남자라면, 이 말에 담긴 경고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니면 그랬기 때문인지.

이엘은 헤르한의 어깨너머로 아득한 시선을 던지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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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로 온 건 아니었습니다.”

순간 헤르한의 푸른 눈이 살기로 등등해졌다.

여태껏 이엘을 대하면서도 유치한 질투라고 스스로 우습게 여겼던 것이 이젠 정말 뜨거운 불꽃이 되어서 위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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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명은 따르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이엘이 떠나고 난 후, 헤르한은 그가 주고 간 책과 초콜릿 상자를 신경질적으로 팽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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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내게만 달콤한 걸 내주는 게 아니었어? 그새 저 사내와 네 입맛을 공유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보좌관 따위 고용하지 않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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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좀 떠봐. 네가 미워죽겠단 말이다. 확 안아버릴 수도 없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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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에 상주하는 몇몇 대신이나 시녀들과 달리 이엘은 호수궁에 출퇴근하는 처지였다.

리엘라의 병문안 아닌 병문안 이후, 늦은 귀갓길을 걷는 내내 이엘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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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몸살은 핑계였던 건가.’

자신이 떠난 후, 다시 더운 침실에서 황제와 시간을 보낼 리엘라의 생각에 속이 갑갑했다.

사실 그건 그리 대단한 배신도 아니었다. ‘리엘라 블리니테’라는 여자가 황제의 환심을 사서 대사직에 앉은 거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호수궁에서 만난 리엘라 블리니테는 이엘의 예상과는 달랐다.

맑고 사랑스러운 여자. 권력을 쫓는 게 아니라 제 꽁무니를 쫓으면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를 쓰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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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 혼자 멋대로 착각했나.’

세간의 말대로 리엘라는 그렇게 대단하고 악랄한 요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간의 말대로 리엘라는 황제의 사랑을 받는 여자였다.

이엘은 그 사실을 바로 어제 깨달았고, 오늘 확인사살까지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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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경 쓸 건 없어. 난 내 할 일만 하면 그뿐…….’

이엘은 그렇게 자신을 다잡았다.

낡은 집 앞에 도착해 삐걱대는 문을 여니 늙은 어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그를 마중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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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엘! 잘 다녀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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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엘은 대충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린 누이들은 이미 거실 소파 위에서 세상모르고 잠든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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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오늘도 높은 분들은 많이 만나 뵈었고? 폐하는? 폐하는 뵈었니? 아, 그 대사인지 뭔지는 집안이 별 볼 일 없는 여자라며? 그쪽엔 적당히 장단만 맞춰주고 너는 조금이라도 더 높은 분께 연줄을 대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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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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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 할 말 한 건 아니잖니? 공작 어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네가 네 할 일을 잘해야 할 것 아니야?”

또 그 지긋지긋한 소리.

이엘은 제 귀를 틀어막을 도리가 없어 좁은 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날 어머니는 오늘따라 방 안까지 따라 들어와 무언가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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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작 어른께서 편지를 보내셨더구나. 네가 호수궁 대사관에 취직했다는 얘길 들으신 모양이야.”

그저 귀찮은 마음에 한숨짓던 이엘은 ‘공작 어른의 편지’라는 말에 바짝 고개를 들고 긴장했다.

노모가 나간 뒤에 홀로 남은 방 안에서 편지를 여는 이엘의 손끝이 파르라니 떨렸다.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편지는 벌써 그의 소식을 접한 공작의 따가운 훈계로 시작되고 있었다.

[요직을 마다하고 고르고 고른 자리가 기껏 리오타 대사의 보좌관이라니. 몹시 실망스럽구나. 이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엘은 씁쓸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네가 그런 선택을 한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보잘것없는 만큼 자유로울 테니 어쩌면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더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누구보다 이엘 너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다. 이제는 여태껏 네 집안을 먹여주고 거두어 준 은혜를 갚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마냥 썼던 마음은 이제 두려움이 되어 이엘의 목을 뻑뻑하게 졸랐다.

이엘은 족쇄 같은 그 편지를 차마 구겨버리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노려보았다.

[사냥개의 핏줄이면 사냥개답게 굴어야지. 연맹이 부활해야만 너와 네 가족이 산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반드시 엔릴과 안투의 후손을 찾아서 나에게 데려와.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

날이 밝았다. 초췌한 꼴로 연구실 안에 들어서는 아시온을 보고서야, 제스는 그 사실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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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는 또 호수궁으로 가셨다. 또 거기서 리엘라랑 주무셨어. 아니, 내가 분명히 출구를 철석같이 지켰거든? 근데 아침에 들어가니 안 계시는 거야. 놀라서 뒤져보니까 비밀 통로가 있더라? 하하하하. 비밀 통로 말이야. 하하하하하.”

아시온이 크게 웃었다. 분명 소리는 호탕한데 표정엔 영혼이 없는 이상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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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나 했겠어? 참나. 아니, 나에겐 말씀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냐? 세상에 근위대장을 따돌리는 주군이 어디 있어? 이럴 거면 뭐 하러 근위대장을 둬? 그냥 날 해고를 하시는 게 피차 편한 일 아냐? 나도 마구간에서 건초나 푸는 게 더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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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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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제스. 내 말 듣고 있냐고.”

하지만 넋이 나간 아시온보다, 더 넋이 나간 건 제스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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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뭔데.”

아시온은 금방 분위기를 알아챘다.

제스는 아시온과 달랐다.

아시온은 주군에게 골탕 먹고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 일상이라지만, 주군의 주치의인 제스가 저런 얼굴로 굳어 있다는 건 꽤 심각한 상황임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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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검진 결과가…….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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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안 좋냐?”

밤새 혼이 다 빠진 듯 기력 없이 뱉은 제스의 말에 아시온의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차라리 해고해 달라며 헤르한을 욕하던 그는 이제 전에 없던 애처로운 얼굴로 제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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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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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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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도가 제로. 지난 10년간 몸에 쌓였던 내상도 전부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기대 수명은……. 몰라. 이 상태면 적어도 나보다 더 오래 사실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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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고!?”

아시온은 벙찌다 못해 제스의 어깨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등짝도 가볍게 한 대 쳤다. 네가 너무 피곤해서 결과를 잘못 해석한 것 아니냐며.

제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유령처럼 스르륵 일어났다. 호수궁으로 가자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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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헤르한의 귓가가 간지러웠다. 나비 한 마리가 귓가에서 팔랑팔랑 날갯짓이라도 하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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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폐하…….”

뭔진 몰라도 꽤 기분 좋은 속살거림이네.

저도 모르게 슬쩍 웃으며 뒤척이던 헤르한은 순간적으로 그 목소리의 정체를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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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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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앗.”

헤르한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자 그의 몸에 안겨 있던 리엘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힘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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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엘라. 정신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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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으응. 정신이. 네에.”

리엘라의 말은 평소보다 느리고 둔했다. 꼭 엊그제, 땀을 잔뜩 흘린 새벽녘처럼.

헤르한은 그런 리엘라가 반갑고도 예쁜 마음에 뛸 듯했다. 당장이라도 리엘라를 일으켜 세워서 얼싸안고 싶은 마음과 계속 이렇게 끌어안고 몽롱한 리엘라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상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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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잠꾸러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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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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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내가 먼저 일어났어요.”

또 헛소리.

헤르한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아마도 리엘라는 자신이 하루를 꼬박 기절해있던 것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의식 속에 본인은 그날 밤 직후 일찍 눈을 뜬 부지런한 사람이고, 헤르한은 늦잠이나 자는 게으른 황제인 셈이었다.

아무렴. 뭔들 중요할까.

헤르한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입술을 그대로 리엘라의 입술 위에 포갰다.

아직 잠결을 다 떨치지 못한 리엘라는 그게 얼마나 농염한 몸짓인지도 모르고, 마냥 기분 좋은 느낌에 그를 더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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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달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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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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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맛. 맛있어요.”

입술이 떨어진 틈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리엘라를 보며 헤르한은 문득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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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초콜릿.’

사실은 어젯밤 이엘이 주고 간 초콜릿을 헤르한이 밤새 전부 먹어치워 버렸다.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헤르한이었지만 그 초콜릿만은 오기로 입안에 밀어 넣었다. 다른 사내가 주는 초콜릿 같은 게 리엘라의 입에 들어가는 일은 무조건 막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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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식으로 들어가는 거라면 썩 나쁘지 않은데.’

헤르한은 의외의 전개에 만족하며 리엘라의 귓가에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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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더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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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하고 리엘라가 대답했다.

헤르한은 리엘라가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귀여운 투정도 리엘라가 곧 정신을 멀쩡히 되찾으면 다신 못 보게 되겠지.

헤르한이 다시 고개를 숙여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는 동안 문밖의 루가 노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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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합니다. 폐하. 밖에 제스 경과 아시온 대장님께서 오셨어요.”

헤르한은 끈질기게 리엘라의 말캉한 속살을 탐하다가 겨우 더운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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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기다리라고 해. 아직, 초콜릿을 먹는 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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